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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처음과 끝 사이의 거리

무라카미 야스히코, 객관성의 함정 (2025)

by 오학준


무라카미 야스히코의 '객관성의 함정'(김준 옮김, 문학수첩, 2025)을 읽었다. 그는 자신이 참여한 의료 현장, 빈곤 지구의 육아 지원 현장에서 이루어진 인터뷰를 수업 교재로 활용할 때 종종 학생들에게 받았던 질문으로 책을 시작한다. "교수님이 하시는 말씀에 객관적인 타당성이 있나요?"(7) 인터뷰를 업으로 삼고 있는 나와 같은 사람들은 이미 체득하고 있는 바이지만, 인터뷰는 과장과 축소, 비일관성으로 포장되어 있다. 날것의 인터뷰 그 자체가 '객관성'을 획득하고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기에 타당한 질문일 수 있다. 하지만 반문할 수 있다. 소위 '객관성', 혹은 '수치화된 증거'라는 게 정말로 전부인가?


작년에 읽었던 기시 마사히코의 '망고와 수류탄'(정세경 옮김, 두번째테제, 2021)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 책에 대한 독후감에서 나는 자료화와 소설화 사이의 중간의 길을 찾으려는 한 사회학자의 고민과 나의 고민을 겹쳐본 적이 있다. 구체적이고 개별적이며 비교 불가능한 개인적 경험들을 추상적인 수치로 환원하려는 힘에 저항하는 동시에, 그러한 개별성에만 매달려 그 개인들이 머무르며 만들어가는 구조로서의 사회를 지워버리려는 힘에도 저항하는 것이 인터뷰의 목표이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인데, 이 책도 비슷한 사고의 결 위에 있으리라 생각하게 된다.


'객관성'이라는 단어가 대중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건 19세기 중반 정도라고 한다. 물론 이때의 객관성이란 인간 외부의 실재의 재현보다는 그러한 객관을 인식하는 데 방해가 되는 주관성을 어떻게 통제해야 하는지를 다루는 '윤리적' 문제에 가까웠다. (오히려 18세기까지 과학적 활동의 핵심 구성요소 중 하나가 과학자의 주관성에 근거한 판단과 해석이었다.) 즉 어떻게 인간이 관찰에 있어서 최대한 개입하지 않을 수 있는가가 과학자들의 중요한 고민이었고, 그 결과 인간의 증언 대신 기기의 측정이 더 '과학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예컨대 19세기 이후 과학자들은 더 이상 '도판'이 아니라 '사진'을 더 중시했는데, 그 당시 화질을 생각하면 도판이 더 '상세'함에도 불구하고 사진이 인간의 개입이 훨씬 '덜'하기에 객관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진 기술 덕분에 객관성이 중요시된 게 아니라 기계적인 객관성을 지향하는 요청이 먼저이며, 사진은 그 요청 때문에 중요한 수단이 된 것이다. (...) 사진이라는 기계를 얻음으로써 '인간에 대한 판단에서 해방된 표상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28-29)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찰과 측정은 언제나 '오차'에 오염될 수 있다. 현실 세계의 변화무쌍함을 온전하게 통제하고 언제나 같은 결과를 측정하거나 관찰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방정식과 논리식은 인간의 감각이나 측정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측정하는 사람과 무관하게 일정한 결괏값을 내놓지 않는가? 법칙은 인간을 배신하지 않는다. 법칙은 개별적인 연구자의 의식으로부터 자유롭다. 그 대가는 예측가능성이고, 반대급부는 "객관성을 탐구하는 일에서 자연 그 자체는 과학자의 손을 벗어나고 수치화된 자연만이 과학자의 손에 남는다."(31)는 사실이다.


사회 역시 자연과 같이 법칙이 지배하는 객관적 사물이 된다. 사회학의 창시자 중 하나인 에밀 뒤르켐은 어느 정도 균질적인 집단이 지닌 '행위, 사고 및 감각의 양식'을 사회의 특징이라 보고, 이 양식이 집단에 속한 개인에 어느 정도 강제력을 발휘한다고 본다. 이 사회는 개인의 주관으로부터 독립된 사실이자, 측정을 통한 통계의 축적으로 그 경향성을 파악할 수 있다. 이로부터 사회는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되는 객관적 사물로 취급되는 것이다. 저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역사, 그리고 인간의 경험 그 자체도 객관적 서술의 대상이 되었음을 지적한다. 이 과정에서 버려지는 것은 구체적인 경험의 소거다.


구체적인 경험을 소거하고, 모든 대상을 숫자로 환원하는 행위는 거스르기 어려운 근대 학문의 흐름이다. 저자는 묻는다. "애초에 '인간을 수치화해서 비교함으로써 우리가 대체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를 물어보고 싶다."(59) - 물론 나는 이 책에서 가장 튀는 부분이 이곳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이 수치화 및 서열화의 폐해를 설명하고 비판하는 3장을 건너뛴다고 해서 그 뒤의 장을 이해하는 데 문제가 될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서 우회로를 선택한다는 느낌이랄까. - 우리는 모든 행동을 수치화하고 기록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학업성적에서부터 업무실적, 국가의 재정, 방문한 음식점의 별점 등등 우리의 모든 행동을 스스로 기록하고 데이터로 모아둔다. 그리고 그러한 데이터들로 이루어진 통계가 우리의 행동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믿음을 은연중에 지니고 있다.


하지만 통계는 우리에게 도움만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통계에 기반해 우리의 행동을 제약하기도 하고 - 이것은 통계상 위험하므로 하지 말 것, 통계상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하지 말 것 - 우리의 경험을 일축해버리기도 한다 - 통계상 무시할 수 있는 예외적 반응이므로 중요하지 않다라든지. 저자가 이 장에서 갑작스럽게 '리스크'를 이야기하려는 건 통계를 통해 메이저리티와 마이너리티를 나누고, 메이저리티를 위한 정책이나 결정을 당연한 것, 옳은 것으로 여기는 태도를 비판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즉 "애초에 통계는 세계의 리얼리티와 관련해 어느 정도 경향을 나타내는 지표로 인식되었지만, 점차 통계를 세계의 법칙 그 자체인 것처럼 인식하게 된 것이다. 통계는 사실에 가까운 근사치가 아니라 사실 그 자체의 위치를 획득했"(65)기에, 통계에 기초한 메이저리티 중심의 편향 역시 정당성을 획득한 것처럼 여기는 풍조에 대한 비판을 진행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장은 여전히 정교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수치와 통계가 우선시 되면, 인간을 '생산성'에 따라 구분하는 것도 정당한 것처럼 여겨진다. 물론 그 생산성의 비교 추체는 국가나 조직이다. 국가나 조직에 도움이 되느냐 되지 않느냐에 따라 인간은 서열이 매겨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서열화의 말단에 서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의 '생산성'을 높이려는 시도들에 매진한다. 소위 '자기 계발'은 언제나 수치화된 결과의 향상을 목표로 삼는다. (예전에 읽었던 서동진의 '자유의 의지 자기 계발의 의지'(돌베개, 2009)를 떠올리게 한다.) 건강할 것, 리스크를 회피할 것, 그리하여 국가/조직의 생산성에 보탬이 될 것이라는 요구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능력의 측정과 구별은, 이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자들을 격리, 배제하고 혐오하고 마침내 절멸시켜야 한다는 '우생학적' 태도에 대한 정당화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들을 구체적 '인간'으로 대하기보다, (내가 속한) 사회에 부담이 되는 '손해'로 대하고 이를 '교정'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는 식의 인식 말이다.


"사실 배제의 선이 어디에 그어져 있는지는 정해진 것이 아니며, 어느 정도 정치 및 경제적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정치 및 경제에는 얼굴이 없다). 수치로 사회가 서열화되는 한 다음 차례엔 내가 배제될지 모른다."(96)


그러면 어떻게 '얼굴이 사라진' 사회에 대항할 수 있는가. 저자는 첫 번째로 이야기를 소중히 하길 요구한다. 개인의 경험을 말하는 즉흥적인 이야기 안에 보존된 생생하고 구체적인 체험이야말로 대항의 주요 수단이다. 그들의 구체적인 체험은 우연성의 결과이며 대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저자는 이 고생의 경험을 최대한 '들은 대로 기록'하기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화자 특유의 말버릇, 착각, 실수에 "경험의 주름과 복잡함이 표현"(105)되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는 한 인터뷰 화자가 '보통'과 '당연한'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사례를 통해 화자가 자신이 처한 세계와 어떻게 관계 맺고 있었는지를 분석한다. 무엇을 '보통'이라고 생각하는지, 무엇을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는지를 통해 그의 생각의 변화나 삶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는 구체적인 말실수나 습관 같은 디테일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여전히 객관적인 데이터들을 참고해 인터뷰 화자의 상황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긴다. 그럼에도 그러한 수치적 데이터가 반드시 "개별 인생의 구체적인 폭과 복잡한 경험을 이해할 때에야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118)고 본다. (덧붙이면 저자는 이렇게도 말한다. "인터뷰는 사건 혹은 인생 전체의 요약이며 생략이자 근사치에 불과하다. 말하지 극히 어려운 경험을 굳이 말로 하는 것이다."(123) 인터뷰는 언제나 경험의 일부일 뿐이기에, 말해지지 않는 것도 인터뷰 화자의 삶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임을 놓치지 않는다. 인터뷰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종종 놓치는, '말'을 직업적으로 다루는 모든 사람들이 놓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떻게 경험의 생생함을 '포착'할 것인가? 그는 '경험 내부에 시점을 두는 사고법'을 제안한다. 이것은 단순히 '주관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아니다. 숫자를 버리자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경험이 갖는 개별성과 무게를 중시하자는 것이다. 그는 이런 방식을 제안한다.


1)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을, 반복이나 착각 등도 포함해 가능한 한 존중해서 재록(再錄)할 것. 그렇게 함으로써 당사자의 신체성 및 개별성이 보존된다.
2) 이야기의 문맥을 중시하기 위해 오직 한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인용하여 논문화할 것(여러 명의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토픽별로 정리해서 인용하지 말 것).
3) 이야기의 디테일을 존중하는 분석을 행할 것(외부에서 가져온 이론이나 개념 도식에서 빌려온 설명을 적용시키지 말 것).
4) 분석하는 연구자 자신이 어떤 사회적 입장에 있는지, 이야기하는 사람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음미할 것. (167)


그는 단순히 개별의 경험을 그려내는 것만이 아니라 이를 그 구조와 배경과 함께 그려내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별적 경험의 존중은 결국 아무도 외면당하지 않는 세계를 지향하는 일과 이어진다고 본다. 이것은 그에게 단지 기술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윤리적' 문제다. 개별 경험을 구원함으로써 그곳에서 어떤 보편적 이념을 찾아내는 일, 그가 마지막에 발터 벤야민의 '독일 비애극의 원천'을 인용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 귀결이지 않은가 싶었다. (물론 여기까지 오려면 나는 더 많은... 논의의 단계가 있어야 했다고 생각하지만, 일본 대중 교양서의 장점이자 단점이 그것 아니겠는가. 백스테이지는 보여주지 않고 오로지 조명이 비친 무대만을 보여주는 방식의 서술. 물 흐르듯이 읽히지만 뜯어가며 읽다 보면 불충분한 설명들로 들어찬. 그리고 한참 다른 참고문헌을 찾아보고 돌아오면 이해가 되는 그런...)


마지막 장, 즉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에서 출발하는 사회를 만드는 일, 그런 사회를 모델로 하는 탄탄한 제도를 생각하는 일"(200)을 다루는 부분에 대해서는 나로선 별달리 덧붙일 말은 없다. 앞선 이야기들과는 조금 궤가 다르기도 하거니와 짧은 분량 안에 담기에는 버거운 이야기들이 나열되어 있다. 좋다 싫다를 떠나서 이 정도의 서술만으로 이 내용의 적당함을 따지기엔 부족해 보인다. 돌봄을 중심축으로 하는 사회의 재구성을, 앞선 논의들을 통해 떠올릴 수는 있지만 필연적 귀결인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물론 "개개인의 이야기와 경험을 존중하는 사고법을 사회적 실천으로 확대하고 실현한 사례"(182)로서 언급한 오사카시 니시나리구의 사례를 읽어두는 건 나쁘지 않다. ("중층적인 아웃 리치로 돌보아주고 돌봄을 받는 것, 여러 곳의 거처를 이용할 수 있는 것, 이런 장소가 성숙했을 때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는 것"(199) 자체가 좋은 교훈인 것과 별개로, 이것이 처음 책을 시작한 질문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도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결론이 좀 멀리 가긴 했지만(처음 책을 펼쳤을 때 이것이 결론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인터뷰가 업인 사람 입장에서 새겨들어야 할 구절들을 마주했다는 것만으로도 독서의 가치가 있었다. 특히 요약해서 말할 수 없는 5장과 6장의 구체적인 분석 기법들의 경우는, 책을 읽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기도 하니. 평탄하지 않은 말의 표면을 더듬어가며 구체적인 삶을 포착해 내고, 그 삶과 세계가 연결되는 구체적인 방식에 주목하고, 그리하여 그의 삶을 사회로부터 고립시키지 않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게 인터뷰하는 사람의 덕목과 윤리가 아닌가. 매번 배워도 부끄럽고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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