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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학준 Jun 17. 2024

나의 '관심영역'

조나단 글레이저, 존 오브 인터레스트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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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의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봤다. 영화관에 좀처럼 올 일이 없었는데, 지친 몸을 이끌고 굳이 영화관에 가는 수고를 들이고 싶은 영화였다.


제목이 중의적이라고 생각했다. 독일어로 'Das Interessengebeit'는 아우슈비츠 주변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폴란드인들로부터 토지를 몰수하고, 아우슈비츠에서 노역을 하는 포로들에게 생산을 맡겨 막대한 이득을 거두는 땅, 그것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라는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관심과 흥미의 영역을 가리키는 말로 읽히는 것도 같았다. 담벼락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이 사택에서 벌어지는 일들에만 관심을 두는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이지 않은가. 수용소 포로들로부터 강탈한 코트를 두르고, 화장품을 바르며 회스 부인이 뽐내는 모습에서 우리는 끔찍함을 느낀다. 다만 경계할 것이 있다면, 그곳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이 순전히 무관심의 탓이라 말하는 거다. 영화가 다루는 이들은 그곳에서 벌어진 수많은 악들 가운데 아주 일부분의 행태만을 대변할 뿐이다. 영화가 초점을 맞추는 악이 전부가 아니다. 무관심해서, 아우슈비츠가 생겨난 건 아니다.


영화는 잔혹한 장면들을 보여주지 않는다. 정확히는 시각 정보로 제공하지 않는다. 창백한 높은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수용소 건물들은 단지 흘러가는 배경일 때에만 등장한다. 아우슈비츠를 이야기하면 흔히 떠올리는 가스실은 화면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효율적'으로 가스실을 돌리기 위한 건설 책임자들의 대화, 수용소를 관리하는 회스의 전화 통화에서만 때때로 존재가 드러난다. 잔혹한 역사는 끊임없는 소음으로 관객들에게 제공된다. 끔찍한 비명 소리들이 영화 음악의 자리를 대체하고, 관객들은 그 소리가 깨끗한 담장 너머로부터 들려온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평온하고 아름다운 사택 저편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미루어 짐작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더' 윤리적인 재현인가? 소리를 통한 재현이, 시각적 재현보다 덜 끔찍한가? 오히려 시각적 정보를 제한함으로써, 더욱 자유롭고 노골적인 관객의 상상에 기대도록 하는 건 아닌가? 관객들은 역사를 알고 있고, 수용소의 이미지는 이미 우리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 대답과 관심을 허락하지 않는 높은 담벼락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아리아드네의 실처럼, 우리를 저마다의 가장 끔찍한 수용소로 데려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의도에 충실하게 끔찍한 상상을 해내고 만다. <카포>의 트래블링 숏에 비하여 우리는 조금 더 나아갔을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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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에 대해 무엇인가를 보여주지 않는 방법을 통해 재현의 윤리를 획득하려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다. 네메시 라슬로의 <사울의 아들>에서 감독은 아우슈비츠의 비극에 대한 총체적이고 조감하기를 거부했다. 종횡비가 제한된 화면에서 관객이 참극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극도로 제한적이다. 카메라는 분주히 움직이는 사울의 얼굴을 굉장히 가까이, 오래 따라다닌다. 사울이 무엇인가를 보고 짓는 표정, 그리고 흐릿하게 보이는 배경, 그리고 끔찍한 일들을 증언하는 소리들만이 단서가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의 전말을 완전히 알기란 불가능하다. 그에 비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조금 더 대중적인 시선을 택한다. 모든 것을 거리를 두고 내려다보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회스 부부를 지켜본다. 무엇인가를 안 보여주기 위해서라기엔,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꼭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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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끔찍한 존재인지 드러내는 데 집중했다. 그래서 인간성을 상실한 존재들처럼 보이는 이들이 얼마나 우리와 닮아 있는지를 드러내는 장면들이 많다. 강가에서 벌어지는 말다툼도 맥락을 빼고 보면, 간신히 타지에 정 붙이고 자리를 잡은 아내와 갑자기 상의도 없이 새로운 곳으로 출장을 간다는 남편 사이의 투닥거림이다. 단지 그 정 붙인 타지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사택이고, 남편이 그 수용소의 관리 책임을 지는 사람이라는 것 뿐. 우리도 귀를 열기만 하면, 영화 속 끊임없이 들리는 비명을 현실에서도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평온한 삶도 단지 적당히 눈감을 때에나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지. 물론 이런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소시민들이 자신을 회스 부부와 동일시하기란 난망한 일이지만 말이다. (에이, 내가 뭐 얼마나 나쁜 사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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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같은 장면은 다르게 반복된다. 영광스러운 '청소' 업무를 맡은 회스는 파티에서 빠져나와 계단을 내려가다 갑작스럽게 멈추고 구토를 한다. 마치 몸이 마음과 달리 자연스럽게 거부반응을 일으킨 것처럼. 그도 사실 자기가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건 아닐까? 뒤이은 장면들은 이런 자연스러운 의문들을 간단히 무너뜨리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갑자기 영화임을 멈추고, 다큐멘터리가 된다. 박물관으로 바뀐 수용소 건물을 청소하는 사람들을 촬영한 다큐멘터리 영상이 삽입되고, 카메라는 수용소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유류품을 건조하게 담는다. 그리고 다시 갑작스럽게 회스가 계단을 내려간다. 그리고 아까 구토를 했던 그 곳에 멈췄다가, 이번엔 아무 일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구토는 무엇이었을까?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필사적으로 바라던 장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도 최소한 부끄러움을 안고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의 몸이라도 그의 행위에 대한 거부 반응을 드러냈으면 하는 소망을 반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토도 대답도 없이 그림자가 되는 두 번째 계단 내려가는 장면은 그런 소망이 부질없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이 장면에서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의 구토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안와르는 자신이 한 짓을 정면으로 대면하고 그게 무엇이었는지를 알고 구토했다. 회스는 끝내 알지 못했다. 그가 바라본 어두운 심연의 끝에 박물관은 있었지만, 그의 눈엔 보이지 않았다. 그는 구토한 적조차 없다. 단지 우리가 바랐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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