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 아니야. 새 프로젝트가 들어가서 밥 먹을 시간도 없다고. 장인어른께 전화도 드렸단 말이야."
"생신날 전화 한 통이면 끝이지. 어이가 없다. 그 선배라는 여자랑 커피 마실 시간은 있니?"
"그냥 선배라고 했잖아. 구질구질하게 왜 이러냐?"
"구질구질.. 야!! 이 새끼야. 모른 척하고 있으니까 진짜 모르는 줄 알았나. 니는 그냥 선배라는 여자랑 호텔도 가나. 인간 같지도 않은 새끼. 이혼하자."
평일에 찾은 고향 간이역에서 어린 시절 뛰어놀던 내가 보였다. 밖으로 나가 고향 들녘을 감회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주 옛날인 거 같기도 하고 어제 일 같기도 하고 그 사이 늙어버린 거 같기도 하고 고향 마을이 변한 거 같기도 했다.
역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친정이 있다. 시골에서 보기 드문 양옥집, 멋스럽게 쭉쭉 뻗은 가지를 뽐내는 소나무 한 그루가 잘 가꾸어진 정원을 폼 나게 만들었다. 부러움을 살만한 모양새다. 그곳은 누군가 뚜껑을 열어주기 전에는 빛을 보기 힘든 상자 속이었다.
엄마는 생기있는 날보다 몸져 누워있는 날이 더 많았다. 살가운 딸이 아닌지라 어디가 아픈지 물어본 적도 없었다. 고작 3식구가 겉보기에는 가족처럼 보이지만 서로 데면데면하고 들어오는지 나가는지 관심도 없었다. 각자의 생활에 충실했고 큰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대화는 없었다.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엄마가 한없이 약하고 쓸쓸해보였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나마 엄마와는 모녀 관계를 유지했다.
"엄마, 나 이혼할까?"
"와? 정서방하고 뭔 일 있나?"
"아니.. 뭐.. 그냥.."
"여자가 있더나? 남자들 다 그리한다. 옛날에는 첩도 안 들있나. 고마 이해하고 덮어주고 살믄 다 돌아온다."
"엄마, 혹시 아버지도 그랬나? 그래서 남처럼 살았던 거가?"
"다 지난 일이다. 생각하기도 실타."
"엄마, 나는 그리 몬산다. 서준이만 있으모 혼자 살아도 개안타."
"으짜다 니 팔자가 내를 닮았노."
엄마는 뒤돌아서 눈물을 훔쳤다. 새까맣게 타버린 엄마 속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왜 그렇게 남처럼 살아야만 했는지 그제야 알았다. 세상은 변했고 굳이 엄마가 걸었던 길을 걸을 필요는 없다. 이혼은 더욱 확고해졌다. 뜻을 굽히지 않으니 남편은 아이를 걸고넘어졌다. 아이의 양육권은 절대 줄 수 없고 아이도 못 만나게 할 거라며 협박을 했다. 자신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아이를 두고 협박하는 하찮은 인간에게 아이를 뺏기고 싶지 않았다. 결국은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소송에까지 이르게 된다.
아이가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아이가 눈에 밟혀 눈물로 밤을 지새웠다. 겨우 여섯 살이다. 아빠가 아무리 잘해준다 해도 엄마 손이 많이 가는 어린 아기다. 엄마를 찾지는 않을까. 엄마 보고 싶다고 울고 있지는 않을까. 아이를 향한 그리움은 식욕도, 삶의 의욕도 잃게 만들었다.
봄꽃이 만개한 동산에서 아이와 술래잡기를 했다. 아이가 먹기 좋게 만든 김밥을 맛있게 먹었다.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부르다. 아이가 나와 살을 비비고 팔로 목을 감아 부둥켜안고 놔주지 않는다. 나도 아이를 있는 힘껏 보듬어주었다. 아이 냄새가 좋다. 오래토록 기억하고 싶은 냄새. 코로 깊이 들이마셨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와 내가 있는 쪽으로 거대한 바닷물이 차오른다. 아이를 안고 있는 힘껏 높은 곳으로 뛰었다. 미친 듯이 뛰었지만 역부족이었다. 힘이 빠진 내게서 아이가 점점 사라져 갔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아이가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서준아. 서준아.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이라다가 니가 죽는 거 아인가 싶었다. 얼굴에 핏기도 없고 삐쩍 말라 가지고. 우리가 안 보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는기라."
"맞다. 너그 아니었으면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일랑가 모린다."
"그래도 연희 니가 우리 전화번호를 1번, 2번에다 저장을 해나가 천만다행 아이가."
"너그가 내 보호자 아인가배ㅋㅋㅋ"
"지금은 이리 웃는다만은 아픈 니도, 우리도 식겁했다. 몸도 약한 니가 얼매나 맘 고생을 했시모 그 지경까지 갔긋노"
"자식이 뭔지.. 죽고 싶어도 서준이 때문에 못 죽겠더라."
"우리 쑥덕거리는 소리 시끄럽다고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쫓기날라 입 닫자 ㅎㅎㅎ"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했던 이야기 또 하고 들었던 이야기를 또 들어도 처음인 것처럼 생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