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비행일정을 포함한 12박 13일의 여행에서 돌아온 지 보름 남짓 흘렀다. 여독은 서서히 그리고 은근히 지속되어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곤하여 다소 힘들더니 이제 막 일상으로 회복되어 가고 있는데, 지금도 노르웨이에서도 북쪽에 위치한 로포텐(Lofoten) 제도의 선 굵은 지형 속에서마주친 북대서양의 강한 우박을 동반한 비바람이 얼굴과 손등을 따갑도록 때린 기억과 싯누런 황금빛 도는 들판, 눈 덮인 날카로운 산봉우리의 낯선 풍경은 여전히 나의 뇌리에 생생하기만 하다.
10여 년 전 다섯 가정이 수년간 가정을 열어 청년 대학생들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찬송을 누리며 성경을 읽기도 하며 이야기도 나누는모임을 가진 적이 있었다. 수년간 그런 실행이 이어졌었고 그때 이 청년대학생들에 대해 큰 부담을 갖고 봉사하던 젊은 S형제와 얼마 후 결혼하며 아내가 된 L자매가 있었는데 두 자녀를 낳고 난 후 얼마 있지 않아 노르웨이로 이민을 가게되었다. 당시 첫째 딸 Y는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칠 무렵이었고 세 살 어린 둘째 딸 J는 5살이었다. 지금은 노르웨이 학제로 고등학교 1학년과 중학교 1학년이 되었다니 세월이 쏜 살 같이 흐른 것이다.
노르웨이의 의무교육은 10년으로, 만 6세부터 시작하고 초등학교는 1학년부터 7학년까지 (Barneskole), 중학교는 8학년부터 10학년까지 (Ungdomsskole)로 구성된다고 한다. 고등학교부터는 의무교육은 아니지만 대다수 학생들이 진학하고 3년으로 구성되며, 고등 교육 기관은 대학(Universitet), 전문대학(Høgskole), 그리고 직업 대학(Fagskole)으로 나뉘는데 학부 과정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반적으로 3년이며 석사 과정은 2년, 박사 과정은 추가로 3년 이상이 소요된다고 한다. 직업대학은 6개월에서 2년 과정으로 학위는 부여하지 않고 실무에 일할 수 있는 자격증이나 인증서를 교부된다. 공공 대학교 대부분의 대학 교육은 무료이며, 2023년부터는 EU국가 이외 국가에 대해서는 달라졌는데, 노르웨이 국적자뿐만 아니라 유학생에게도 등록금을 받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니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기회가 열려 있는 셈이었다.
당시 S형제는 해상법을 공부하겠다고 낯선 땅이요 연고도 없는 노르웨이로 향했고 그 과정에서 간호사인 L자매는계획한 것은 아니었지만 비정규직으로 간호 관련 업무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S형제의 학생비자가 끝날 무렵 계속 노르웨이에 살 것인가 귀국할 것인가의 갈림길에서 그들은 노르웨이 이주로 마음을 정하였다. 노르웨이의 삶이 그들에게 좋게 여겨진 것이다. 그렇다고 영주권이 툭 떨어지는 것은 아니니 정규직으로 간호 관련 일을 위해 L자매는 홀로 노르웨이 북쪽에 위치한 도시 트롬쇠(Tromsø)에 찾아가 일할 기회를 찾았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네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니?'라는 반응만을 느꼈다. 동양인이 별로 없던 북유럽에서 그들의 눈에 그녀는 낯설기만 한 이방인이었을 뿐이었다. 그날 밤 트롬쇠에는 정규직을 찾지 못한 절박한 두 자녀를 둔 워킹 맘(mom) 위로 오로라가 밤하늘 가득 속절없이 드리웠다.
그런 사정도 모르는 채 우린 그저 잘 있으려니 했고, 간간히 SNS를 통해 간단한 소식만을 주고받던 중에 노르웨이의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감상하고 더불어 오랜만에 이들과 재회의 기회를 갖고 싶었다. 거의 일 년 전부터 조금씩 조금씩 이야기해 나가며 진전시켜 가다 6개월 전쯤에는 아예 날자를 못 박고 당시 가정을 열고 함께 하셨던 부부 김형제님과 양자매님과 함께 가기로 방문계획을 확정하였다.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그동안 이 가정에 쌓였을까? 타국에서 더구나 생소한 나라 노르웨이에서의 삶속에서 말이다.
노르웨이(Norway)라는 이름은 고대 노르드어로 "Norðrvegr"라는 단어로부터 유래되었는데 "Norðr"는 북쪽을 뜻하고, "vegr"는 길이나 경로를 의미하여 "북쪽으로 가는 길"이란 뜻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여름 몇 개월을 제외하곤 직항 편이 없어 중동이나 유럽의 도시를 거쳐 오슬로로 가야만 하였고 우리가 주로 머물기로 한 로포텐 제도에 있는 레이네 마을은 오슬로에서도 한번 비행기를 갈아타고 가야 하는 곳이어서 한국에서 부터치면 레이네 마을까지 총 네 편의 비행기를 타야 하는 여정이었다. 북유럽에서도 더 북쪽인 그곳에 가는 길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은 셈이었다. 이제 그 북쪽으로 향한 여정을 다시 기억을 더듬어 함께 하도록 해보자.
우린 오슬로에서 2박 후 로포텐제도의 레이네(Reine) 마을에서 7박 그리고 다시 오슬로로 돌아와 2박을 한 후 귀국하는 일정으로 계획하였다. 유명한 노르웨이 관광지가 많았지만 한국인으로서 노르웨이 공인 가이드 자격을 가진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인 S형제의 권면을 따른 것이었는데, 한 군데 머물며 그 주변을 돌아다니는 것이 좋고 힐링도 되며 한국에서 볼 수 없는 풍광을 맞게 되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느낌을 준다는 말에 우리는 모두 동의하였던 것이다.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돌아온 이 시점에서 그 형제의 말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제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직항 편이 없었던지라 여러 연결 옵션을 비교하다 대한항공으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키폴(schiphol) 공항을 거쳐 네덜란드 KLM-Royal Dutch 항공편으로 오슬로로 향하는 비행기 표를 예약하였고, 귀국은 그 반대의 경로로 하였다. 두항공사가 협약을 맺은지라 짐은 한 번에 오슬로로 가서 찾으면 되었고 우리는 암스테르담 스키폴공항에서 환승절차를 거치면 되었다. 그런데 암스테르담 도착시간이 18:55이고 오슬로행 비행 편 출발 시간이 20:50인지라 암스테르담 공항이 어떤지 모르는 우린 다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전 파리 경유 영국 버밍엄(Birmingham)에 갈 때의 어려움이 다시 상기되었는데, 당시 파리 시내는 한 번도 보지 못하고 프랑스 입국과 출국만 여러 차례 해서야 영국에 도착했는데 도착해 보니 짐도 오지 않아 우리 일행이 몹시 당황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항공기 승무원들에게 우리의 염려를 털어놓았지만 어떤 면에서 우리보다 환승 경험이 많지 않을 수 있던 승무원들은 속 시원한 답을 해주긴 힘들었고 암스테르담 도착 시 지상 승무원에게 문의해 보겠다는 답변만을 주었다. 아내와 나의 좌석은 대한항공 좌석배정처럼 수월하게 할 수 없었고 인천 출발 시 받은 갈아탈 네덜란드 항공편에 찍힌 좌석 배정은 우리 부부를 떨어 뜨려 놓았다. 갈아 탈 공항에서 해결할 일이 많았고 이 모든 것은 불확실성으로 우릴 다소 불안하게 하였다.
우려와는 달리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자 환승객을 위한 절차가 분명하였고, 한 번의 여권심사만으로 오슬로까지 가는 것은 무리가 없었다. 좌석도 친절한 현장의 지상 승무원이 우릴 나란히 앉게 해 주었는데 비상탈출구 바로 옆이었다. 그 덕분에 다른 좌석보다 1.3배 정도는 앞뒤간격이 길어 편하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다. 승무원의 비상시 행동 요령교육을 받고서 말이다. 우린 밤늦게 오슬로에 도착했고 S형제가 반가운 얼굴로 우릴 맞이하여 주었다. 낯선 타국의 처음 와 본 도시가 형제로 말미암아 푸근하게 느껴지게 되었다. 밤길에도 연달아 지나쳐 지나가는 몸통이 흰 자작나무가 가로수로 심겨 있는 것으로 보면서 북쪽으로 성큼 발걸음을 내디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자정을 넘어 밤늦게 도착한 호텔은 Voksenkollen이란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오슬로 시내와 오슬로 피요르드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이 수려한 호텔이었다. 성수기가 아니여서인지 하루 조식 포함에 1 실당 15만 원꼴로 묵을 수 있었는데 조식 뷔페도 보통 수준은 되어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좋은 환경에 머물 수 있었다. 단점이라면 엘리베이터가 없어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다는 것이랄까. 호텔 근처까지 전철이 지나가 시내에서도 접근성이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 우린 머무는 동안 승합차로만 다녀 타볼 기회는 없었다.
한밤 중 호텔의 모습, 이렇게 맑은 날은 이 계절에는 흔치 않다고 한다.
노르웨이에 도착 시 2박 떠날 때 2박을 한 이 호텔에서 네 번의 조식을 하였고 그중 반은 안개 끼고 비 오는 아침을 맞이하였고 반은 맑은 날을 맞이하였다.
어느 맑은 아침 날, 호텔에서 먹은 조식 뷔페의 한 장면
호텔 일층 식당의 베란다에 나와서 보면 멀리 오슬로 시내와 피오르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주변엔 자작나무와 가문비나무와 마가목이 자라고 있었는데 유난히도 빨간 열매를 풍성히 맺은 마가목이 많이 눈에 띄었다. 이 나무들은 오슬로뿐만 아니라 로포텐 제도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 큰 차이점이라면 로포텐 제도에서는 강풍과 척박한 토양으로 인해서 인지 자작자무들이 다 사람키만 하거나 더 작은 관목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다.
호텔에서 보이는 오슬로시가지와 피요르드 모습
오슬로의 4박 모두 한 호텔에서 묵었다. 자정 넘어 도착하였지만 우린 아침 일찍 눈이 떠져 7시 30분경 조식을 먹고 S형제와 오슬로 시내로 가 비겔란 조각 공원을 방문하였다. 호텔에서 시내로 내려가는 길에는 스키점프대가 있었는데 스키가 노르웨이 국가 스포츠인만큼 주요 도시마다 이런 스키 점프대가 있고 이런 시설을 세워주지 않으면 지역 주민들이 몹시 섭섭해한다고 한다. 길가 곳곳에 rulleski라고 부르는 롤러스키를 타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었고 그들만을 위한 도로도 따로 만들어 놓은 것도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 있어 길 가다 잠시 차를 세우고 길 옆쪽에 연하여 난 포장도로로 진입했는데 저 멀리서 현지인이 뭐라고 소리를 쳤다. 이 길을 걸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는데 롤러 스키를 타는 전용도로였다. 잠시 후 우리 옆을 질주하듯 한 사람이 롤러스키를 타고 쏜 살 같이 내려갔다. 우린 몹시 위협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스키활동에 노르웨이 사람들이 진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키 전용도로로 쏜 살 같이 롤러 스키를 타고 내려가는 한 사람
롤러 스키를 신고 언덕을 오르는 이런 모습을 드물지 않게 보았다.
점심식사 때에는 L자매가 함께하면서 Frognerseteren 식당에서 하였다. 오슬로의 한 농장과 관련된 한 지역 이름인 Frogner와 산장이란 뜻인 seter가 합쳐진 단어인데, 이 식당은 전통적인 레스토랑으로, 풍부한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 자리 잡고 있고 Holmenkollen 스키 점프장 근처에 위치해 있어, 오슬로 전경이 보여 오슬로에 사는 사람들도 한가로이 식사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거나 야경을 즐기곤 한다고 한다. 오슬로에 머물며 두세 번 들릴 기회가 있었는데 평일 점심에는 나이 드신 분들이 주로 많이 이용하셨다. 부부가 함께 오셔서 점심식사를 하는 다정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노르웨이 통나무집 건축 스타일을 반영한 전통 목조건축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지금까지도 그 건축 유산을 잘 유지하고 있다. 인기 메뉴는 Kanelbolle (시나몬 롤), Rømmegrøt이라는 전통적인 노르웨이 음식으로 사워크림과 밀가루버터로 만든 수프, 노르웨이식 사슴 고기 스테이크, 미트 볼 등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Rømmegrøt(사우어크림수프)와 미트볼, 오픈 샌드위치, 사슴고기 스테이크 등 몇 가지 메뉴를 시켜 함께 먹었다.
오후엔 시청에 갔다. 노벨 평화상이 수여되는 로비도 둘러보았는데 노벨상은 스웨덴에서 수여되지만 평화상만큼은 노벨의 유언에 따라 노르웨이에서 수여된다고 한다. 시청을 둘러본 후 현지 마트에 잠깐 들러 부족한 식재료 몇을 구입하고 S형제의 집으로 가서 S형제의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였다. 대구탕에 연어요리였는데 S형제는 요리하는 것이 취미인지라 이번 여행 내내 수석 셰프로서 다양한 음식을 제공해 주었다. 외국 여행 가면 항상 이삼일만 지나도 힘들어하던 나의 아내는 이번엔 그런 불편함이 조금도 없이 여정을 마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서 갈 때 여행가방 하나에는 먹을 것만 가득 가지고 갔고 S형제가 스웨덴에서 사 온 고기 여러 덩이와 현지의 마트에서 장만한 신선한 식재료 덕분도 있었지만 일등 공신은 S형제였다.
비겔란 조각 공원에는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생을 묘사한 조각들이 전시되 있다. 미운 세 살일까? 자신의 의지를 피력하기 시작하는 나이에 들어간 걸까?
알콩달콩 사랑하다 머리카락 끌어당기며 싸우는 것은 동서고금을 통한 공통 현상인 듯하네
Rømmegrøt(사우어크림수프)와 미트볼, 오픈 샌드위치 등 몇 가지 메뉴를 시켜 함께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