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구성작가네?”
방송국에서 PD로 근무하다 그만두고 학교에 온 선생님의 대답이었다. 방송가의 시스템을 전혀 모르는 나는 아내의 언니가 구성작가임에도 그 단어의 무거움을 알지 못했다. 그냥 뭉뚱그려 모두가 똑같은 방송 작가라고만 생각했다. 당시 나에게 방송이란 화려한 배우와 스포트라이트가 비지는 곳, 많은 사람의 선망이 되는 장소 중 하나였다. 그런 나에게 처형은 내 인생에는 없을 신기한 곳에서 일을 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아내는 지나가는 말로 언니가 처음 방송 작가 일을 시작했을 때 받은 월급은 용돈 정도밖에 벌지 못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 용돈이 어느 정도 인지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다 이은혜 작가가 방송가를 풀어낸 『쓰지 못한 단 하나의 오프닝』을 보고 알게 되었다. 처형이 받은 열정페이의 크기를.
저자는 전국 언론 노동조합의 발표를 인용해 열정 페이(熱情 pay)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곳 중 하나 방송가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지난 2019년 4월에 전국 언론 노동조합이 전국 방송작가 580명을 상대로 실태조사를 진행한 결과, 본인이 프리랜서 형태로 고용되어 있지만 상근한다는 대답이 72%였다. <이은혜(2021), 쓰지 못한 단 하나의 오프닝, 꿈꾸는 인생, p96>
작가들을 고용하지만,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던 방송가는 프리랜서와 상근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조합시켰다. 방송에서 떠드는 불합리한 계약은 여기에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 이 말의 어색함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저자의 해석을 읽고 나서야 프리랜서와 상근이라는 단어 조합의 불공정함을 이해했다. 어째서 해석을 읽기 전 불공정함을 인지하지 못했을까. 생각에 질문을 더해본다. 내가 겪은 일이 아니라서 생각하지 못했을까? 공정함과 합리적임을 기본적으로 탑재하지 못해서일까? 여러 고민이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대목이었다.
저자는 방송가의 구인 공고에 숨겨진 비밀도 보여주었다. ‘탄력적 상근’이라는 묘한 단어의 신세계. 해석된 단어는 방송 회사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책을 읽으면 이처럼 기이한 단어가 있을까 싶다가도 필요에 의하면 뭐든 만들어내는 현실에 씁쓸해지기도 했다.
일은 시키고 싶고 노동자 계약을 하면 책임져야 하는 문제는 싫고 열정이 넘치는 사람은 많으니 무책임한 야망이 피워낸 불을 보고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불빛 주위를 빙빙 맴돌다 불꽃에 사그라드는 방송 노동자의 비정한 현실에 일순간 소름이 돋는다.
‘원래 그런 것’이라는 말은 기득권의 언어다. 논리와 혁명에 대응하는 가진 자의 마스터키다. ‘원래’에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직까지 여성들은 투표소에 들어갈 수 없고, 흑인과 백인이 따로 앉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은혜(2021), 쓰지 못한 단 하나의 오프닝, 꿈꾸는 인생, p172>
‘원래 그런 것’ 익숙한 단어다. 직장에서도 의문이 생겨 질문하면 늘 돌아오는 답변 중 하나였다. 그러나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는 정확하고 구체적인 이유였다. 내 생각에 ‘원래 그런 것’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건 그냥 답변하기 싫은 또는 책임지기 싫은 자들의 변명 같았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궁금했을 뿐인데. 그런 진짜 이야기는 가물에 콩 나듯 들려왔다. 그나마 억지로 이유를 듣기 위해선 상대방의 불쾌함을 최대한 친절하고 부드럽게 온몸으로 받아야 했다. 슬프게도 저자의 말처럼 약자는 늘 미소와 다정을 강요받고 문제를 제기할 때조차 상냥해야 그 이유를 간신히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사회생활이 다 그렇지 뭐’라고 자조 섞인 말로 포기할 수도 있겠으나 옆에서 부쩍부쩍 커나가는 아이를 보면서 이제는 그러지 말아야 할 시대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다행인 건 지금까지 쉬쉬했던 일들이었던 약자의 목소리가 세상에 들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건 정말 중요한 일이며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언젠가는 더 큰 목소리가 되어 세상을 바꿀 힘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새까만 어둠으로 뒤덮인 기다란 터널에서 밝은 빛이 보이는 출구를 향해 작은 불빛 하나에 의지해 빠져나가는 일과 같다고 생각한다. 꽤 걸어온 듯하지만 여전히 출구는 멀리 보이고 가도 가도 가까이 오지 않는 출구에 기운이 빠지기 대부분이다. 이 길이 내가 원하는 길이 맞을까 고민하면서도 가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세상은 오지 않는 사실과 도착해도 내가 원하는 세상이 맞겠느냐는 고민에 쉽게 지쳐버리기 일쑤다. 그래서였을까. 방송 작가의 노동권에 힘쓰던 박지혜 작가는 ‘지난한 과정에 지치지 않아야 하는 일’이란 말을 남겼다.
책을 읽다 다행스러운 점은 작가들의 투쟁이 투쟁으로만 끝나지 않고 성공한 결과도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답답한 현실에 물 없이 삶은 달걀만 몇 개를 먹다 만난 사이다처럼 반가웠다. 뒤이어 그들이 다시 벽을 마주하는 현실의 비정함이 있었지만 그래도 응원하고 싶게 만든 책이었다.
높은 산을 올라 보고자 마음을 먹고 꼭대기만 쳐다보고 있으면 까마득함에 언제 정상에 오르냐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시선을 거두어 눈앞의 길에 집중하며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걸어 올라가다 보면 어느새 정상에 도착해 있듯이 지금 내 앞에 보이는 일들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며 응원하다 보면 우리가 원하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세상을 알기 위해 책을 읽어나가야겠다.
지은이: 이은혜
제목: 쓰지 못한 단 하나의 오프닝: 방송가의 불공정과 비정함에 대하여
판사항: 초판 1쇄
발행처: 꿈꾸는 인생
출간 연도: 2021년 7월 1일
페이지: 26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