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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슴푸레 Mar 16. 2024

국수 먹으러 동부교회

  말통골로 올라가는 구릉엔  키가 크고 가는 소나무가 빽빽이 서 있었다. 그 길을 왼쪽에 끼고 오르면 동부교회가 나왔다. 큰 규모는 아니었다. 낮은 교회당이 가로로 길게, 종과 스피커를 매단 첨탑이 세로로 뾰족 서 있었다. 양복점엔 국민학교를 들어가기 전부터 전도사님들이 찾아왔다. 자연스레 집안 사정, 가족 관계, 자산의 정도가 공유되는 사이가 되었다. 금요일 오전 11시가 되면 목사님, 권사님, 전도사님, 신도 몇몇이 안채로 가정 예배를 보러 왔다. 과자를 잘 사 주지 않는 엄마였지만 그날은 비싼 맛동산과 델몬트 주스를 다과상에 내왔다. <내게 강 같은 평화> 찬송을 들으며 나는 요구르트색 표지의 에디슨 위인전을 읽었다.


  일요일 아침, 티브이에서 방영되는 명작동화를 한창 재밌게 보고 있으면 교회 가자는 강수지 전도사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갈 도리가 없었다. 결말을 한 번도 알지 못한 채 전도사님 손을 잡고 교회에 갔다. 말수가 적었지만 전도사님 앞에선 쉴 새 없이 떠들었다. 다정한 눈빛에 마음이 풀어졌다. 오전 10시 전체 예배가 끝나면 11시 반부터 교회 지하 식당에서 멸치국수를 먹을 수 있었다. 면과 국물, 쫑쫑 썬 김치가 전부인 국수 한 그릇이었지만 맛은 최고였다. 국수 먹으러 교회에 갈 정도였다. 남자애들 중엔 그 길고 긴 줄을 다시 서서 두 그릇을 먹는 도 있었다. 인심은 넉넉했고 사람들은 환히 었다.


  오전 예배가 끝날 무렵이면 찬송을 네다섯 곡쯤 불렀다. 그러는 동안 자주색 벨벳을 씌운 원통의 헌금함이 맨 앞줄부터 시작해서 오른쪽으로. 오른쪽 끝에서 뒤로. 다시 왼쪽으로 리을 자를 좌우로 그리며 손에서 손으로 넘겨졌다. 그랑. 아이들은 대부분 100원짜리 동전을 넣고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지만 나에겐 헌금이 없는 날이 많았다. 다른 아이들처럼 동전을 넣듯 왼손을 오른손 손목에 받치고 오른손에서 동전을 헌금함에 떨어뜨리는 시늉을 했다. 심장은 방망이질 쳤고 얼굴은 달아올랐다. 오전 예배가 끝나고 교회 놀이터에서 호박 마차 모양을 한 뺑뺑이를 타고 얼음땡을 하고 어린이 예배에 갔다.  강 전도사님은 오전 예배와 관련되는 성경을 이야기로 재밌게 들려주었다. 흰 전지를 넘길 때마다 말씀과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 지도, 찬송가가 짠! 하고 나왔다.


  어린이 예배가 끝나면 오전에 얼마를 성금으로 냈는지 적는 종이를 돌렸다. 내지도 않고 몇 번 100원을 썼다. 아이들이 신발을 신고 하나둘 어린이부를 나갈 때 강수지 전도사님이 나를 불렀다. 헌금 안 내도 괜찮아. 교회는 주님 말씀 들으러 오는 곳이지 돈 내러 오는 곳이 아니야. 주님은 거짓말하는 걸 싫어하셔. 무슨 말인지 알겠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당황스럽고 부끄러워 눈물이 흘렀다. 속인 걸 들켰다는 낭패감보다 이제 날 안 좋아해 주시면 어쩌지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전도사님은 변함없이 나를 대했다. 따님은 참 착해요. 엄마에게 금요일 가정 예배 때마다 내 머리칼을 쓸며 말했다.


  한 2년, 열심히 교회를 다녔다. 나중엔 전도사님이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아도 윤경이랑 같이 교회에 갔다. 오후 예배가 끝나면 달마다 마지막 주일에 생일잔치를 해 주었다. 둘러앉아 있으면 신문지가 안쪽으로 길고 둥그렇게 깔리고 짱구, 새우깡, 양파링, 고구마깡이 주르르 뿌려졌다. 생일자의 이름이 한 명씩 호명되면 앞으로 나와 인사를 하고 박수를 받았다. 생일자에게만 투명 비닐의 초코파이를 나누어 주었고 동생 준다고 안 먹으면 맘이 예쁘다고 하나를 더 챙겨 주었다.


  여름성경학교를 일주일 넘게 빠지지 않고 다니면 수첩에 개근 도장이 찍히고 달란트를 받았다. 시장놀이가 열릴 때 쓰기엔 한참 모자랐지만 딱지보다 빳빳하고 알록달록한 달란트를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는 느낌이 좋았다.


  교회가 증축된 후에는 잘 가지 않았다. 나무로 된 긴 예배 의자에 앉아 있으면 잠이 왔고 남을 속이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에 제 발이 저렸다. 새벽 내 엄마 아버지가 평화시장에서 발품 팔아 떼온 양품점 물건에 일러 주는 대로 두 배의 가격표를 붙일 때마다 양심이 찔렸다. 장사란 그런 것이고 이문을 남겨야 먹고산다는 것을 알기엔 너무 어렸다.


  강수지 전도사님에게도 민응기 담임 목사님에게도 그래서 교회 가기 싫단 말을 끝내 하지 못했다.


  나의 첫 신앙생활은 그렇게 끝이 났다.


  한 줄 요약: 십계명은 어린아이가 세상을 바라보기에 혼란스럽고 어려웠다.


#동부교회#전도사님#말씀#거짓말#십계명#유년#가난#그리움#1980년대#수원#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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