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보다 영화를 좋아하는 인문대생의 이야기
올해 1월 말 기준으로 영화 544편, 대략 1000시간을 봤다. 어떻게 그렇게 많이 봤냐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영화를 그렇게 적게 보지도 많이 보지도 않는 사람인 것 같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일반인도 아니고 시네필도 아닌 어딘가 애매한 포지션이라고 생각되지만, 작년 한 해는 학교를 다니면서 영화만 90편을 봤으니 꽤 많이 본 것 같기도 하다.
처음부터 영화를 이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1년에 영화 10편도 안 보는 사람이었다. 의식적으로 영화를 보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같은 반 친구가 ‘왓챠피디아’를 알려준 게 계기가 되었다. 왓챠피디아는 영화나 책, 드라마 등의 콘텐츠에 별점을 매기는 앱이다. 남들에게 추천해도 별점 매기는 것 자체에 재미를 들이지 않는다면 아무리 콘텐츠를 많이 보고 좋아해도 금방 질려한다. 결국엔 늘 남기는 사람들만 남아 별점을 메기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처음 평가한 작품 수는 어림잡아 190편에서 200편 초반 정도였다. 잊고 있었던 영화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작품 코멘트를 읽는 것도 재미있었다. 사실 이때까지도 영화를 한 달에 한두 편 정도 보는 사람이었다. 정말 영화에 빠져든 건 2020년 코로나 때부터다. 대학생이지만 코로나로 인해 학교에 가지 못하게 되었고 나는 집에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1년 동안 학교 수업을 대체하는 녹화 강의는 대충 듣고 남는 시간에 영화를 봤다. 이 시기에 본 작품들이 지금까지도 내 기억 속에 가장 많이 남아있다. 특히 좋았던 작품은 리뷰를 쓰기도 했다. 그간 한 번도 뭔가에 깊게 빠지거나 하나에 꽂혀 끝장을 보거나 한 경험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끝장을 보지는 못했어도 꽤 영화에 애정을 쏟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딱 즐기는 수준’에서만 봤기 때문이다. 영화를 좋아하지만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영화관에 매일 간다거나 같은 영화를 몇 번이고 본다거나 장르 따지지 않고 모든 영화를 섭렵한다거나 하는 열정은 내게 없었다. 내 취향에 맞는 일부 영화들을 편식하며 즐겼다. 영화를 보고 싶은 날에는 3편 연달아 보기도 했지만, 딱히 생각이 없으면 일주일 넘게 보지 않았다. 길면 한 달이나 두 달 넘게 영화를 보지 않은 시간도 존재한다. 단순히 취미로만 즐기는 것의 편리함은 내가 필요할 때만 찾아도 괜찮다는 점이다. 여유가 생기지 않으면 언제든 던져두고 쳐다보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물론 그만큼 여유가 없으니 취미를 즐기지 못하는 데서 오는 정신적 결함은 생길 수 있겠지만 말이다.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또 있다. 보통의 영화는 길어도 3시간 안에 엔딩 크레딧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3시간 내내 집중하는 게 더 어렵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게는 드라마를 매주 챙겨 보는 꾸준함이나 계속해서 다음 편을 클릭하는 성실함이 없다. 게다가 16화까지 봤는데 결말이 허무하다면 16시간을 손해 보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중간에 그만두기에는 본 게 아깝기도 하고 보다가 하차한 애매한 상태로는 별점을 남길 수 없다. 여러 이유로 드라마는 10부작 내에서만 허용하는 편이다.
살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나 역시 그 말에 계속해서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어떤 걸 직업으로 삼아야 하는지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한때는 영화 관련한 취업을 생각해보며 관련 정보를 찾아보았다. 영화판에 뛰어들려면 ‘아무리 현실이 어려워도 영화 한 편에 행복해할 수 있나?’에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길래 깔끔히 접어두었다. 나는 어디까지나 좋아하는 걸 편히 즐길 수 있어서 영화를 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보려고 한다. 앞으로도 나는 인문대생이지만 책보다 영화를 더 많이 보는 사람으로 남을 듯하다.
-이 편지는 책을 안 읽는 것에 대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인문대생으로부터 온 변명입니다-
p.s
일로 삼지 않고 정말 순수하게 좋아할 수 있는 자신만의 취미를 가지고 계시나요?
사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일도 게을리하는 탓에, “와 그러면 싫어하는 일은 얼마나 안 할까?” 싶어서 내가 좋아하는 걸 일로 삼아야 그나마 버틸 수 있겠구나 생각했는데 요즘은 또 잘 모르겠네요. 언제까지고 계속될 진로고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