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자라는 시간
최근 몇 달 간 정신도 못 차릴 정도로 괴로운 일이 많았다. 내 개인적인 일과 가족에게 닥친 안타까운 상황들, 주변에서 나와 비슷하거나 더 심한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생일을 며칠 앞두고, 친구들에게 잠시 안부인사를 전하자 각자 그간 힘들어 말 조차 꺼내지 못했던 사정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 때 나는 말 없이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 힘듦과 별개로, 너무 나 혼자만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처럼 한 달을 살았으니까.
게다가 벌써 몇 주 전만 해도, 멀쩡히 살아 계셨던 자상 하고도 늘 카리스마를 잃지 않으셨던 작은 고모께서 소천하셨던 일로 온가족이 충격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 일로 어쩌면 내가 처한 상황이 우리 가족에게도 안좋은 영향을 끼쳐서 이런 화를 입는건가 하는 생각도 했다. 자책과 수없이 드는 괴로운 생각 속에서 한 달을 넘게 웅크리고 지내왔다. 그리고 우리 작은 고모는 누가 어떻게 해 볼 새도 없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집 안에서 혼자 보내다 그렇게 하늘로 가버리셨다고 한다. 지병으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상황에서 얼마나 혼자 괴롭고 힘드셨을까 하는 그런 생각들, 또 칠순을 며칠 앞두고 있어 가족끼리 모이려고도 했었는데.
물론 지금은 코로나 거리두기 2.5단계로 아주 작은 가족 구성단위도 모이는 것이 금지됐지만 이런 저런 아쉬움이 남았다. 최근에 찍었던 사진 조차 없이, 먼 옛날에 찍은 것과 같은 흐릿하고 아련한 영정 사진만이 우리를 반기고 계셨다. 물론 그 작은 몸을 이끌고 아주 짧고 잠긴 목소리로 “왔냐?”고 이야기 해주셨으면 좋으련만, 욕심이고 만용이었다. 그렇게 눈물 흘릴 새도 없이 고모님을 보내드려야만 했다.
숨 돌릴 새도 없이 상황은 더 나빠지기만 했다. 그런데 당장 도움을 줄 사람도, 사정상 내가 처한 상황을 다 말 할 수도 없었기에 사는 것 조차 너무 버겁고 힘들어 집에서 숨쉬는 게 괴롭다는 이유로 동생이 어떻게 마련한 타지에 임시거처 방 한 칸을 내줘서 거의 죽은듯이 살고 있었다. 또 나를 도와주기로 한 에이전시에서 조금이나마 보금자리에 보탬을 대주신 덕에 감사하게도 겨우 발을 붙였다.
여러 일로 나를 오해하고 있거나 기존에 불만이 많이 쌓여있었다가, 단단히 돌아선 사람들에게 굳이 내 상황이나 치부를 드러내면서까지 이해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이렇게 힘들어서 도와달라고 했던 것, 그리고 없던 살림에 내 힘으로 벌어서 가족 생활비와 여러 치료비로 모두 나가고 지병 치료와 개인적인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내 창작활동을 지속하려고 그동안에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수익과 나라에서 받은 지원금을 쪼개 투자한 비용까지 검열을 당하고 있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이야기들로 오해할만한 여지를 많이 주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몸도 마음도 많이 상해서 이젠 아무도 나를 감시하거나 찾지 않는 좁은 방 한칸을 걸어 나오는 것도 쉽지가 않다. 근육이나 골격에 이상이 생긴 것도 아닌데 걷기조차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여기까지 보면 나 이렇게 그동안 힘들었어요, 라고 징징대는 이야기가 아니라 속죄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될 방법을 고민하다가 아무것도 넘어가지 않아서 몸이 쇠약해졌다 쯤으로 받아들여주셨으면 좋겠다.
또 몇 달 전부터 더 악화된 지병으로 만남을 약속했었던 에디터님과 관계자님 분들도 어렵게(그나마 몸상태가 좋을 때) 부모님과 동행하여 자리를 가졌었다. 그래도 사람을 만나는 운은 좋았던 것인지 에디터님은 내 이야기를 십분 경청하시고 앞으로 좋은 일만 생각 하자며 빠르면 올해 말과 내년에 어떤 이야기를 펴나갈지 고민해보자고 나를 다독여주셨다.
지금까지도 아주 오랜 시간동안 내 최악과 최상을 보고도 나를 옆에 두고 견뎌주시는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와 죄송하다는 말씀을 깊이 전하고 싶다. 아무런 이야기조차 하지 못한 채 웅크리고 있다가, 이제 겨우 하늘과 허공을 쳐다볼 수 있게 되자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알게 됐다. 게다가 몇 주 전만 해도 부주의로 핸드폰이 파손되는 바람에 날짜감각조차 거의 상실해있었기 때문이다. 겨우 약기운에서 빠져나와 정신 차리고 컴퓨터를 켰을 때에나 어렴풋이 날짜를 가벼이 체크하는 정도였다.
또 이 글이 브런치에 올라갈 즈음에는 첫눈이 내리고,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내 생일이 코 앞일 것이다. 그동안 하늘 색과 구름이 어땠는지도 전혀 몰랐고 겨우 생필품을 구하러 밖에 나갔을 때에도 땅바닥만 보고 다녔었다. 그렇게 한달 여를 지냈었다. 또 최근에 동생의 생일을 같이 보내고 난 지 1주 뒤에 오랜만에 동생 집에서 새벽에 첫 눈을 보며 아주 소박한(?) 소원을 빌었다.
미신을 크게 믿는 편은 아니지만, 이럴 때라도 기대고 싶은 대상이 있으면 맹목적으로라도 매달리게 되니까.
정말 영겁 같이 안 흘러갈 것 같았던 시간도 어떻게든 흘러간다. 모두가 힘들고 괴로웠던 2020년도 거의 저물어가고 있다. 아직도 무섭고 많이 힘들지만, 한 달 전만 해도 거울 조차 보기 싫었다가 최근에 문득 거울을 보니 머리카락이 많이 자라고 눈이 푹 패인 것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그런 변화를 겪고 있었다.
나를 돌볼 시간도 없이, 괴롭게 견디고 속죄하는 동안 그래도 어두운 새벽이 가고 아침이 밝았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물론 아직 내가 느끼기엔 지금도 동트기 전인 새벽인 것 같지만, 언젠가는 동이 터서 시야가 밝고 따스해지길 바라고 있다.
보통 시간은 “흘러간다”라고 이야기 하지만, 나는 멈춘 줄로만 알았던 시간이 “자랐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간 여러 사정과 주변의 시선으로 못 해 본 것들, 자기 계발들에 좀 더 신경쓰고 창작활동에도 더 불을 붙이려고 한다. 결국 먼지투성이인 사람이 됐지만, 앞으로 좀 더 나아지고 더 탁월한 사람이 되기를 노력해야겠지.
한동안 뜸했던 브런치에 뭐라도 자취는 남겨야 할 것 같아서, 외전 격으로 근황을 적어봤다. 다시 모든 것들을 정상 궤도로 돌려 놓으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아주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사 하고 부탁드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부디 남은 12월은 조금이라도 따뜻하고 안온하길. 아무도 어떤 자그마한 상처 받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