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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Sep 17. 2023

나의 가장 사랑하는 괴물

23.09.17. 유재선, <잠>

* 영화 <잠>의 강력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공포 영화의 특성상 스포일러는 영화 감상에 상당한 악영향을 미칩니다. 재미있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질 영화이므로 관람 후에 곁들여 보길 권합니다.



일상이 더 이상 예전같아 보이지 않는다면, 공포 영화는 자기 몫을 다 한 것이다. <잠>은 냉동실 문을 열 때 움찔하게 만들고, 끓고 있는 뽀얀 곰국의 불투명한 표면 아래를 손으로 휘젓고 싶게 만들고, 드릴이 회전하는 날카로운 소리에 인생 최고의 연기를 하게 만든다. 영화를 앞뒤로 감싸는 코골이 소리는 관객들의 삶에 끈적하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간 당신은 끝내 불안해질 것이다. 옆에 누워 있을 누군가의 얼굴에 의심의 베일이 한 겹 덧씌워질 것이다.


수진(정유미 役)은 출산을 앞두고 있다. 만삭이지만, 육아휴직을 신청하진 않았다. 배우의 꿈을 이어나가는 현수(이선균 役)의 밥벌이만으로는 반려견 후추와 태어날 아이를 건사하긴 쉽지 않을 것이므로. 그렇다고 불만스럽진 않다. 가훈처럼 함께라면 극복 못할 문제는 없으므로, 이번에도 무사히 고비를 넘길 것이다. 둘은 곧 태어날 사랑스러운 아이와 함께 즐거운 삶이 계속되리라 믿는다.


"누가 들어왔어", 현수의 잠꼬대는 새로운 문제가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그날 밤부터 그들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진다. 현수는 밤마다 새로운 사람이 된다. 얼굴이 피범벅이 될 때까지 긁는 바람에 배역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냉장고에 있는 날고기와 비린 생선을 입에 우겨넣기도 한다. 부부는 정신과를 방문해 약을 처방받는다. 자신들에게 벌어진 문제가 아직까진 '의학'의 영역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후추의 죽음은 수진을 뒤흔든다. 의사의 애매한 - 그러나 최선을 다한 - 대답은 수진이 다른 방식으로 이 사태를 이해하도록 이끈다. 처음엔 엄마가 가져온 부적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지만 이젠 믿을 수밖에 없다. 살고 싶다면 믿어야 한다. 집으로 초대한 무당은 말한다. 남편에게 씌인 귀신이 개 짖는 소리, 애 우는 소리 없이 너와 단 둘이 살고 싶어한다고. 수진은 그날 이후 현수가 후추를 서늘하게 바라보던 어느 밤의 기억을 떠올린다.


아랫집에 살던 할아버지는 후추의 울음소리를 싫어했다. 발정나서 그런 거니 교배라도 시켜서 조용히 하라던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너(수진)와 단둘이 살고 싶다'는 귀신의 목소리와 공명했다. 공교롭게도 아랫집 할아버지는 얼마전 죽었다. 수진은 현수에게 아랫집 할아버지의 영혼의 씌었다고 생각한다. "할아버지, 정말로 내 딸 죽일거에요?" 잠든 현수를 향해 수진이 소리치자, 현수는 나지막히 답한다. "몰라." 이제 수진은 사태를 이해했다. 그러므로 잠들 수 없다. 현수는 딸을 노릴테니.


현수의 논리(몽유병이다)와 수진의 논리(귀신들림이다)가 완성된 후부터 영화는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며 결말을 향해 빠르게 달려간다. 수진은 끓고 있는 사골국에서 사라진 아이의 잔해를 보고, 손이 익어가는 것도 모른 채 뽀얀 국물 아래 가라앉았을 진실을 헤집는다. 현수는 더 나은 수면장애 약을 처방받을 수 있다고 호소하는 수밖에 없지만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된다. 두 사람이 그리는 평행선은 이웃집 주민의 생명을 두고 대치하는 순간 뒤얽힌다. 이제 둘 중 하나는 자신의 논리를 접어야 한다.


PPT와 연기는 각자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자신이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수단이다. 수진은 PPT를 통해 자신이 미치지 않았고, '논리'적으로 귀신들림을 설명할 수 있다고 호소한다. 현수는 수면장애를 완벽하게 극복했다며 읍소하다가, 끝내 아랫집 아주머니의 머리에 구멍이 날 순간이 되자 할아버지를 연기한다. 수진은 자신의 논리를 현수가 인정했다고 믿는다. 수진은 집 밖으로 나가는 할아버지를 본다. 그리고 긴장이 풀린듯 잠에 든다. 


수진에 눈동자에만 비치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수진이 믿고 싶은 대로 보고 있다고 간접적으로 말한다. 우리는 귀신을 보는 수진의 눈동자만 볼 수 있었다. 귀신이 있었는지 믿을 근거가 없는 셈이다. 현수가 수진을 최종적으로 속인 것일까? 감독이 영화 군데군데 심어 놓은 장치들은 수진이 타인의 말에 조금씩 흔들리며 자신이 세워둔 논리에 맞게 모든 사실들을 끼워맞추는 편집증 환자가 되었고, 현수는 영원히 아내와 함께 해야만 하는 지옥에 떨어졌다고 말하는 것 같다.


현수가 연기를 한 게 아니라면? 정말로 할아버지 귀신이 들려 있었던 거라면, 이제 문제는 해결된 것일까? 현수의 빙의 여부는 영화 내내 중요한 듯 다뤄지지만, 결말 부분에 들어서면 맥거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부러 무미건조하게 연출한 빙의가 풀리는 장면을 보라. 그의 연기는 웃음을 자아내지만, 수진은 믿는다. 믿고 싶었던 대로 행동해 주었으므로. 감독에게 중요한 건 수진이 자신의 논리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단서들을 어떻게 인용하는가, 그리고 현수가 그 끝에서 본 것이 어떤 지옥인가이다. 타인의 머리에 구멍을 낼 각오로 달려드는 수진이 코를 골며 잠들었을 때, 현수는 다음날 아침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모든 게 끝난 자리에서 새로운 공포가 시작된다. 매일 아침 눈을 떴을 때, 옆에 곤히 잠들어 있는 사람이 가장 끔찍한 존재라는 사실을 안 후에도 당신은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을까? 편모 가정에서 자란 수진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현수를 향해 중요한 순간마다 나를 버려뒀다고 원망했다. 현수는 그 말을 듣고 자리에 앉았고 끔찍한 사실을 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현수는 수진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직업이 아니라 남편으로서, 영원히 연기해야 한다. 모든 문제는 다 끝났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그가 성공적으로 연기를 마무리할 수 있을까? 어설퍼 보이는 그의 연기는 어쩐지 불길하다.


* 무대 인사에서 이선균 배우는 오늘 손익분기점이 넘었다고 했다. 이제 100만 명이 넘을 것 같은데, 비용 관리 측면에서 본받아야 할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굿하는 장면을 직접 넣는 대신 PPT 사진으로 대체하는 미친 전개는 꼭 언젠가 본받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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