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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광 Nov 08. 2021

그리고 정희


"꺄악~~ 신세계다."


"아이고오 정희야, 그리 좋나? 인자 공항 벗어났다."


"은희 니보다 더하다. 저래 조으까. 저 아(애)는 은행 부장씩이나 되면서 해외여행이 처음이라는 기 말이 되나?"


"하이고, 말이 좋아 은행 부장이지 남자들 틈에서 을마나 빡씨게 했는 줄 아나?"


"허긴 우리 세대에 여자가 부장 달기는 하늘에 별 따기보다 힘들끼야."


"말도 못 한다. 남자들이 쿨한 거 같제. 여자보다 더 시기 질투가 심하다 카니까."


"저그 자리 치고 들어오는 여자가 이뻐 보이긋나. 정희 니는 고마 공산당인기라ㅎㅎㅎ"


"아하하하 연희야, 배를 잡긋다. 니 말이 맞다. 사회생활 쉽지 않다. 난리 전쟁통이나 마찬가진 기라."


"말은 바로 하라꼬. 니가 사회생활하고 싶어서 했나. 정작 돈 벌어올 사람은 니 돈도 모잘라 지가 번 돈도 까묵고 앉았는데.."


"말해 머하긋노."





7남매 중에 늦둥이 막내로 태어나서 딸이라고 차별받지 않고 대학까지 다녔다. 아버지는 아들딸 구분 없이 공부를 하겠다는 자식에게는 아낌없는 투자를 해주셨기에 가능했다. 특별할 것도 어려울 것도 없이 평탄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은행에 취직을 했고 같은 신입사원이었던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신입 때야 박봉이어도 경력이 쌓이면 월급도 오를 테고 먹고사는 데는 크게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다. 모나지 않게 살아가던 어느 날, 남편은 첫째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직서를 내고 돌연 사라졌다. 이유도 모르고 답답했지만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시어머니는 본인 아들 앞길 망친다고 몸조리 중인 며느리에게 막말을 쏟아내기 일쑤였다. 누가 더 애가 탈까. 원망은 누가 더 하고 싶을까.


그렇게 며칠이 지나 남편은 약간 초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따지지도 그 어떤 것도 묻지도 않았다. 돌아왔으니 되었다고, 돌아와 줘서 고맙다고만 했다. 금방 남편은 다시 취직을 했고 몇 달을 다니고 또 그만두었다. 취직하고 그만두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에 둘째가 태어났고 결단을 내려야 했다.


"여보, 정말 언제까지 이럴 건데.. 진심을 말해 보이소."


"............."


"꿀 먹은 벙어리도 아이고 말해보라니깐예. 당신이 까먹은 돈이 얼만 줄 압니꺼? 주식한다고 날려 먹고, 어디 투자한다고 날려 먹고."


"다 당신이랑 애들이랑 같이 잘 살아볼라고 한 거지."


"무슨 말하는지 알겠는데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 아입니꺼. 얼른 내 집 마련도 해야 하고 애들도 커가면서 돈도 많이 들건데예."


"............."


"또 입 닫아예. 그러면 내가 하라는 데로 할 수 있겠어예?"

"뭘 으찌 하란 말이고?"


"당신이 살림하이소. 돈은 내가 벌테니깐예."


그리하여 남녀의 일 분담이 바뀌었다. 가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피 터지는 싸움판에 뛰어들었다. 여자가 남자들 틈에 끼어 승진하기도 쉽지 않았고 남자 입사 동기들보다 훨씬 진급이 늦었다. 나중에는 욕심이 생겼다. '내가 니들을 밟고 올라서고 말리라.' 공부도 열심히 했고 업무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남들보다 퇴근도 늦게 했다. 시샘하던 직원들도 그런 근성을 인정해 주었고 부장이라는 타이틀까지 달았다.





"그래도, 내가 우리 남편 덕 마이 봤다. 사고 쳐대도 그 인간 없었으면 부장 못 해묵는다. 딸내미 둘이도 잘 키았고. 그런 거는 내보다 낫다 ㅎㅎ"


"남자들이 집에서 살림하기가 쉽나. 더구나 우리 세대 남자들이."


"맞다. 우리 남편은 내가 허리가 휘도록 제사 음식 준비하고 앓아누워도 손꾸락 하나 까딱 안 하더라. 밥도 차려줘야 먹고."


"야들아, 재미도 없는 남자 얘기 그만하고 즈기 봐라. 석양이 너무 이삐다."



빨간 노을이 멋들어지게 하늘을 물들였다. 노을을 비집고 나온 바람을 타고 코끝으로 싱그러운 풀 냄새가 났다.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해 본 적 있나?"

"아이고 마 와 그런 생각을 안했긋노. 나중에는 태어나지 말걸 그랬다 싶더라ㅎㅎ"

"우여곡절 없는 사람이 어딨노.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지. 좀 올라간다 싶으모 툭 떨어지고."

"내사 마, 지금이 딱 조타. 우리 다 아들딸 잘 키아났제. 뭘 바라겠노. 안 글나?"

"서방은 우짤 수 없고 우리 나이에는 자식이 속 안 쐭이모 양반이다. 양반."

"우야튼간에 우리한테도 이런 날이 온다. 한잔하자. 눈치 볼 필요도 없고 쭈욱 마시자."

"위하여!!"


종갓집 맏며느리 은희, 싱글맘 연희, 성공한 커리우먼 정희. 성은 달라도 끝이 같은 희자매. 어릴 적에는 잘잘한 일로 다투기도 많이 했지만 싸우면서 정이 든 건지 세 여자의 끈끈함은 그 무엇으로도 갈라놓지 못했다. 살면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의지가 되었고, 고민 상담사가 되어주기도 했고, 선택과 결정의 기로에 섰을 땐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그라고 보믄 우리 셋은 복이 많다. 서로한테 좋은 동무가 있으니까.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같이 울어주고 같이 웃어주고. 맞제?"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ㅋㅋㅋㅋ"

"갱년기까지 같이 와가 하나는 덥다 카고 하나는 춥다 카고. 그런 난리가 또 있긋나ㅎㅎㅎ"

"친구 아니라고 할까 봐. 그래도 을매나 힘이 됐노."

"전생에 우리는 철천지 웬수였으까."


세 여자의 웃음소리는 밤늦도록 싱가포르 어느 거리를 가득 채웠다. 한 동네에서 나고 자라 결혼을 하고 6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추억이 있기 때문에 외롭지 않다.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친구가 있기 때문에 쓸쓸하지 않다.

깜장 고무신을 신고 곱게 땋은 머리칼을 날리며 들녘을 누비던 어린 여자 아이들은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여인이 되었다. 예쁘게 늙어가는 서로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애꿎은 머리카락만 매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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