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나는 고모가 셋이다.
그 중에 첫째 고모는 대학가로 유명한 신촌에 살았는데, 우리 가족을 비롯한 친척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큰 고모’ 보다는 ‘신촌 고모’ 라고 불렀다.
고모네 집은 경사가 제법 진 비탈길 끝에 갑자기 삼각형의 위를 뚝 자른 듯 예상치 못하게 나타난 평지에 있는 디귿자 구조의 옛날 집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본 지붕의 모양이 꼭 한글의 ㄷ자같이 생겨서, 우리는 그 집을 ‘디귿자 집’이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문화대백과사전에도 ‘우리나라 전통 가옥의 한 형태’ 라고 정식으로 올라있는 명칭이었다.
외가도 친가도 모두 도시에 있어서 방학마다 시골에 내려가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던 나에게 신촌 고모의 디귿자 집은 서울 한복판인데도 마치 시골에 놀러 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나 혼자만의 시골집' 이었다. 아파트 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내게,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다 숨이 찰 때 쯤 마법처럼 갑자기 나타난 그 집의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디귿자 지붕과 디귿자 대청마루가 빙 둘러진 한복판에 봉숭아꽃, 사루비아 등이 피어있는 손바닥만한 꽃밭이 있는 마당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마당에 서서 올려다보는 하늘 역시 푸르디 푸른 디귿자였다.
꽃밭 옆에는, 주인이고 낯선 이고 가리지 않고 반가워 죽겠다는 듯이 꼬랑지를 끊어질 새라 흔들어대는 누렁이가 있었다. 종자도 혈통도 알 길 없는 믹스견, 흔히 말하는 잡종이었지만 자기 집 바로 옆의 꽃밭을 가로지르지 않고 항상 빙 둘러가는 영특함에 우리는 누렁이가 어떤 명견 앞에서도 꿀릴 거 없다며 된장찌개에 비벼 먹다 남은 밥을 밥그릇에 듬뿍 담아주곤 했다.
어린 내가 신촌 고모네 집에 갈 때 마다 제일 좋아했던 놀이는 대청마루 끝에서 끝까지 왔다갔다하며 끊임없이 뛰어다니기였다. 아파트에 살면서
“뛰지마! 아랫집에서 올라와!! ”
엄마의 잔소리를 하루에도 열두번씩 들었던지라 대청마루를 일부러 세게 밟으며 콩콩콩 소리를 내고 괜스레 퉁퉁 발을 굴러보기도 했다. 내가 그럴 때마다 엄마는
“고모집 무너지겠다. 아이고 정신없어!!”
고만 하라고 타박을 했지만 고모는 그런 엄마를 손짓으로 만류하며
“놔둬라. 지 집에선 저렇게 못 뛸 거 아냐. 실컷 뛰고 가라”
늘 나를 두둔해주었다.
대청마루의 삐그덕 대는 소리에도 까르르 넘어갈만큼 모든 것이 재미있을 나이였다. 나는 깔깔거리며 디귿자 위를 몇번이고 왕복했고, 제 집에 묶여있던 누렁이도 같이 뛰고 싶었는지 꼬랑지가 안 보일 만큼 흔들어대며 나를 보고 컹컹 짖어대곤 했다.
따로 떨어져있는 부엌으로 가려면 대청마루에서 신발을 신고 내려서야 했다, 매 끼니 때마다 상을 들고 방으로, 때로 날 좋은 날에는 대청마루로 옮겨야 하는 번거로움에, 상을 나르는 고모와 언니들은 늘 신발도 없이 맨발로 댓돌 위에서 심호흡을 한번 하며 영차~ 구령에 맞춰 번쩍 상을 들어올리는 것이 신촌집의 익숙한 식사 때의 풍경이었다.
매일 무거운 상을 부엌에서 들고 나와야 하는 고모와 언니들에게는 귀찮고 고된 일상이었겠지만, 그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한 나는 부엌에 딱 붙어있는 작은 테이블에 앉아 ‘식사 끝날 때까지 일어나지 말라’는 엄마의 잔소리에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서 신이 났다. 주문한 모든 음식을 풍성하게 모두 차려서 상채로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한정식 집에 온 것도 같고, 대청마루에 앉아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며 밥을 먹으면 꼭 소풍을 나온 기분이 들기도 해서 밥맛이 더 꿀맛이었다.
안그래도 수시로 엉덩이가 들썩거리는데,
“여그 물 좀 가지고 온나..”
어른들이 심부름이라도 시키면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제가요~” 하면서 신발도 안신고 대청마루 아래로 뛰어 내려서는 나를 보고,
“기집애가 저리 망아지같아 걱정이예요..”
고모에게 엄마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말하는 소리를 듣는 것도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냅둬.. 쟈가....옛날 집이 신기해서 저렇게 돌아다니는 거니. 저 쪼그만 가시내 하나 뛰어다닌다고 마루 안 무너져. 우리 집이 보기엔 이리 허름해 보여도 얼마나 튼튼하게 지은 집인데..”
내 편을 들어주는 고모의 그 다음 레퍼토리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신촌 고모는 딸만 여섯이었다.
사실 맨 처음에 첫아기로 남자아기가 태어났었는데 세상에 나오자마자 들었다는 아기의 우렁찬 울음소리는 고모의 환청이었을까.. 혼자서는 숨도 못쉬던 아기는 엄마 품에서 젖 한번 빨지 못하고 그렇게 다시 하늘로 갔다고 했다. 지금이야 인큐베이터도 있고, 얼마든지 아기를 살릴 수 있었겠지만, 대청마루 건너 제일 큰 안방에서 친정엄마... 그러니까 우리 할머니의 도움으로 아기를 낳았던 고모는 숨을 안 쉬는 아기를 품에 안고 그저 어르며 흔들어보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고 한다.
그렇게 디귿자 집의 장남이 될 뻔한 그 아기 이후로 고모는 줄줄이 딸만 내리 여섯을 낳았다. 하늘로 간 아들이 저 대신 사내아이 하나 쯤은 보내주리라 기대했던 고모는 여섯번째 막내가 딸이라는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서 대성 통곡을 했다고 한다. 축복받아 마땅한 자신의 탄생일에 엄마의 눈물이 섞인 젖을 먹어야 했던 막내언니는 그러나 클수록 막내답게 집안의 마스코트이자 디귿자 집에 항상 웃음이 끊이지 않게 하는 보석같은 귀염둥이 막내로 위로 다섯 언니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아마 언니들은 엄마에게 날 때부터 환대받지 못한 막내가 안쓰러워서 더 귀애했는지도 모르겠다.
고모까지 여자만 일곱명인 신촌 디귿자 집은 하루도 빠짐없이 울고 웃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동네에서는 딸부잣집으로 불리웠다, 아들 엄마는 아들집 부엌에서 죽고, 딸 엄마는 비행기 타고 가다 죽는다는 우스갯 소리를 하며 동네 아줌마들은 고모 속도 모르고 참말인지 빈말인지 고모를 부러워했다.
첫째 딸,둘째 딸,셋째 딸까지 줄줄이 한두해에 걸쳐 시집을 가고, 자매이자 동시에 절친한 친구였던 언니들이 한꺼번에 셋이나 비어버린 허전함에, 남은 세 자매들은 두명, 세명이 복닥거리며 비좁게 같이 쓰던 방이 넓어졌다고 좋아하던 것도 잠시, 한동안 의기소침했다. 늘 시끌벅적하던 디귿자 집이 조금은 조용해졌다. 그러나 곧, 약속이나 한 듯 아들,딸,아들,딸 사이좋게 번갈아가며 세상에 나온 조카들의 빽빽거리는 울음소리와, 이 땅의 어느 꽃이 저 꽃들보다 이쁘겠냐며, 우는 아기들을 어르고 달래며 즐거워하는 어른들의 웃음소리로 디귿자 집에는 다시금 생생하고 싱그러운 활기가 넘쳤다.
이제 손주 여섯을 둔 할머니가 된 고모는 행여나 아기들이 대청마루에서 굴러 떨어질까 노심초사였다. 안그래도 이미 몇 해 전부터, 드넓은 대청마루를 무릎 꿇고 걸레질하는 것도 더 이상 힘에 부쳐 못하겠고, 부엌에서 방으로 허리가 끊어질 듯 상을 실어다 나르는 생고생도 지긋지긋하다는 고모의 푸념이 이어지던 참이었다. 여섯 딸들이 유년 시절부터 아이 엄마가 될 때까지, 자매들의 모든 희노애락을 함께 하며 같이 나이 들어간 디귿자 집에 고스란히 내려앉은 세월의 더께가 집을 더욱 낡아 보이게 했다. 듣기 좋게 삐걱거리던 대청마루의 반질반질한 윤기도 고모의 걸레질의 줄어드는 빈도수와 약해지는 손아귀 힘만큼 색이 바래며, 군데군데 이가 빠지고, 비가 오면 지붕에서 천장으로 새어나온 빗물이 떨어져 집안의 모든 양동이와 심지어 냄비까지 방안에 일렬정대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기어이 큰 손주가 대청마루에서 굴러 떨어져 땅에 머리를 찧는 바람에 온 가족이 혼비백산한 일을 계기로 고모와 고모부는 큰 결단을 내리셨다. 여섯 자매들의 울고 웃던 추억이 가득한 디귿자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4층짜리 상가주택 건물이 올라왔다. 일층에는 커피숍에 세를 주고, 2층부터 4층까지는 결혼 후 몇 년 지나 미국으로 이민을 간 첫째 언니와, 남편을 따라 지방에서 살림을 꾸리게 된 셋째 언니를 빼고, 고모 내외와 시집간 딸 부부, 각 집의 아이들, 그리고 여태 시집 안 가거나 혹은 못 간 딸들이 층 구분도 없이 계단참을 오르락내리락하며 한 지붕, 아니 이제는 더 이상 디귿자도 아니고 가운데 꽃밭도, 영특한 누렁이도 없는 한 건물 안에 복작복작 모여 살았다. 층층이 부엌이 따로 있어 고모는 비로소 무거운 상을 번쩍 들어나르느라 늘 구부정하던 허리를 곧게 펴고, 우아하게 신식 주방의 고모의 허리 높이에 딱 맞춘 조리대에서 예쁜 그릇에 담은 반찬이며 국을 하나씩 차려내셨다.
해를 건너가며, 비록 순서대로는 아니었지만 어떻든 막내 언니까지 모두 결혼을 하고 모두 아이들이 생기자, 신촌 고모네서 가족 모임이라도 하는 날에는 전세버스를 대절해야 할 정도로 디귿자집 식구들은 대가족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경사가 제법 가파른 언덕 끝 갑자기 나타난 평지에 마법처럼 나타나던 디귿자집은 온데간데 없고, 여느 건물과 다르지 않은 네모반듯한 회색빛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는 게 훨씬 편해지고, 비로소 허리를 펴니 살 것 같다는 고모에게는 미안했지만 나의 이기적인 마음은 디귿자 하늘을 품은 그 집이 그리웠다. 나도 공부하느라 바쁜 시기가 되어 자연히 고모네 집에 가는 일도 드물어졌고, 어쩌다 친척들이 모두 신촌 고모네서 가족 행사를 위해 모여도 나는 공부가 바쁘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그렇지만...실은...비탈길 끝에 우뚝 솟아있는 회색 시멘트 건물 안에 내 유년 시절의 행복한 추억까지 파묻혀 굳어버린 것 같아서,,, 굳이 다시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던 게 더 솔직한 마음이었다.
몇 년 후, 지병이 있던 고모부가 돌아가셨다.
고모부가 돌아가신 후 한동안 맥이 없던 신촌 고모는, 그러나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분가하지 않고 한 건물 아래 위층에 사는 딸들과, 분가했지만 여전히 친정집을 제 집처럼 수시로 드나드는 딸들... 그리고 그 손주들까지 돌보아 주고 건사하느라 외로울 틈도 없이 여전히, 고모의 표현으로, ‘멀쩡히 눈 뜬 사람 혼이 쏙 빠질만큼’ 바빴다. 언니들도 고모부가 안 계시는 집에서 고모 혼자 우울해 할까봐 일부러 층계참을 더 바삐 오르내리며 자신의 아이들을 차례로 엄마에게 맡기곤 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고모네 집 주위로 비탈길을 따라 재개발 바람이 불더니 길의 가파른 경사가 깎인 자리에 한층 한층 아파트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신촌 고모의 건물이 있는 곳도 재개발 구역에 포함이 되어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아파트가 된다고 했다. 예전의 낡고 허름했던 디귿자집은 이제 한 채도 아니라 입주권이 여덟 개나 나오는, 소위 말하는 대박 건물이 되었다. 고모의 옛 디귿자 집이 깔고 앉은 땅의 넓이가 제법 컸고, 깨끗한 신축 건물로 바뀌었으니 재개발 감정 평가라는 것을 받을 때 훨씬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 고모네 집에 오랜만에 다녀온 엄마,아빠가 나누는 대화를 어깨 너머로 들으며, ‘대지지분’ 이며 ‘감정평가’ 같은 낯선 용어들 틈에서 그래도 한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제 신촌고모는 부우~자구나!’
-2회에 계속-
사진 출처: 하회마을 민박추천 ♪가고파민박 특별함이 있네! : 네이버 블로그
사진 이미지를 찾다가, 그 시절 디귿자 신촌집과 가장 비슷한 안동 하회마을 민박집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