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이 점점 뚜렷이 보인다면 환영할 일이야. 이제야 자기 모습을 제대로 본다는 거니까. 이젠 받아들여. 네가 너의 구멍을, 네가 너를. 지금 너의 문제는 구멍이 났다는 게 아니라 구멍이 나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걸 믿지 못하는 거야.
그런데 말이야. 신은 그렇게까지 대책 없는 구조로 인간을 설계하지 않았거든. 인간의 영혼은 벽돌담이 아니라 그물 같은 거야. 빈틈없이 쌓아올려서 구멍이 생기면 와르르 무너지는 게 아니라 그들처럼 구멍이 나서 '무엇'이 새로 들어올 수 있게 하는 거야. 바로 그 '무엇'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가. 그렇게 조금씩 영혼이 자라는 거지.
사람의 영혼은 자랄수록 단단해져. 구멍이 난 채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어. 오히려 그 덕에 더 잘 살 수 있어. 정말이야. 믿어도 좋아.
<유선경(2023), 구멍 난 채로도 잘 살 수 있다, 사랑의 도구들, 콘택트, 101p>
<나의 문장>
구멍이라는 말이 싫었다. 제 몫을 다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누군가 "걔, 구멍이야." 하면 '걔'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누군가에게서 "너무 구멍이 많아."라는 말을 들으면 낯이 부끄러워 쥐구멍부터 찾았다. 그러나 그때마다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도망칠 구멍도 없었다. 구멍을 통해 드러나는 본질은 절대로 숨겨지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양말에 구멍이 뻥 뚫려 엄지발가락이 훤히 보이는 것과 같았다.
밑천 떨어지기 전에 떠나야 한다는 주의였다. 형편없음을 들키는 것이 부끄러워 참을 수 없었다. 나의 너무 많은 구멍들에 기진맥진하여 당신이 영영 위로 올라오지 못할까 봐 구멍을 숨기고 나도 숨었다.
구멍을 들여다보려면 용기가 필요했다. 직면할 용기. 인정할 용기. 받아들일 용기. 끝까지 내려가 볼 용기.
찢어지고 뚫리고 파내어진 자리는 놀랍게도 메워진다. 구멍은 꿰매어지고 막히고 채워지고 다져진다. 구멍을 피하고 싶은 마음과 막고 싶은 마음은 공존한다. 그러면서 살 구멍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