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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하 Jan 30. 2023

진화의 평행선 위에서 걷고 있는 인간과 침팬지의 정치

퇴근길 집에 다 와가는 데 멀리서 커다란 음악 소리와 마이크 소리가 섞여 들려온다. 대로변에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가까이 가니 이유를 알겠다.


“여러분 ☆◯☆에 투표해 주세요!”

“반갑습니다. ▢△▢입니다. 투표해 주세요!”


몇 년에 한 번 투표할 시기가 되면 만나게 되는 선거 유세였다. 정치는 TV나 신문처럼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것을 구경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투표할 때를 제외하곤 정치와 직접적인 관련 없이 살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정치가 궁금했던 나는 『군주론』을 사서 보기도 했다. 물론 그 책을 보고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 건 비밀이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침팬지 폴리틱스: 권력 투쟁의 동물적 기원』의 후면 표지에 적힌 추천사와 서문에 적힌 글에 이끌려 또 한 번 장바구니에 책을 집어넣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능가하는 이 책은 침팬지 집단에서의 권력 탈취와 사회 조직을 묘사하고 있다. 나는 더 이상 학문적 정치학이나 현실 정치를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짐콜린스 Jim Collins 기업컨설턴트,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저자 <프란스 드 발(2019), 침팬지 폴리틱스, 바다출판사, 후면 표지 추천사>
“침팬지도 정치를 한다”<프란스 드 발(2019), 침팬지 폴리틱스, 바다출판사, p.9>

홀린 듯이 느리게 표지를 감상했다. 초록색 조명 아래 무심한 듯 무언가를 쳐다보고 있는 침팬지의 모습 옆에 적힌 CHIMPANZEE POLITICS. 매혹적인 표지와 침팬지 행동을 관찰해 정치적 의미를 해석해 보여준다는 소리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결국『침팬지 폴리틱스: 권력 투쟁의 동물적 기원』의 결제하기 버튼을 눌렀다.

택배가 도착한 날.

책 제목을 본 아내는 ‘아무도 안 볼 것 같은 책을 도대체 어디서 산 거야?’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시선을 창가로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아내는 이내 눈길을 거두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멀어졌다. 나는 조용히 창고 방에 가서 책장에 꽂혀 있던 『군주론』을 꺼내 같이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권력을 향한 인간과 침팬지가 보여주는 욕망의 표현


연말 학교에서 열리는 다음 연도 업무 분장 회의장.

교장 선생님, 교감 선생님을 비롯한 각 부서의 부장들이 웃으면서 등장했다. 반가운 인사는 잠시. 회의장엔 차가운 기운만 맴돌았다. 겨울이라 히터가 없어서 차가운 바람이 부는 게 아니다.

다른 부서로부터 갑작스레 업무를 넘겨받을까 봐 다들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고 입장한다. 목적은 하나다. 추가 업무 받지 않기 그리고 가능하다면 담당하는 부서 업무 중 무엇이든 슬그머니 떠넘기기. 안건이 올라올 때마다 눈치 게임이 시작된다.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손은 눈보다 빠르니까. 미리 결을 맞춰둔 부서들의 이야기는 아무 소용이 없다. 손짓 하나에 회의장에서 비밀스럽게 연합이 결성되었다 흩어진다. 공감과 반감은 이미 늦었다. 업무를 떠넘긴 부서는 속으로 승리의 웃음을, 추가 업무를 배정받은 부서는 속으로 패배의 비명을 지른다. 그 뾰족한 눈치 게임이 떠오른 건 『침팬지 폴리틱스』에 묘사되는 수놈 침팬지가 권력을 위해 하는 정치적인 행동을 읽을 때였다.

나이가 비슷한 이 두 수놈들은 개인적인 친밀도에 따라 개입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어떤 정치적 파장을 몰고 올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러한 내 해석에 비춰보면 그들의 개입은 권력을 증대시키려는 정책에 의한 것이다. 능숙하고 유연하게 연합을 형성하거나 파기하는 그들의 행동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행동들이 마치 정책의 번복, 합리적 결정, 그리고 기회주의와 같은 행동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이런 정책에 공감과 반감이 끼어들 공간은 없다. <프란스 드 발(2019), 침팬지 폴리틱스, 바다출판사, p.289>

흔히 인간이 동물보다 복잡하고 고등동물이라 생각하지만, 권력 가까이에 있는 침팬지의 모습은 인간과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라면 인간보다 권력과 욕망에 더 노골적인 행동만 있을 뿐이었다. 우리의 회의가 차가웠던 것은 회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권력(= 업무 줄이기)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드러나서이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이 회의가 끝나면 다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욕망을 감춘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고생했다고 인사한다. 인간은 그래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침팬지와 차이는 그것뿐이었다.



『침팬지 폴리틱스』를 통한 정치의 재정의


이 책은 영장류 학자인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이 네덜란드의 아른험 동물원에서 치열하게 그리고 꾸준하게 침팬지를 관찰하고 세심하게 기록한 동물행동학자의 연구 일지에 가까운 책이다. 그렇기에 초반에 등장하는 침팬지들 소개를 읽기 위해서는 약간의 끈기가 필요하다. 끈기를 통해 ‘권력 교체’에 도달했다면 이제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순삭을 기대해도 좋다. 흥미진진한 침팬지의 권력에 대한 도전과 사회생활에 관한 정치 이야기가 끝나면 저자가 생각하는 정치를 이야기한다.

만약 정치를 영향력 있는 지위를 획득하고 유지하는 사회적 술수라고 넓게 정의한다면 정치는 모든 사람과 관계된다. 중앙정부나 지방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가정, 학교, 직장, 그리고 각종 모이메서 우리는 정치라는 현상과 일상적으로 마주하고 있다. 우리는 매일 갈등을 야기하거나 혹은 다른 이들의 갈등에 개입한다. 우리에게는 지지자와 경쟁자가 있다. 그리고 이들과의 유익한 관계를 매일매일 다져간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적인 정치 행위가 항상 그 자체로서 인식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도를 은폐하는 데 달인이기 때문이다. <프란스 드 발(2019), 침팬지 폴리틱스, 바다출판사, pp.311-312>

저자가 생각하는 정치를 보고 우리의 정치를 돌아본다. 어렵다. 우리는 정치를 너무 어렵게만 보고 있는 듯하다. 국립 국어원에서도 정치를 ‘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로 정의하는 것을 보면 우리 일상의 삶 속에 정치는 없었다. 아니 있었지만, 욕망을 감추듯이 사실은 감추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침팬지 폴리틱스: 권력 투쟁의 동물적 기원』을 보고 미국 전 하원의장 뉴트 깅그리치(Newt Gingrich)는 정치에 입문한 후 꼭 읽어야 할 책이라 말했다. 나는 정치를 설명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 중에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을 읽는다면 정치에 대해 나름대로 정의를 내려보는 것은 어떨까.


<침팬지 폴리틱스 프랑스판 표지: 저자의 의도와 다르게 침팬지가 정치인들을 희화하기 위해 이용되었다.>


프란스 드 발이 이야기하는 『침팬지 폴리틱스』에 대한 개인적인 잡(?) 생각


제인 구달(Jane Goodall)은 40년 동안 침팬지를 관찰해 침팬지의 도구 사용, 육식 등에 대해 밝혀 냈다. 프란스 드 발은 제인 구달에 이어 영장류의 장기 연구 프로젝트에서 침팬지의 연구가 어떻게 인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밝혀냈다.

결과적으로 나는 아른험의 침팬지들이 겪은 일들을 인간의 행태와 비교할 필요 없이 거의 날것 그대로 묘사할 수 있었다. 인간의 사촌에게 곧장 스포트라이트를 비춤으로써 침팬지의 행동으로부터 그 행동의 목적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회사나 워싱턴의 정치 회랑, 혹은 대학 등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면 사회적 역학은 어디서나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란스 드 발(2019), 침팬지 폴리틱스, 바다출판사, pp.23-24>

이를 보고 행동 생태학자 바바라 스머츠(Barbara Smuts)는 인간과 침팬지는 진화의 유산을 공유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렇다 믿기진 않겠지만 우리는 침팬지와 똑같이 정치를 하는 사회적 존재이자 진화의 평행선에서 같이 걷고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이제는 인간도 침팬지도 정치적 동물이라고 바꿔 말해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다 발견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의 흔적을 공유해 본다. 아래 인용문에서 ‘침팬지’와 ‘동물’은 ‘운반체’로 ‘자손’은 ‘유전자’로 바꿔서 읽어 보자.

부성과 번식 성공이 연관되어 있지만 침팬지(이에룬)는 궁극적 목적에 대해 알지 못한다. 동물은 성과 번식의 관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침팬지는 쾌락만을 위해 교미할 뿐이며, 자손에게 이익을 준다는 사실을 모른 채 야심과 질투심, 그리고 보호 행동을 보이는 것이다. <프란스 드 발(2019), 침팬지 폴리틱스, 바다출판사, p.254>

이해가 안 된다면 『이기적 유전자』를 읽어봐야 한다.




서지 정보


지은이: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

옮긴이: 장대익ㆍ황상익

제목: 침팬지 폴리틱스(Chimpanzee Politics): 권력 투쟁의 동물적 기원

판사항: 개정판 2쇄

발행처: (주)바다출판사

출간 연도: 2019년 10월 15일

페이지: 335면



Reference


Barbara Smuts(1985), Chimpanzee Politics Book Review, Ethology and Sociobiology 6:127-129

니콜로 마키아벨리(2009), 군주론, (주)을유문화사

데일 카네기(2008), 카네기 인간관계론, (주)씨앗을 뿌리는 사람

아리스토텔레스(2017), 정치학, 도서출판 길

이진우(2019), 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 (주)휴머니스트 출판그룹

최재천(2004), 동물의 인지능력과 인간 두뇌의 진화, 인지과학, 제15권 4호.

바다출판사, 25주년 기념판으로 다시 만나는 아른험의 침팬지들 [https://www.badabooks.co.kr/44/?q=YToy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zOjQ6InBhZ2UiO2k6ODt9&bmode=view&idx=11981325&t=board]

최재천(2004), 침팬지에게 정치를 배워라, 조선일보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4/04/02/200404027040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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