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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솜 Aug 29. 2022

채식이 준 선물

그게 체중감소라면 좋겠지만..

오래전에 다녀온 베트남 여행에서 내 입에 맞았던 음식은 딱 하나 모닝글로리였다. 리조트 조식 뷔페에 차려진 음식들은 메뉴가 무엇이건 하나 같이 낯선 향신료 냄새가 배어있었고, 가이드의 인솔 하에 갔던 식당에서는 이도 저도 아닌 한식의 맛이 났다. 그러다 모닝글로리를 만났다. 더 이상은 배가 고파 참을 수 없다며 폭풍 인터넷 서치 끝에 찾아갔던 고급 시푸드 레스토랑에서 대왕 새우의 비린 맛에 실망한 후 별 기대도 없이 추가 주문한 음식으로 말이다.


우리나라 음식으로 치면 고구마 줄기를 다시다에 살캉하게 볶은 것과 비슷한 맛이 났다. 여행 사흘째가 되도록 먹은 음식이라고는 파인애플 주스와 식빵, 그리고 연유가 들은 베트남 커피가 거의 전부이다가 드디어 소금기가 있는 음식을 먹는 기분이란! 역시 익숙하지 않은 메뉴의 선택에서 실패하지 않을 확률은 아무래도 육류보다는 채소인 것일까(한 작가님의 글에서 처럼 온갖 것이 다 들은 서랍 맛이 난다는 '고수'는 열외로 하겠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야 모닝글로리가 우리나라에서는 공심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채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끔 그 맛이 생각날 때면 호기롭게 한 팩을 사다 볶아도 보고 밀 키트로 나온 것으로 간편하게 만들어 보기도 하였는데 3일을 내리 굶지 않아서 그랬는지 베트남에서 먹었던 그 맛은 나지 않았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정말로 고구마 줄기를 다시다에 볶아 먹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좋아! 고구마 줄기를 사자!'


이후로 가끔 대형마트의 나물 코너에 진열된 고구마 줄기를 사다 볶았다. 맛은 훨씬 좋았지만 먹을 사람이 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며칠 후 남은 것은 음식물 쓰레기통 행이 되었다. 퇴근이 늦는 남편은 집에서 밥을 먹을 일이 많지 않았고, 아이는 그때만 해도 채소를 전혀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버려지는 음식이 아까워 점점 채소 반찬 가짓수를 줄이다 보니 모닝글로리의 맛은 잊혔고, 쉽게 구워 먹을 수 있는 고기 하나로 위장을 채우는 날이 늘어갔다. 냉장고에 있는 삼겹살 한 근이면 다른 반찬 없이 저녁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워킹맘인 나의 가사 부담을 줄이는 길이기도 했고 음식물 쓰레기를 줄여 환경을 보호한다는 의미도 되었다. 내 몸에 쌓이는 체지방은 물론이고 고기를 굽는 연기로 탁해지는 공기, 축산업이 환경오염에 미치는 영향, 좁고 더러운 공간에서 항생제 주사로 키워지다 도축되는 동물의 눈물은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아이와 나는 대체로 비건. 다시다는 먹지만 삼겹살은 더 이상 구워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 아닌가. 그렇게 버섯 말고 애호박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고 온라인 마트의 채소 카테고리를 살펴보다 고구마 줄기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마음속으로 유레카를 외치며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 완료. 이제 아이도 새로운 채소를 곧잘 먹게 되었으니 잔뜩 남겨져 버릴 일은 없을 것이었다.


'내가.. 내가.. 뭘 시킨 거지!'


현관 앞에 도착한 장바구니를 들여와 냉장고에 식품을 옮겨 넣다가 당황하고 말았다. 기대했던 '스티로폼 접시에 숨이 죽은 채 담겨 랩으로 싸인' 그 고구마 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길쭉한 비닐봉지 속에 들은 고구마 껍질 색의 단단한 생(生) 채소. 이런 고구마 줄기는 중학교 때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엄마가 소쿠리를 마당에 내려놓으며 나를 부르면 털썩하고 주저앉아 손톱으로 껍질을 까던 그 고구마 줄기. 돌돌 말리며 벗겨진 껍질이 늘어날수록 손톱 밑이 꺼메지던 그 고구마 줄기. 우리 엄마가 '고구마 줄거리'라고 부르던 바로 그 고구마 줄기였던 것이다.


 <두 번째 지구는 없다>에서 타일러 라쉬가 그랬다. 닭도  잡는 녀석들이 닭고기를 먹는  말이 되냐는 선생님을 보고 자랐다고.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당장 고구마 줄기를 데치는 방법부터 검색해야  판이기는 해도 귀찮은 일거리가 생겼다고,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덜컥 주문부터 했다고 후회할 일은 아니었다.


고구마 줄기 손질도 귀찮아서 못 하면서 채식주의자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도 좀 그렇지 않아?, 아이를 불러내 신문지 앞에 앉혔다. 그러네요, 하고 아이는 군말 없이 고구마 색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고구마 줄기 볶음은 망했다. 데쳐진 것만 사다가 처음으로 생 채소를 샀더니 어느 과정에서 잘못되었는지 쓴 맛이 났다. 짧은 손톱을 바짝 세우고 열심히 껍질을 벗긴 것이 아까워 아이도 나도 맛을 타박하지 않고 열심히 먹긴 했지만 3일이 지나도록 반도 줄지 않아 남은 건 모조리 버려야 했다.


채식을 하지 않았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엄마보다 더 빨리, 많이 껍질을 벗기고 싶어서 엄마의 속도를 곁눈질을 하던 내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나, 생전 처음 채소를 다듬는 일을 하게 된 아이의 경험 말이다.


채식이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을 줄 줄은 몰랐다. 기대했던 체중 혹은 체지방의 감소는 아니었지만, 기분이 꽤 괜찮다.








*

서랍의 맛. 내가 느낀 고수의 맛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랬다. 양초, 비누, 샴푸, 구두약, 지우개, 수세미... 평생 입에 넣어 본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 없을 것 같은 온갖 잡동사니의 맛이 느껴졌다. 냉장고 대신 서랍에서 꺼낸 재료들로 만든 요리를 먹는 기분이었다. (이것이 나의 다정입니다 p.154 / 하현 / 빌리버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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