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중학생쯤부터였을 테다. 책이 가득 찬 책장 사이에서 책을 구경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그 편안함에 언덕길을 20~30분 정도 걸어야 도서관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힘든 줄 모르고 도서관을 쫓아다녔던 기억이 있다. 부모님은 큰아들이 도서관에 공부하러 가는 줄 알고 계셨기에 도서관에 간다는 소리를 들으시면 열심히 하라며 얼마 안 되는 점심값을 손에 쥐어주시곤 했다. 그러나 도서관에 간 나는 책이 가득 꽂혀있는 열람실에서 신나게 판타지 소설을 읽고 있을 때가 많았다. 퇴마록, 치우천왕기, 왜란종결자, 드래곤라자, 더 로그, 세월의 돌, 가즈나이트, 이드, 룬의 아이들, 창룡비상전, 묵향, 비뢰도, 사신 등. 당시 유행한 판타지 소설은 모두 섭렵하고 살았더랬다.
열몇 권에 해당하는 시리즈 하나를 다 볼 때쯤이면 친구들에게 귀동냥으로 얻은 새로운 판타지 소설을 읽기 시작했기에 고등학생이 끝날 때까지 판타지 소설은 내 손을 떠날 줄 몰랐다. 그땐 나중에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다 사서 집에서 뒹굴뒹굴하며 하루 종일 보는 게 꿈이었다. 그때의 기억 덕분인지 지금도 서점과 도서관 열람실에서 책을 구경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하곤 한다. 다만 그때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읽고 싶은 책을 한 달에 몇 권씩은 살 수 있는 여력이 생겼으며 어려운 책을 봐야 한다는 허영심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나도 이제 이 정도는 봐야 하지 않겠어?’
도대체 어디서 오는 허영심인지 모르겠지만 이 허영심으로 산 책이 어림잡아 책장 4~5칸은 꽉 채우고도 남았다. 그중에서도 다윈의 『종의 기원』은 2권이나 샀다. 옥스퍼드 컬러판으로 1권 그리고 평소 좋아하던 교수님이 기획한 책으로 1권. 이 중에 먼저 산 책은 컬러판이었다. 생물학 전공자라면 이 정도는 봐야 하지 않겠어?라는 마음에 인터넷 서점을 뒤져 페이지 수가 가장 많고 탄탄한 양장본으로 된 『종의 기원』을 구입했다.
이틀 뒤 택배가 도착하였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상자를 열자 탄성이 나왔다. 유광 컬러 표지에 양장본인 그 책은 반짝반짝 윤이 났다. 무엇보다 있어 보이는 책 두께와 설명이 필요 없는 제목에 15초 정도 멍하니 감상하며 감탄을 마지않았다. 소장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그 책의 내용을 이해한 듯했고 나의 지식수준은 올라가는 듯했다. 그러나 그 책은 그 길로 책장 한 구석을 차지하였고 몇 년이 지나도록 내 손에 의해 펼쳐진 적이 없었다.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듯 책장에 꽂혀 있는 그 책은 책장 속 수많은 컬렉션 중에서 당당하게 빛을 내며 나의 마음을 채워 주었다.
그 책으로는 허영심이 덜 채워졌을까. 3~4년 뒤 나는 다시 인터넷 서점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교수님이 기획하신 『종의 기원』이 새로 나왔단 소식 때문이었다. 인터넷 장바구니에 책을 담아두고 며칠을 들락거리며 고민하였다. 이 책은 나의 컬렉션 속에 포함할 가치가 있을까? 나는 이 책을 정말로 볼까? 고민은 길었지만, 결재는 간편했다. 클릭 한 번으로 또 다른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새로 번역된 『종의 기원』을 구입할 수 있었다.
[고객님의 소중한 상품을 가지고 출발합니다]
막상 배송되고 있다는 핸드폰 알림이 울리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옮긴이가 다르고 내용이 조금 다르긴 했지만 동일한 이름의 책을 두 개나 사다니. 그렇지 않아도 집에 책 둘 곳이 없다고 하소연하는 아내의 눈치가 보였다. 책 배송의 기쁨도 잠시. 혹시나 아내에게 구박받을까 싶어 눈치채지 못하게 새로 산 책만 몰래 가까운 책장에 꽂아 두었다. 허영심을 채워줬던 첫 번째 『종의 기원』은 작은 방 책장 구석에 숨겨두었다. 사실 아내는 내 중독을 이미 눈치채고 있을지 모르겠다.
이 허영심이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 차분히 기억을 더듬어 본다. 여러 장면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가끔 아버지가 비교하시던 아친아(아빠 친구 아들)를 이기고 싶어서? 어렸을 때부터 주구장창 들었던 성공 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다짐 때문에? 아니면 남들보다 뛰어나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주변의 부추김? 시간을 두고 상상하자 등장하는 여러 기억의 단서는 모두 하나를 가리켰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바로 그것이었다.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은 필요 이상의 겉치레를 요구하는 허영심을 그려냈고 허영심은 그런 나를 지탱하기 위해 멋있어 보이도록 하는 책을 권했다. 멋있어 보이는 게 인정받는 길이라 여겼던 나는 멋있어 보이고 싶은 마음에 허한 마음의 속삭임을 그대로 따랐다. 읽지도 않는 책을 사대기 시작했다. 처음엔 읽을 거라는 다짐으로 사다가 나중에는 사두면 언젠가는 읽겠지라는 마음에 샀다. 그렇게 구입한 책들이 책장에 꽂혀 있자 허영심이 채워지기 시작했고 그러한 만족감에 지금의 컬렉션이 완성되었다. 그 허영심은 지금도 쉬지 않고 나의 스마트폰 서점 앱 장바구니에 책들을 추가시켰다. 그리하여 지금 내 온라인 서점 장바구니에는 93권의 책이 담겨 있게 되었다.
허영심이 책 수집 중독이라는 타이틀을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다음 날. 그동안 수집한 책들이 꽂혀 있는 책장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제목만 봐도 유명한 베스트셀러, 있어 보이는 제목에 두꺼워 보이는 양장본들로 구성된 컬렉션으론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도 같이 찾아왔다. 이제 어떻게 할 건 데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선택해야 했다. 이 책들을 두고 또 다른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책을 수집할지 아니면 수집한 책들을 읽으며 허영심을 자신감으로 바꿀지. 때마침 시작한 육아휴직이 시간을 벌어줬으니 시간이 없다는 핑곗거리를 대기도 민망했다. 하루에 50쪽만 읽어 보기로 할까. 오늘은 무슨 책을 읽어 볼까.
아! 아니다. 그전에 오늘 새로 도착한 책부터 감상하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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