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잘난 당신에게

2026년 새해인사

by 한아


나여사는 어려서부터 좀 그런 면이 있었다.

모든 것을 잘해야 했고,

칭찬을 독차지하기를 원했고,

공부든, 노는 것이든 뭐든 지는 걸 싫어했고,

남보다 못하는 것이 있으면 필요 이상으로 주눅이 들고

누구에게랄 것 없이 화가 나기까지 했다.

그게 싫어서 뭐든 열심히 했다.


그래서, 어려서는 제법 똘똘하단 소릴 들었다.

나이답지 않게 계획적이고 끈기 있단 소리도 들었다.

열심히 하면 제법 잘한단 소리도 들었다.

공부도, 그림도, 글도, 그게 뭐든.


나이가 드니, 열심히 해도 안 되는 일들이 점점 늘어갔다.

계획대로 원하는 결과가 나오는 건 딱 초등학교 5학년까지...

인생이 내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걸 그때 알았다.

일찍 알게 된 것까진 좋았는데,

조숙했을 뿐,

현명하진 못했던지라,

순응을 몰랐다.


여전히 하던 대로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오지게 삽질을 하다가 어른이 되었다.

'열심히'와 '제대로'를 구분하지도 못한 채,

삽질이 계속되니 힘이 빠졌다.


삽을 버리고 망치를 쓰거나, 갈퀴를 쓰거나 그것도 아니면

삽질하던 돌땅을 떠나 보드라운 흙땅을 찾아갈 법도 하건만,

삽질과 함께 똘똘하던 총기도 부수어졌는지

개도 안 물어갈 존심만 남아 끝끝내 오기를 부렸다.

그러다 삽자루를 던지고 그 자리에 주저앉기를 여러 번.


그 낭패와 열패의 감정이 두려워 이제,

안될 것 같으면 시도를 안 했다.

안 한 거지, 못한 거 아니라고 혼자 박박 우기며

웃기게도 우기다 보니 어느새 나이를 겁나 먹었다.

우기느라 힘은 빠지고.

시도를 안 했으니 암것도 해놓은 게 없어 모냥도 빠지고.


그러는 와중에도,

여전히 인생을 뜻대로 되는 법이 없어

모냥 빠진 것도 모자라, 거대한 구덩이에 빠졌다.

그야말로 날개 없는 추락이 이런 거구나.. 싶은.

인. 생. 나. 락


나여사의 지옥이 시작되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내가 내 구덩이를 팠구나.

머릿속에 도돌이표를 그려놓고

미친년처럼 내내 혼자 머릿속을 맴맴 돌다가

진짜 돌아버릴 지경이 되어 차라리 죽어버리자 싶었다.

하느님 믿는 사람이 스스로 죽으면 지옥간다던데,

살아 지옥이나 죽어 지옥이나 그게 그거지.


-죽는 거 존데, 하나만 묻자.

목소리가 들렸다.

-뭐?

-너는 그러니까 여전히 니가 잘났다는 거구나.

-뭔 개소리야.

-너 뭐 돼?

-알아듣게 말해. 누군지 몰라도 장난해?


넌 망하면 안 돼?

넌 실수하면 안 돼?

넌 실패하면 안 돼?

넌 다 잘했어야 해?

왜? 니가 뭔데?


나?...

나는....

나의 실수를

나의 실책을

나의 실패를

여전히 인정하지 못하고,

인정을 안 하니 여전히 다 쥐고 내 거라고 착각하고 있는,

나, 나, 나... 오롯이 <나>에게 기준과 시선을 두고 있는,

나잘난 여사.

그렇구나. 그러네...


이제 진짜 다 됐다 하는 순간,

인생은 빅엿을 날린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

9회 말 2 아웃에 홈런 한방으로 다 이긴 경기가 뒤집어지듯,

눈감고 툭 쳐도 들어갈 거리의 챔피언 퍼팅에서 골프공이 비껴가듯,

그때는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이 지나고 보면 최악수였던 경험은 어쩌면 인생의 디폴트 값.

날아온 빅엿에 엉겨 붙어 꼼짝 못 하고 점점 엉망이 되거나,

할짝할짝 단맛을 천천히 핥아먹으며 녹여 없애거나,

선택은 각자의 몫.


나잘난 여사의 진짜 실패는,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을 여전히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전히 잘나고만 싶어 하는 나잘난 여사에게

신년을 맞아 법륜스님의 한마디를 들려준다.

'열등감의 뿌리는 우월감에 닿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잊지 말길,

시선을 나에게서 돌려 세상밖으로,

<순리>라고 불리는 것에게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의 눈 속으로 돌려보길.

잘나지 않아도 당신,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깨달아주길.

올 한 해, 나여사의 마음의 평안을 기도한다.


덧붙여,

새해가 되었어도

여전히 마음은 지옥에 있는 세상의 나잘난 당신들께도.

우리 모두 잘나지 않아도, 잠시 실패했어도,

그 자체로 꽤,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부디, 새해에는 평안하십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캡처.JPG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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