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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lvia Sep 16. 2024

3. 다문화 꽃이 피었습니다

다문화가 일상인 캐나다 중학교 교실에서

5월이 되니 겨울 동안 꽁꽁 얼려놨던 에너지가 폭발이라도 하는 것처럼 하루가 다르게 토론토는 초록색으로 물들었다.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앙상한 겨울나무에 푸른 나뭇잎이 폭죽처럼 터졌고, 예상하지 못했던 활기찬 봄기운은 칙칙한 이민생활에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전학을 간 새 학교는 어떤 곳일까. 가기 전부터 걱정이 들었지만 이 동네는 동양인이 조금 더 많다고 하니 두려움보단 설렘이 앞섰다.



등교 첫날, 여전히 입도 뻥긋 못하는 날 위해 학교에서 동급생인 한국인 2세 학생을 교무실로 불렀다. 그 아이는 한국말이 서툴렀지만  한국인이 나와 같은 반에 있다는 사실은 학교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기에 충분했다. 점심시간에 카페테리아에 가니 아시아계 학생들이 꽤 보였다. 아시안은 대부분 중국, 한국, 일본, 필리핀 출신이었다. 나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로가 되던지. 전 학교에서는 동양인은 가뭄에 콩 나듯 볼 수 있었기에 항상 외계인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매일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등교를 했는데, 이 학교에 와서는 “여기서는 살아남을 수 있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한결 가벼운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전 학교와 달리 어느 정도 안정감을 갖고 이어가던 새 학기 초입 어느 날, 그중 한 학생이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 온순한 눈망울을 가지고 있던 하루나. 그 아이는 일본인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6학년을 졸업하고 온 나는 일본 식민지 시절에 대해 어느 정도 배운 상태였다. 6학년 사회 시간에 한국 땅에 꽂혀있는 일본 국기를 보며 얼마나 분개했었던가. 남의 땅에 들어와 행패를 부리는 일본인들을 대체 어떤 놈들일까? 그들은 어떻게 생겼을까? 보나 마나 악마처럼 생겼을 거라 단정했다. 이런 놈들이랑은 절대 상종 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12살 어린 마음에 일본에 대한 미움과 고국에 대한 충성의 씨앗이 깊게 박힌 채로 한국을 떠났다.



어린 나이였지만 일본이라면 미움과 분노가 이미 바탕으로 깔렸다. 하지만 여기 와서 만난 일본 친구는 내가 상상했던 일본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악마처럼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하지도 않았고, 나를 헤칠 것처럼 덩치가 크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얼굴에는 악의라곤 단 한 방울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랏, 얘네 왜 이렇게 생겼지?”



학교에서 배운 일본인에 대한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집에 와서 상기된 얼굴로 가족에게 얘기를 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엄마, 오늘 일본인 만났는데 너무 신기했어! 그렇게 못생기지 않았던데?”


우리에게 이런 못된 짓을 한 나라의 국민이라면 당연히 못생겼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조용하고 순수하게 생긴 하루나에게 더 호기심이 생겼다. 얘는 왜 내가 상상했던 것과 전혀 모습을 하고 있을까. 둘 다 영어가 서툴렀던지라 할 수 있는 대화는 많이 없었지만 오고 가는 짧은 대화 속에서 우리 집에 놀러 오라고 초대를 했다.



일본인 친구가 온다니 온 가족이 약간 들뜬상태가 되었다. 무슨 대화를 하고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엄마가 카메라를 가지고 와서 사진을 찍었던 게 생각난다. 나만큼 우리 가족도 일본인이 신기했었나 보다.



하루나와 친해지면서 마음속에 갈등이 생겼다. 일본인이랑은 상종도 안 하겠다던 다짐은 온데간데 없이 증발해 버린 지 오래였다. 이 아이와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고, 그럴수록 내가 한국을 배신하는 것 같은 죄책감에 마음 한켠이 무거워졌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자라온 환경에 대해서, 내가 받은 교육에 대해 생각했다. 일본인은 정말 모두 다 나쁜 사람들일까? 걔네를 미워해야지만 내가 더 한국사람이 되는 걸까? 왜 한국에서 배웠던 것과 내가 경험하는 것은 이렇게나 차이가 클 까?



우물 안에 개구리가 따로 없었다. 세상은 넓고 내 생각은 좁았다. 새 학교에서 여러 국적 출신 친구들을 만날 떄 마다 묵혀놓았던 고정관념이 하나둘씩 깨지기 시작했다. 역사와 개인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그러니 내가 가지고 있는 얄팍한 지식으로 섣부른 일반화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 즈음부터 인식하기 시작한 것 같다.


하루는 ESL 반에서 대만에서 온 친구를 만났다.


“너 어디서 왔어?”

“대만.”

“아 중국?”



그러니 그 친구가 노발대발하며 자기는 대만에서 왔다고, 대만은 중국이 아니라고 하는 거다.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으니 참 별나다고 생각했다. 그게 그거지, 이게 이렇게 화를 낼 일인가.. 싶었는데 나중에 대만과 중국사이에 정치적인 긴장이 매우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 친구에게 미안해졌다.



유년시절 다양한 문화권과 접하면서 고정관념을 깨는 일은 책에서만 배우는 것과는 다른 배움을 선사했다.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편견이 사라졌고, 외교정치와 역사 교육이 한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으며, 훗날 다문화 교육이 정규화된 토론토에서 선생으로 일하면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의 밑거름이 되었다.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함부로 판단하지 말 것, 열린 마음으로 타인을 대할 것, 그리고 나도 다른 이와 똑같은 실수를 할 수도 있으니 남을 비판하기 전에 나를 돌아볼 것.



선생이 된 후로는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토론토 교실에서 내가 학생으로써 겪었던 다문화교육의 장점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학생들의 세계관을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수업을 준비해 보지만 때로 현실은 내가 원하는 데로 흘러가지 않는다. 극과 극이 충돌하며 갈등의 공간으로 수업이 탈바꿈을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시리아 전쟁이 발발했던 2016년이었다. 6학년 반 담임을 맡고 있었다. 당시 시리아 전쟁과 난민 문제가 하루가 멀다 하고 화두에 오를 때라 이 관건에 대한 신문 기사를 읽고 시리아 전쟁에 대해 더 깊게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이 사태로 인해 생긴 난민들의 피해, 주변 국가들의 대응 및 캐나다의 입장에 대해 대화를 하다 보니 꽤 많은 학생들은 캐나다가 시리아 난민을 받아야 한다는 의견을 내세웠다. 나이에 비해 성숙한 토론을 한 학생들이 기특했다. 수업이 잘 끝났다는 뿌듯한 마음을 가지고 교실을 나오려는데 한 학생이 조용히 나에게 다가와 얘기를 했다.



“선생님, 저는 레바논 출신인데요 시리아 애들 진짜 별로인 거 아세요? 우리 할아버지가 그러는데 시리아 난민은 어딜 가나 물을 흩트려 놓으니 받지 않는 게 최상책이래요.”



학생은 튀고 싶지 않아 반대 의견을 학급 토론 때 발언하지 않은 거였다. 할아버지가 겪었던 경험담과 그 말을 듣고 아이에게 해 줄 적당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할아버지 의견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질문으로 아이와의 대화를 흐지부지 마쳤던 것 같다.



수업이 끝나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중립의 입장에 서서 내 의견이 정치적이나 종교적으로 편파 되지 않게 수업을 진행했나? 만약 시리아에서 온 학생이 우리 반에 있었다면 어떤 방식으로 토론이 진행되었을까? 민감한 주제는 다루기 어려우니 아예 수면 위로 꺼내지 않는 게 좋을까? 수많은 의견과 정보가 소용돌이치는 교실에서 갈등을 넘어 이해와 관용의 단계로 어떻게 가야 하는 걸까.



훗날 다른 학교에서 시리아 난민 출신인 학생을 맡은 적이 있다. 짧은 영어로 레바논에 있던 난민캠프에서 겪었던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던 학생.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난민에 대한 나의 무지함이 부끄러웠고 시리아 난민을 반대하던 레바논 출신 학생이 떠올랐다. 만약 여기에 있었다면 그 아이가 가지고 있던 칼날처럼 곤두서있는 편견과 오해의 껍질을 얇게나마 벗길 수 있었을 텐데.



믿고 싶지 않지만, 21세기에도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전쟁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과거 역사에서 우리는 대체 무엇을 배웠나.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전쟁 때문에 난민 문제는 종종 사회이슈로 떠오른다. 사회의 작은 축소판인 우리 교실. 세계가 하나로 모이는 이곳에서 다문화 교육의 중심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학생 앞에 설 때마다 고민해 보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모든 이의 의견과 경험이 환영받고 존중받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선생인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상대방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 곳.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닌 곳. 내가 온전히 나로서 우뚝 설 수 있는 곳. 서로의 얘기를 진정으로 들을 수 있는 공간에서는 상대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이 묻힌다. 나를 감싸고 있는 견고한 벽이 허물어지고, 그 틈 사이로 새로운 시선이 들어온다. 그곳에서 비로소 다문화 교육의  꽃이 핀다. 꽃에 둘러 쌓여 한층 넓혀진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부질없는 싸움 끝에 비로소 평화가 찾아올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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