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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광 Nov 08. 2021

연희 2

몇 번의 가을이 지나고도 남편과의 지난한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소송에서 패하면 이득도 없는 진흙탕 싸움밖에 되지 않는다. 무모한 일에 돈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꼴이다. 남편에게 연락을 했다.


"위자료도 양육비도 받지 않을 테니 그만하자. 서준이랑 같이 살게만 해주라."

"생각해 볼게."


생각해 본다는 남편은 몇 달을 애를 태우고 서준이를 보내주었다. 너무 행복했다. 아이와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구름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가. 그것도 잠시 점점 현실의 벽에 부딪쳐 갔다. 아이를 맡길 곳도 마땅치 않고 어느 정도 국가 보조금을 받는다 해도 두 식구 입에 겨우 풀칠할 정도였다.

서준이 옷가지와 얼마 되지도 않은 짐을 쌓다. 다 잃어도 고향만은 품어줄 거라 생각했다. 부모님은 두 팔 벌려 나와 서준이를 환영해 주었다. 적막만이 감돌던 양옥집에 서준이로 인해 웃음소리가 대문 밖을 넘어갔다. 다행이다. 아이가 외롭지 않아서. 엄마가 웃어서. 너무 좋다.


"연희야, 고마 집에 놀아라. 너그 아버지 연금 나오는 것도 있고 서준이까지 공부시켜줄 돈은 있은께 힘든 일 하지 말고 니가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라."

"아이고, 엄마. 몸도 성하고 정신 말짱한데.. 개안타. 집에만 있으면 무료하다. 잡생각도 많이 나고. 엄마랑 아버지가 서준이도 챙겨주고 얼매나 좋노."

"서준이가 있어서 너그 아버지랑 눈 마주치고 이야기도 안 하나. 내가 참 살다 살다 ㅎㅎㅎ. 우리 서준이가 복덩이다 복덩이."

"엄마 웃는 모습 보기 좋다."



엄마가 웃어서 좋으면서도 짠하다. 딸의 아픔을 애써 외면하는 엄마가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나이가 들어도 자식은 자식인가 보다. 엄마인 줄만 알고 서준이만 바라보았는데 나도 엄마의 자식이었다. 엄마는 그렇게 나만 보고 있었다.





"야들아, 일나라. 다 왔다. 즈 함 봐라. 이 나이에 이국 땅을 함 밟아보긋다야. 일나라카니까."


"참말로 비행기 땅바닥에 내리 앉도 안했그만 호들갑은. 가시나야, 촌스럽그로 조용히 해라. 티 내지 말고."


"묵고 산다고 이런데도 폐경이 와서야 와본다. 이쁘고 짱짱할 때 와야 되는 긴데.. 서글프다."


"폐경이 왔은께 우리 셋이 날짜 맞차가 오는 기다. 씰떼없는 소리 그만하고. 연희는?"


"연희야, 연희야, 옴마야 야가 와 이라노? 식은땀까지 흘리고."




또 서준이가 사라진다. 내 아이가 보이지 않는다.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누굴까? 은희 목소리 같기도 하다. 쉼 없이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자꾸만 땀이 흘렀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떠지지 않았다. 나를 부르는 소리에 답을 하고 싶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이를 보지 못하고 지낸 몇 년 사이에 밤마다 꾸는 악몽이 허해진 마음을 나약하게 만들었다. 서준이가 옆에 있음에도, 훌쩍 자라 엄마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음에도, 서준이가 사라질까 겁이 났다.


"아이고오 야를 우짜노. 연희야, 정신 차리 봐라. 연희야."

"은희야, 정희야."

"인자 정신이 좀 드나? 세상에 무슨 일이고. 니 아직도 악몽 꾸나?"

"요새 잠잠했는데 비행기 탄다고 긴장했는갑다ㅋㅋㅋ"

"식겁했다. 걸을 수 있긋나?"

"걸을 수 있다. 착륙했나?"

"응. 좀 전에 했다. 일어나 봐라. 멀쩡한가 보구로."


씩씩하게 걸어나가는 연희를 바라보며 그녀들은 눈물을 머금었다. 내 아이를 하루라도 안 보면 애가 타는데 몇 년을 아이를 두고 속앓이를 했으니 오늘 이 순간까지 버텨낸 연희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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