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여름. 우리 집에도 차가 생겼다. 은색 엘란트라였다. 움푹 팬 손잡이에 네 손가락이 잘못 걸리면 문이 열리지 않았다. 한 번에 탁 문을 여는 요령을 터득하지 못해 뒷문을 열 때마다 애를 먹었다. 문을 열면 짙은 회색 바탕에 옅은 회색의 사선 줄무늬 스웨이드 시트가 보였다. 차의 외관은 전체적으로 둥그렜다. 차의 후방엔 양쪽으로 니은 자형 빨간 후미등이, 그 아래엔 반투명 헤드램프가 밑돌처럼 있었다.
88 올림픽 이후 세상은 몰라보게 발전했다. 삶의 양식이 세련돼졌고 마이카 시대가 왔다. 너도나도 자가용을 샀고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 3 수험생인 오빠의 쾌적하고 편안한 등하교를 위해 아버지는 기꺼이 거금을 썼다. 매탄동에서 이목동. 동수원에서 북수원은 66번 버스로 1시간 40분이 넘게 걸렸다. 야간자율학습이 끝난 시간엔 버스가 다니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두 번 고민하지 않는. 자식이 고생하는 것을 그 무엇보다 싫어하고 희생적이며 가정에 끔찍한 사람. 고 3 아들은 동원고. 중 2 딸은 영복여중. 수원을 다 찍고 등교하는 둘을 위해 아버지는 전날 가게 물건 떼러 따따불 택시를 타고 동대문 평화시장을 다녀왔을지언정 하루도 거르는 법이 없었다. 오빠를 교문 앞에 내려 주고, 동신아파트를 지나 좌측에 작은 공터가 보이면 아버지는 그제야 차를 세워 담배를 한 대 태웠다. 피곤하고 지친 아버지의 등과 허공으로 흩어지는 하얀 담배 연기를 뒷좌석에서 바라보았다. 그러다 아버지가 담배꽁초를 땅에 던져 구둣발로 불을 끄면 영어 단어장을 펴고 외우는 척을 했다.
노송지대를 지나 골목으로 접어들면 가고 오는 차 딱 두 대만 지날 만큼 도로 폭이 좁고 아슬아슬했다. 아버지는 늘 창문을 열고 맞은편에서 오는 차와 닿지 않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비 오는 날엔 우산을 쓰고 등교하는 교복 무리와 차가 엉켜 빵빵 빵빵빵빵 사방에서 경적이 울렸다. 공복에 수면 부족. 아버지의 부지런한 아침은 오빠가 수능을 볼 때까지 이어졌다.
엘란트라가 전자 앞 골목에 배달되자 아버지는 미리 준비한 북어와 막걸리를 차 보닛 위에 올리고 동네 아저씨들과 약식 고사를 지냈다. 잔에 술을 따르고 절을 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나와 구경을 했고 일신라사, 차도 사고 성공했다고 축하 인사를 했다. 뿌듯하고도 당당한 표정의 아버지는 함께 절한 아저씨들과 일일이 악수를 했다.
엘란트라가 출고되기 전까지 아버지는 몇 개월 동안 해남이 오빠와 주말마다 운전 연습을 했다. 해남이 오빠의 차는 매우 낡았지만 아버지는 경사지고 굽이진 봉담, 어촌의 국도를 별 어려움 없이 능숙하게 운전했다. 주차 연습을 할 때 해남이 오빠는 차 뒤에서 이빠이 꺾어서! 다시 풀어서 쪽. 오라이 오라이 오라이를 천천히 하다 오라 오라 오라 3배 속으로 했다. 특유의 억양을 나는 죽었다 깨도 따라할 수 없었다.
오빠가 교대에 가고 나는 중 3이 됐다. 연합고사를 보는 수험생이 되었지만 아버지는 이른 아침 더 이상 운전을 하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다니다가 어느 날부턴가 윤기네 차를 얻어 탔다. 민정이 언니가 창현고 앞에서 내리면 20분쯤 지나 윤기와 내가 영복여중 앞에서 내렸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윤기 아버지께 신세를 졌다.
정확히 엘란트라를 언제까지 탔는지 기억이 안 난다. 르노삼성에서 SM5가 출시된 1998년 그해였는지 더 이후였는지 가물가물하다. 은색 엘란트라가 명실상부 첫 자가용이었음에도 그 차로 다섯 식구 모두 가족여행 한 번 못 가고 폐차했다. 그만큼 두 분은 돈 버는 데 바빴고 1994년 이후 경기는 날로 나빠졌다. 오빠가 대학에 합격하고 다섯 식구 딱 한 번 엘란트라를 타고 선산이 있는 나주 큰집에 갔었다. 한겨울.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눈 쌓인 산소에 술을 올리고 절을 했다. 한국아파트에서 나주 동강면 월송리까지 299km. 그 장거리를 왕복으로 운전할 때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 줄 요약: 엘란트라는 자식 사랑을 향한 아버지의 첫 애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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