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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Oct 06. 2023

당신 마음 속의 스파이

23.10.06. 벤 매킨타이어, 스파이와 배신자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얼마 전 출간 계약을 하고 목차와 샘플로 보낼 글을 쓰는 과정에서 말 그대로 바닥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 길지 않은 글을 쓰기 위해서 거의 두 주 가까운 시간 동안 지옥을 맛봤다. 누군가는 자기 경험을 있는 그대로 쓰면 된다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누군가에게 읽으라고 던져주는 글이 경멸적인 시선을 받길 바라지는 않을 것이므로. 기억나지 않는 것들을 기억하려 애쓰다보니 기력을 탕진했다.


회사 일도 늘었다. 원래 하던 일에 하나 더 추가가 되었다. 일이 많아지는 건 보통 좋게 생각하는 편인데, 이번엔 약간은 부담을 느끼고 있다. 잘 모르는 분야의 일을 동시에 두 개나 해내는 건 능력자들이나 맡을 일인데. 내 손으로 이 일들을 끝내버리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예전에 몇 번 그런 경험이 있었고, 그 때마다 가슴이 꽤 오랜 기간 아렸다. 그 땐 내가 조연출이었고, 지금은 그런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기력을 소진하고 나니, 책 읽는 것도 꽤 물리적인 체력의 문제라는 사실을 새삼 다시 깨닫고 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책도 글도 관심이 없어져서 연휴 내내 사실상 아무 글자도 쓰고 읽지 않았다. 오로지 트위터 타임라인만 애꿎게 튕겨볼 뿐이었다. 아니면 그동안 사두고 내버려 두었던 하츠 오브 아이언4를 여러 나라로 해본다든지 하면서 시간을 말 그대로 '죽이는' 것만 했다.


이대로는 안 되지 싶어서 제정신이 아닐 때 사 두었던 책들의 목록을 훑었다. 마침 저널에 내야 할 글도 시한이 다가오고 있는 상태였다. 뭐라도 써서 내야 하는 상태가 되니까, 어떻게든 손이 갔다. 그리고 몇 권의 책이 몇 장 읽다 버려졌다. 서점을 훑고, 몇 권을 싸들고, 다시 내팽개쳤다. <허삼관 매혈기>처럼 피를 판...것은 아니고 헌혈을 통해 모아둔 문화상품권도 금세 바닥이 났다. 목요일이 되었고, 나는 글자를 쓰지 못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서야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쓰고 있는 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두꺼운 책이었는데, 서문을 읽고 나니 그 뒤를 어떻게든 읽어야겠다는 마음에 모니터링할 방송도 본체만체 하며 책을 마저 읽었다. 새벽이 될 때까지. 여전히 불안감과 걱정이 마음을 짓누르고 있지만, 이 책의 문장은 그런 무거운 기분의 틈새를 비집고 머리로 밀고 들어왔다. 벤 매킨타이어의 <스파이와 배신자>였다. 나는 이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이 책이 내 삶을 좀먹어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모든 문장을 읽고 나니 새벽 5시 반이었다.




사람은 언제 스파이가 될까? 변변찮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기꺼이 읽고자 하는 스파이들은 대부분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던 세계의 진실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서 조국을 배신했다. 한 때 열정적으로 옹호하던 것들이 자신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만큼 멍청하지 않아서, 그들은 스파이가 되었다.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빌 헤이든이 '미학적인' 이유로 변절했듯이(그의 모델이 된 킴 필비도 그러했을 것이다), 올레크 고르디옙스키도 그랬다.


킴 필비는 MI6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공산주의를 이념의 조국으로 삼았고, 뚜렷한 목적을 지니고 고위 간부가 되었다. 하지만 올레크 고르디옙스키는 충실한 공산주의자였다. 아버지와 형이 인생을 바친 KGB에서 일하는 것 말고 다른 미래를 꿈꿔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는 KGB에 들어갈 만큼 똑똑하고 열정이 넘쳤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와 형이 그곳에서 어떤 일을 벌였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대숙청의 시기에 반동 분자들을 색출했고 형은 동유럽에서 스스럼없이 납치를 했다.


가면은 가족 문화였다. 아버지는 자신이 1938년에 저지른 일을 끝내 발설하지 않았고, 체제에 대한 경멸감을 품은 어머니도 언제나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마음을 내비쳤을 뿐이다. 마음의 구획을 나누는 데 능숙한 그에게 KGB는 꽤 매력적인 근무지였다. 조국을 위해 헌신할 수 있으면서도, 소련 국경 바깥에서 서구의 문물 속에 살아가는 스파이의 삶은 그를 사로잡았다. 비록 1956년 헝가리 혁명을 잔인하게 진압한 조국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에 의문을 품었지만, 그는 여전히 조국의 변화를 믿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자, 그와 함께 집단 지도체제를 꾸리던 이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스탈린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움직였다. 악명높은 첩보기관의 수장인 라브렌티 베리야는 급진적인 개혁을 내세웠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흐루쇼프는 '동지들'과 손을 잡고 베리야를 제거한 후 스탈린 격하운동에 나선다. 프랑스 혁명이 '원치 않은' 아이티 혁명에 영향을 주었듯, 격하운동으로 인한 정치적 자유의 여파는 동유럽으로 퍼져나간다. 자신의 친구인 스타니슬라프 카플란의 조국, 체코슬로바키아까지도.


1968년, 둡체크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가 여행과 언론에 대한 제한과 검열을 완화하며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내세우며 자유화를 지향했다. 덴마크에 파견되어 서방 세계의 자유로움을 직면하고 있던 그는 자신의 조국이 이 변화를 수용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브레즈네프는 '프라하의 봄'이 만개하게 둘 마음이 없었다. 그의 형 바실리 고르디옙스키가 동맹국인 체코슬로바키아에 잠입해 주요 인물 납치 계획을 세우고, 선전 선동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했다.


KGB와 조국에 충성을 맹세했던 열정적 공산주의자였던 올레크는, 자신의 조국이 형제 국가의 인민들을 향해 총을 겨누는 모습에 격렬한 경멸감을 느꼈다. 그동안 꺼림직하지만, 모른척해왔던 정권의 본질을 더 이상 외면할 방법은 없었다. "무고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공격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 체제를 불처럼 강렬히 증오하게 되었다."(62) 그는 자신의 희망과 기대가 체코슬로바키아의 인민들과 함께 산산히 파괴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서방 세계의 첩보 당국은 그의 희미하지만 확실한 변화를 뒤늦게 포착했다.


"내가 자주 느끼는 감정이 있습니다. 아마 많은 아버지들이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아요. 우리가 우리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존재하는 것 같다는 감정."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로 한국에 알려져 있는 소설가 존 르카레는 자신의 아버지의 사치와 사기로 지친 자신의 마음을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털어놓았다.(김영준, <작가, 업계인, 철학자, 스파이>, 민음사, 284-285) 올레크는 자신의 아버지 안톤에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으리라. 끝내 가족에게 진실되지 못한 삶, 거짓된 조국에 대한 맹목적 믿음 같은 것들은 자신의 손으로 끝장내야 한다고. 반역의 인간적 동기는 때론 단순하고, 그렇기 때문에 진지하다.


MI6의 코펜하겐 지부장인 리처드 브롬헤드는 얼마 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망명한 정보국 직원 스타니슬라프 카플란(그의 오래된 친구)으로부터 올레크 고르디옙스키의 내면적 불화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다. 모든 스파이들이 그러하듯, 조심스럽게 그와 만나고 관찰하면서 그는 어쩌면 올레크의 불만이, 케임브리지 5인조가 MI6에 끼친 피해를 고스란히 KGB에 갚아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어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작곡가 쇼스타코비치가 음악으로 싸운 것처럼, 작가 솔제니친이 글로 싸운 것처럼, KGB 사람인 나는 나의 첩보 세계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237)


올레크는 헌신적으로 봉사하던 자신의 조국을 가장 확실하게 망가트릴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한다. KGB의 고위 간부로 승진해 이중첩자로서 고국의 정보를 MI6에 전달하는 것. 높이 올라갈수록 더 고급 정보를 얻을 수 있기에, 그가 전달해 준 정보의 출처를 숨기기 위해 영국과 덴마크의 첩보원들은 안간힘을 썼다. 그 정보로 스칸디나비아와 영국의 소련 첩보망이 파괴된다면, 이중첩자인 올레크의 목숨도 그만큼 위험에 처할테니까. 게다가 그는 석연찮은 이유로 모스크바로 소환되기 직전이었다. 삼엄한 경계 속에서 도망치는 일은 가능할까?


만일에 대비해 자신을 구할 '핌리코' 작전의 개요를 들은 그는 이 작전이 성공할 확률이 낮다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수많은 우연과 만약이 겹쳐야 안전하게 망명이 가능할만큼, 모스크바라는 감옥의 벽은 높았다. 하지만 그 작은 확률에 기대를 거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다행히도 핌리코 작전을 발동할만큼 위험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사이 평판에 금이 가는 개인적 일들이 일어났지만, 착실히 근무한 덕에 그는 다시 소련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영국 런던이 그의 근무처였다.


그곳에 도착한 올레크는 그동안 KGB의 중심에서 습득한 수많은 정보들을 전달했다. MI6와 CIA가 편집증적 망상으로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던 감찰을 중지시킬 중요 정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MI6에 궤멸적 피해를 안겼던 케임브릿지 5인조의 마지막 인물이 존 케언크로스였음을(이미 1964년 자신이 소련 첩자라고 자백했었다) 확인시켜주기도 했다. 그의 첩보를 '다운로드' 받은 MI6는 KGB도 자신들과 비슷하게 여러 방면에서 서투르고 비능률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크렘린이 서방 세계가 핵전쟁을 앞두고 있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단 정보였다.


KGB 국장 출신으로 브레즈네프의 뒤를 이어 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된 유리 안드로포프는 미국과 서유럽이 소련을 향한 핵전쟁을 목전에 두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없는' 증거를 찾아내는 데 혈안이 된 상태였다. 만약 증거가 발견된다면, 방어를 위한 선제 공격에 나설 테세였고, 그 경우 인류는 멸망에 가장 가까워질 게 뻔했다. 편집증적 요구였지만, 징후로 여겨질만한 모든 정보가 닥치는대로 수집되고 원하는 대로 인용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강경한 대소련 정책도 의심을 부채질하긴 했지만, KGB의 정보력 낭비를 웃으며 지켜보기만 해서 될 일도 아니었다.


그를 보호하기 위한 MI6의 첩보전이 이어진다. 올레크가 KGB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도록 '닭 모이' (진실이지만 별로 쓸모는 없는, 양은 많지만 영양가는 별로 없는 정보들)를 대신 만들어 주기도 하고, 올레크의 승진을 방해할만한 인물을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지정해 출국시켜버리기도 한다. 한 때 인기도 없고 무능력해 고국으로 돌아갈 뻔했던 올레크는 런던 레지덴투라(지국)의 거물로 자라났다. 그의 앞을 가로막을 존재는 없어 보요였다. 돈에 눈이 멀어 KGB에 침투한 스파이를 밀고한 올드리치 에임스가 아니었다면.


CIA와 MI6에 속해있던 불성실한 이들로 인해 그는 모스크바에서 목숨을 건 게임을 하게 된다. 자백제와 감시를 버텨내는 와중에, KGB는 영국에 남아 있던 아내와 딸들을 소환한다. 마치 재미로 쥐를 가지고 놀다가 더 이상 흥미가 사라지면 죽이는 고양이처럼, 자신의 오래된 직장은 그의 목을 조금씩 조였다. 앉아서 죽느냐, 아니면 아주 약간의 확률에 모험을 거느냐. 오랜 시간 갈고 닦아온 - 그러나 이것이 실행되는 순간 영국과 소련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될 것이었다 - 희박한 성공 확률을 지닌 '핌리코 작전'은, 모두의 가망없는 기대를 품고 실행에 옮겨진다.


우연과 기지가 겹친 탈출 과정은 최근에 본 그 어떤 영화들보다 흥미로웠다. (이 부분은 그 어떤 요약도 온전하게 재미를 전달하는데 실패할 것이므로, 한 번 펴서 읽어보길 바란다. 총성 한 발 없는 장면들 속에서 온 몸에 땀이 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를 트렁크에 태운 자동차가 마침내 성공적으로 핀란드 국경을 넘었을 때, 트렁크 속에서 웅크리고 있을 올레크를 위해 요원들이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를 틀어주는 장면은, 때론 영화보다 현실 속 사람들이 더욱 극적인 행동들을 한다는 진부한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그의 말년의 삶이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영웅 대접을 받았지만 외로웠다. 근본적으로 스파이는 자신의 삶의 일부분을 언제나 거짓으로 채워야 하는 사람이다. 영원히 자신과 자기가 아끼는 사람들을 거짓으로 대해야 한다. 한 때 그의 동료였던 사람들, 그를 사랑했던 친구들과 가족들은 그의 배신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이해하려 애써본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와 완전히 관계를 단절하거나 주기적으로 분노했다. 아내와 딸은 끝내 그의 선택을 완전히 인정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실천했다. 그 점은 존경한다. 하지만 그는 내게 미리 묻지 않았다. 나를 휘말리게 만들면서 내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다. 선택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나를 구원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애당초 나를 그 구렁텅이에 밀어 넣은 사람이 누구인가? 그는 이 부분을 잊어버렸다. 사람을 발로 차서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고는, 손을 내밀면서 "내가 널 구했어!"라고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는 정말 지독히 러시아적인 사람이었다. (530, 레일라 고르디옙스키)


스파이에게 비난과 예찬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분리할 수 없이 동시에 들러붙는다. 그의 충성심은 언제나 의심의 대상이다. 배신은 언제나 처음이 어려울 뿐이다. 배신당한 이들이 피의 복수를 원한다는 건 그에게 저유를 박탈하는 좋은 핑계다. 외로움이 또다른 배신의 계기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외로움만이 그에게 새로운 조국이 제공할 수 있는 전부다. 또 다른 배신은 가차없는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을 알았을 것이면서도 그는 자신의 도덕적 신념에 맞는 행동을 선택했다.


애초에 신념으로 시작한 일이므로, 그 끝도 신념일 것이다. 단지 방향이 달라진 것일 뿐. 기질적으로 냉소를 품고 사는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삶이다. 하지만 올레크가 KGB에서의 일에 부푼 희망을 가졌던 것과 비슷하게, 나는 그들의 삶에서 느껴지는 어떤 역동성을 부러워한다. 무언가에 헌신하고, 신념을 갉아먹히고, 공포와 고뇌에 시달리는 삶을 살아볼 가망이 없으므로 오히려 편안하게 즐겼다고 해야 하나. 시들어 갈 일이 없으므로 - 이미 시들었기에 - 사그라지는 신념의 불꽃을 멍하니 바리보는 일이 그럭저럭 괜찮았던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음을 되돌아보면, 우리는 얼마간은 스파이다. 냉혹한 첩보의 세계에 발을 디디고 있다는 소리가 아니라, 일상의 세계에서 우리도 고뇌를 겪으며 내가 속한 이곳에 대한 반란을 꿈꾸는 마음이 언제든 싹트는 게 인간이라는 것이다. 김영준이 <작가, 업계인, 철학자, 스파이>에서 “우리가 처한 어떤 보편적인 상황이나 삶의 특별한 국면에 대한 비유”(13)로서 스파이란 말을 정의하는 바와 같다. 스파이들의 고뇌는 일상의 고뇌로 손쉽게(위험하지 않게) 번안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손쉽게(위험을 고려하지 않고) 스파이에게 자신을 빗대며 그 삶을 그려보는지도 모른다.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일터에서, 원하지 않았던 경험을 하고 께름칙한 기분이 드는 일들을 견뎌내면서도 이 세계가 바뀔 것이라 믿으며 일하던 이들도, 어느날 불현듯 찾아오는 역겨운 결정에 직면하는 순간 마음 속 잠들어 있던 스파이들이 첩보망을 구축하기 시작할 것이다. 대부분 그런 불경한 의도는 마음 속의 방첩기관들의 사전 검열에 걸려 사라지겠지만(“형씨, 밀린 대출금이 얼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드는 도덕적 고민들도 있을 것이다. 나의 성실함이, 세계를 조금 더 악화시키는 데 기여한다면 어떡해야 할까?


올레크가 반체제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1980년대에 소련에서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누군들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반체제가 아니었을까. 런던 레지덴투라의 직원 대다수도 각각 정도는 다르지만 반체제였다. 우리 모두 서방 국가에 사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반역자가 된 사람은 올레크뿐이었다.(531, 막심 파르시코프)


무엇이 '선'을 넘게 만들었을까? 넘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끝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넘지 않는 데에도 이유가 있는 만큼, 넘는 데에도 이유는 있다. 단지 그 둘은 영원히 화해할 수 없을 뿐이다. 책의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책의 제사로 쓰인 안톤 체호프의 문장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나는 이 글에서도 진실을 드러낼 수 있는가? 이곳은 나의 공개된 생활인가, 아니면 은밀하게 흘러가는 생활인가.)


자신에게는 두 개의 생활이 있다. 하나는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 수도 있고 알 수도 있는 그런 공개된, 상대적 진실과 상대적 거짓으로 가득 찬, 주위 사람들의 삶과 아주 닮은 그런 생활이다. 다른 하나는 은밀하게 흘러가는 생활이다. 우연히 이상하게 얽힌 어떤 사정에 의해 그에게 소중하고 흥미로우며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 그 속에서라면 그가 진실하고 또 자신을 속이지 않아도 되는, 그의 생활의 핵심을 차지하는 그런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없다.(안톤 체호프,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열린책들,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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