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교장 선생님, 금요일 5교시에 뵙겠습니다. 그런데 면담 전에 교사 지르셔의 속마음이 담긴 글을 좀 보내드려도 될까요? 시간이 되시면 한번 읽어봐 주세요. 미리 감사드립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내일 5교시에 보자고 메세지 보내셨어요. 제가 처음인 거죠. 걱정이네요. 저 월급 받으러 학교 다닌다고 정말 솔직하게 말씀드릴 건데 교장 선생님 적잖이 놀라시겠네요. 하는 수 없지, 가서 팩트만 전하고 올게요. 아마 저 만나고 나면 현실 자각타임를 맛보실 테니 선생님들은 좀 수월하실 듯. 오케이 오케이, 제가 가서 생계형 교사의 민낯을 보이고 올게요. 사실 방금 전에 교장 선생님 메세지 받고, 예방 주사 놓아드린다는 마음으로 제가 쓴 글 두 편을 보내드렸어요. 저 이런 사람입니다 하고 미리 말씀드린 거죠. 놀라지 마시라고요. 제목이 ‘교정의 먼지가 되고 싶습니다’랑 ‘나는 참교사가 싫어요’예요.
"저 방금 뵙고 왔어요. 1시간 내내 앉아 있었네요. 아니에요, 편하게 대화하고 왔어요. 전혀 안 불편했어요. 그런데 교장실에 내려갔더니 글쎄 교감 선생님도 계시고 수석님도 계시지 뭐예요. 완전 깜짝 놀라서 '헐, 이렇게 많은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나요?'라고 말씀 드렸더니, 다행히 교감 선생님이랑 수석님께서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일어나셨어요. 회의 중이셨나봐요.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네요."
"어떻게 지내느냐, 고생이 많다 이런 말씀 하셨고. 올해 저에게 가장 의미 있는 일이 뭐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래서‘강제로 변화가 생긴 거다’ 코로나가 아니었으면 동영상 수업 제작이나 쌍방향 원격 수업을 해보았겠느냐, 나는 변화를 싫어하고 익숙한 걸 좋아한다. 그런 나에게 이런 변화가 생긴 것이 의미 있다고 말씀드렸어요. "
"내년에는 어떤 업무를 하고 싶으냐, 휴직 계획은 있느냐 이런 것도 물으셨어요. 그리고 내후년쯤엔 부장도 생각해 볼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정도 연차가 되면 부장을 하는 게 후배 교사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은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고, 깜냥이 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부장을 하려면 우리 학교처럼 따뜻하고 편안한 곳에서 해야 한다고, 함께 꿈을 꾸며 학교 문화를 만들고, 그 과정에서 성장할 수 있으니 부장 자리가 의미 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아이고 들어보니 더더욱 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렸죠. 저는 먼지 같은 존재를 지향하기 때문에 미룰 수 있는 만큼 미루고 싶다고요."
"참, 마지막에 나올 때 선생님들을 위해 슬쩍 여쭤봤거든요. 아니 이렇게 한명 한명 이야기 나누려면 교장 선생님께서 너무 힘드실 것 같다. 부서 선생님들을 한 번에 부르시면 어떠냐 교장 선생님 에너지 소모가 너무 크실 텐데요 하고 말씀드렸거든요. 그런데 그것도 좋지만 따로 만나는 것도 참 좋다고 괜찮으시대요. 아이고 어쩔 수 없네요. 선생님들도 차례로 다녀오셔야 합니다. 걱정 말아요, 정말 편하게 담소만 나누고 오시면 돼요."
동교무실 선생님들은 내 이야기에 손뼉을 치며 웃었다. 어쩜 그렇게 솔직하냐고, 글을 먼저 보낸 것도 놀랍고, 할 말 다하고 오는 거 웃겨 죽겠다고. 아, 이거요. 마흔 넘으면 이렇게 됩니다. 세상에 심드렁해져요.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바빠서 남들의 시선과 평가까지 신경 못 써요. 욕심이 없으니 꾸밀 필요가 없고요, 가진 게 없으니 잃을 게 없고요, 잃을 게 없으니 두렵지 않고요, 혹시나 누군가 날 안 좋게 본다 한들 어쩔 수 없고요,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됩니다.
덧붙임.
교장 선생님께서는 내가 수업 준비를 너무 열심히 해서 건강이 염려됐다고. 정말 애쓴 걸 알고 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만나보고 싶었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나, 내 주제에 이런 이야기를 듣다니 낯설다 낯설어. 존재감 1도 없는 내가 코로나 덕분에 뜻밖의 평가를 들어보는구나.’
“의도하거나 계획하지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사실 내 평생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본 적이 없었다. 잠도 못 자고 수업 준비를 하면서 게으른 나에게 이런 면이 있구나 놀랐다. 영상을 만들고 나서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몇 번이고 수정하는 내 모습이 스스로도 낯설었다. 나에게 이런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었나 싶어서 의아했다. 나도 모르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고,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했다’라는 생각을 살면서 처음 해봤다. 비록 강제적인 변화였지만 개인적으로 특별한 경험이었다.
2학기가 되고 쌍방향 수업을 하면서 동영상을 만들지 않아도 되어서 몸은 편해졌지만, 일종의 패배감 같은 것이 든다. 실시간 수업이라고 하나 학생들과 다른 공간에 있다는 것이 생각보다 제약이 많다. 수업을 듣는 척하지만 듣지 않는 학생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자유롭고 개인적인 공간에서 핸드폰, 게임, 유튜브 등 자극적인 것들에 노출된 아이들이 수업에 집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이들도 저마다 힘든 점이 있고 개인적 사정이 있을 테니 딴짓하지 말고 들으라고 채근할 수도 없다. 어떤 아이들은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것만도 최선일 수 있다. 엄청난 흡입력으로 아이들을 집중하게 할 수 있다면 모를까나로서는 그게 어렵고, 쌍방향 수업은 한계가 있다. 교실에서 아이들과 상호작용하는 수업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학교의 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와 학생들을 아껴주는 문화에 함께 공감했다. 지금의 학교를 만들어오신 선생님들은 모두 떠났지만, 그분들이 이곳에 그들의 자녀를 남겨두고 떠났다고, 내 아이를 보내고 싶은 학교라면 된 거 아니겠냐고, 그렇게 만든 학교라고. 덕분에 학생들이 행복할 수 있다고, 참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라고. 교장 선생님께서는 남은 임기 3년을 보내는 동안 나와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아, 내 교직 인생에서 관리자께 이토록 따뜻한 말씀을 들어보다니. 윗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뜻밖의 경험. 이런 건 배워야 해, 나도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해줘야지.’
교장 선생님께서는 내가 보내드린 글을 단숨에 읽었다고, 정말 재미있게 읽었지만, 감동이 있고 짠했다고 말씀하셨다. 글을 참 잘 쓴다고 말씀을 하시기에 전혀 그렇지 않다고, 쓰면서 읽고 쓰고 나서 읽으며 거듭 고쳐 쓴 덕분이지 글솜씨로 써 내려간 글이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굳이 겸손할 필요는 없고 사실이다, 그러니까 내 찐심.
“어쨌든 저는 1빠로서의 책임감을 갖고, 꾸밈 1도 없는 레알 민낯을 보여드리고 왔습니다. 다음 선생님들 편히 다녀오셔요. 어쩌면 교장 선생님께서는 기대하는 바가 별로 없으실 겝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