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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Dec 29. 2022

국가 재난 상황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들.

2017년 11월 15일 오후 2시 30분.

대한민국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규모 5.4의 지진이 발생했다. 그날의 나는 학교에서 수능 시험장 준비에 한창이었다. 책상을 옮기고 대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게시판을 가리고 창문에 시험장 번호를 붙였다. 마지막으로 칠판에 수험생 안내 사항을 붙이며 시험장 정리를 끝냈다. 누군가 땅이 흔들리지 않았느냐고 질문했다. 아무 생각이 없던 나는 ‘땅이 흔들릴 리가 있나? 생각하며 교무실에서 마지막 점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뉴스를 보게 되었다. 지진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뉴스 속 거리에는 건물에서 떨어진 돌과 간판이 굴러다녔고 자동차는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생각보다 피해가 컸다. 결국 예상치 못한 지진으로 인한 수험생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그해 11월 16일 예정되어 있던 수능은 일주일 뒤로 미루어졌다. 학교는 일주일 뒤 다시 수능 시험장을 꾸리게 되었다.

지진 때문에 난리가 난 우리나라와 달리 더 커다란 재앙을 지진으로 착각한 1986년의 소련은 국가적 재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우르릉!!


1986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 키예프 북쪽에 있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4호기에서 갑작스럽게 큰 소리와 진동이 울려 퍼졌다. 원전 관계자들은 커다란 지진이 발생했다고 착각했다. 착각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바뀌기까지는 생각만큼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체르노빌 사고 당시 우크라이나에서 신참 교수 생활을 한 세르히 플로히(Serhii M Plokhy)는 체르노빌 사건의 원인, 결과, 교훈을 역사적 맥락과 연결한 책이 없음을 깨닫고 체르노빌 재앙을 다루는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체르노빌 히스토리』는 그렇게 등장하였다.



재난 상황에서 국가가 할 일


삐-삐-삐-!!


원하지 않은 시끄러운 알람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긴급 재난 문자(안전 안내 문자)였다. 코로나 초기부터 본격적으로 알림 문자가 오기 시작하더니 2019년은 긴급 재난 문자로 뒤덮였다. 수시로 여기저기 핸드폰이 동시에 울리는 모습은 마치 재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과거 재난은 홍수, 지진과 같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대규모 천재지변을 지칭했다. 발생 가능성과 상황변화를 예측하기 어려웠던 과거 재난은 늘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었다.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갑작스러운 재난은 항상 강렬한 두려움을 만들었고 강렬한 두려움은 생각을 멈추게 만들어 더 큰 피해를 발생시켰다. 더군다나 현대에 와서는 대규모의 인위적 사고의 결과가 자연 재난을 능가함에 따라 ‘재난(災難, diaster)’은 자연 재난과 사회재난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바뀌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긴급히 알려지는 재난 정보는 얼마나 정확하고 빨리 전달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피해를 줄일 수 있기에 국민에게 이를 전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국가 의무 중 하나가 되었다.

폭발이 일어난 지 36시간이 지났지만 사고에 대한 신뢰할 만한 정보가 제공되지 않았고, 시민들은 알아서 행동해야 했다. 그들은 자신과 아이들을 어떻게 보호해야 하는지 제대로 된 지침을 받지 못했다. <세르히 플로히(2021), 체르노빌 히스토리: 재난에 대처하는 국가의 방식, 책과 함께, p.216>

안타깝게도 1986년 소련 국가에 소속된 관료들은 이런 국가의 의무를 잊어버린 듯했다. 상급자에게 질책받을 것이 무서웠고, 문제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 두려워 사람들에게 재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이런 대처는 상황을 악화시켜 갔다. 상급자인 공산당 지도부가 정확한 현장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였고 엉뚱한 명령을 내리게 하였다. 이후 공산당 지도부가 늦게나마 정확한 현장을 파악했으나 그들은 혼란이라는 또 다른 걱정에 사람들에게 신뢰할만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결국 재난 상황에서 소련 시민들은 국가에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

국가란 정부를 구성하는 사람에 의해 움직이며 그들의 가치와 철학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정치는 지배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른 압력에 의해 대체적인 윤곽과 방향이 잡힌다고 했다. 소련 공산당 지도부와 소련 정부는 체르노빌 재난에서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그들의 행동을 통해 이해관계, 가치, 철학을 보여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1986년의 소련 공산당 지도부와 정부를 구성하던 사람들은 단순히 높은 자리에서 소련을 지배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Photo by Matthew TenBruggencate on Unsplash


세르히 플로히의 『체르노빌 히스토리』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


재난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기술이 발달하는 사회 속에서도 우리는 재난을 100% 방지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사회적인 재난은 언제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는 문제로 바뀌고 있다. 저자는 『체르노빌 히스토리』를 통해 1986년 사회적인 재난 속에서 고통스러웠던 소련 주민들의 시간과 공간을 보여주며 궁극적으로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길 바라고 있다. 그가 그려내는 생생한 재난 현장이 너무 실감 났을까. 책을 읽으면서 사고 당시 아무것도 모르며 고스란히 피해를 보고 있는 소련 주민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 직접 읽어본다면 안타까움과 답답함에 자꾸 한숨이 나올지도 모른다. 답답한 마음을 추스르고 스스로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은 어떨까? 무엇이 읽는 사람을 답답하게 하는지 말이다.

나는 조사위원회가 계속 조사 활동을 하고 체르노빌 재난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더 많은 진실을 찾아내기를 원합니다. 이는 누군가에게서 자유를 박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계급의 지도자에게 그들의 국민에 대해 짊어진 비상한 책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세르히 플로히(2021), 체르노빌 히스토리: 재난에 대처하는 국가의 방식, 책과 함께, p.441>

소련의 피해자들은 진실을 요구했고 그로 인해 지도자의 책임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일은 비단 과거의 일만은 아닌 듯하다. 현시대에서 재난을 마주한 피해자들도 똑같이 진실을 요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은 답답할 정도로 느리고 밝혀진 진실은 냉혹하고 잔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는 현재와 살아갈 미래가 과거보다 더 나은 사회를 원하기에 느리더라도 진실이 밝혀질 것을 믿고 진실이 밝혀질 수 있도록 힘을 실어 주며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고통을 인정하고 진실을 요구하는 그들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재난을 막을 수는 없어도 진실을 통해 미래의 재난과 재난의 확산은 막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체르노빌 히스토리』처럼 재난이 지나간 후 재난 상황과 그 이후에 일어났던 국가의 대처가 우리를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지켜주는지 자세하고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대처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재난에서 우리의 안전을 지켜줄 수 있는 마지막 안전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지 정보


지은이: 세르히 플로히(Serhii M. Plokhy)

옮긴이: 허승철

제목: 체르노빌 히스토리(Chernobyl-The history of a nuclear catastrophe)

판사항: 1판 1쇄

발행처: (주)도서출판 책과함께

출간 연도: 2021년 6월 30일

페이지: 535면



Reference


H. W. Heinrich(1941), Industrial Accident Prevention, Mcgraw-Hill Book company

김민주(2008), 하인리히 법칙, 토네이도미디어그룹(주)

권설아, 라정일, 변성수(2019), 조선시대와 현대의 재난관리계층 비교분석: 『조선의 하천』을축년 대홍수와 괴산댐 월류를 중심으로, 충북연구원 재난안전연구센터

김위경, 정기신(2012), 원자력발전소 화재방호와 소방시설 기술기준 적용에 대한 고찰, 한국화재소방학회 논문지, 제26권 제6호

라인홀드 니버(2021),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주)문예출판사

브라이언 헤어ㆍ버네사 우즈(2022),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Survival of Friendliest, 디플롯

유시민(2017), 국가란 무엇인가, 돌베개

국가법령정보센터,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재난안전법) [https://www.law.go.kr/LSW/lsLinkProc.do?lsNm=재난및안전관리기본법&joLnkStr=&mode=20&chrClsCd=010202#]

인천광역시 연수구 재난안전대책본부 [https://www.yeonsu.go.kr/safety/disaster/define.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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