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슴푸레 Mar 21. 2024

요구르트야, 막걸리야

  아홉 살. 깜깜한 부엌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시큼하면서도 단 냄새는 요구르트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먹고 나서야 으윽 이게 뭐야 했다. 혀끝에서 시작된 어지럼증이 밭끝까지 퍼졌다.  


  공동 마당과 포도나무가 있던 집에서 2년이 채 안 돼 양복점이 있는 골목, 중간쯤에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갔다. 내년엔 따 먹을 수 있겠지 연둣빛 작은 포도알을 보며 기대했지만 그 꿈은 이뤄지지 않았다. 예전 집이 있는 골목에서 숨바꼭질을 할 때마다 포도나무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아홉 살 초봄에 집을 샀다. 안방에 있는 붙박이장을 떼서 버리고 뻥 뚫린 곳에 공구리를 쳐서 바닥과 벽을 메꿨다. 아쉬웠지만 그만큼의 공간이 생겨 방이 넓어지는 게 신기했다. 다섯 식구는 주로 그 방에서 생활했다. 밥을 먹었고, 티브이를 봤고, 숙제를 했다.


  유월쯤 아버지는 안채가 있는 마당 오른쪽과 왼쪽 양쪽에 콘크리트로 계단을 만들고 2층에 이어 3층까지 건물을 올렸다. 인부를 샀고 두어 달, 그들과 함께 성실히 집을 지었다. 장마가 끝나고 여름이 물러갈 즈음 안채를 중앙에 두고 스무 개 남짓의 사글셋방이 디귿 자가 아래를 향하는 모양으로 빙 둘러 성처럼 지어졌다. 칸칸이 달린 문 위쪽엔 물결무늬의 투명 유리가 끼워졌고 문짝에 고동색 페인트가 칠해졌다. 문을 열면 왼쪽에 연탄 아궁이가, 오른쪽에 무릎 높이의 수도가 설치돼 있는 성냥갑 같은 방이었다.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위에서 왼쪽 아래로 구부려 지퍼를 여는 키 작은 비키니 옷장을 썼다. 밥솥, 티브이, 라디오, 요, 이불, 베개, 상 정도의 단출한 세간이 전부인 사람들. 삼성전자나 근처 공장을 다니는 언니와 아저씨들로 대개 한 방에 두 명씩 살았다. 2층 중간에 놓인 가파른 남색 철제 계단을 오르면 그들의 빨래가 3층 옥상에서 만국기처럼 펄럭였다. 이따금씩 바람에 쓰러지는 바지랑대에서 퉁 소리가 났다. 빈 요구르트병에 퐁퐁을 따르고 물을 타서 빨대로 옥상에서 후 불면 비눗방울이 생겼다. 하늘로 날아오르다 안채가 있는 마당 쪽으로 방울이 떨어졌다. 비눗방울을 불며 지루함을 견뎠다. 그러다 비눗물을 옥상 바닥에 쏟았다. 뜨거운 열기에 금방 바닥이 말랐다. 비슷한 옥상을 한 집들이 골목마다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아버지가 인부들과 지게에 벽돌과 타일과 모래와 시멘트 포대를 지고 계단을 오르는 동안 마당엔 막걸리병이 산처럼 쌓였다. 담배를 태우고. 신김치에 막걸리를 먹고. 담뱃불을 끄고. 다시 일을 하는 그들은 항상 땀에 절어 있었다. 상아색, 주황색 수건을 저마다 목에 건 런닝셔츠 바람이었다. 집 냉장고엔 냉동 삼겹살과 막걸리가 가득했다. 인부들을 위한 참이었다. 밤. 컴컴한 부엌에서 막걸리를 마신 것도 때문이었다. 인부들이 먹다 남긴 막걸리를 요구르트인 알고 벌컥벌컥 마셨다. 의도치 않은 첫 음주였다.


  아버지는 집을 짓고 부자가 되었다. 다달이 월세를 내러 언니, 아저씨들이 안채, 양복점, 양품점에 찾아왔다. 대문 바깥에 달린 우편함에는 아버지 앞으로 온 편지보다 모르는 이름 앞으로 온 편지들이 더 많았다. 세를 들겠다고 아버지에게 돈을 치르는 사람들은 늘 주소를 물어 종이에 적었다. 편지가 속속 도착할 때마다 우리 집이 그들의 안부가 닿는 매우 중요한 곳이라는 생각에 저 혼자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3층을 올리고 1년이 채 되지 않아 가구를 모두 바꿨다. 싱크대와 진열장과 침대와 자개농과 화장대와 문갑과 책상과 의자와 소파를 실은 트럭에서 인부들이 나왔고 짝을 지어 조심조심 안채로 옮겼다. 활짝 열린 대문에 털빛이 검은 똘똘이가 컹컹 짖었고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구경을 했다.


한 줄 요약: 막걸리 냄새를 맡으면 땀을 흘리며 집을 짓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막걸리#요구르트#첫음주#아홉살#부자되는냄새#유년#그리움#아버지#1980년대#수원#삼성전자

매거진의 이전글 국수 먹으러 동부교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