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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사랑의 약속

주세페 토르나토레, <시네마 천국>

by 오학준


* 스포일러가 있다. 그런데 나온 지 40년이 넘었으면 스포일러가 중요하냐...


<스탑 메이킹 센스>를 보고 나선 새로 나온 영화 가운데엔 보고 싶은 게 없어서, 소파에 앉아 예전 영화들을 봤다. 영화를 고르는 게 가장 어려운 시간인데, 아내가 뜬금없이 <시네마 천국>을 보자고 했다. 스트리밍 플랫폼을 뒤져봐도 없다. 여기도, 저기도, 하다가 찾은 게 개별구매였다. 플랫폼이 우리의 영화 관람의 폭을 넓히는 게 아니라 제한하고 영원히 고전과 우리의 관계를 차단하는 건 아닌지 투덜대면서 급히 결제버튼을 눌렀다. 버전은 오로지 인터내셔널판 뿐이라, 영화 막바지 엘레나와의 재회 장면이 통으로 빠져 있다. 하지만, 나는 없는 게 더 낫다고 여기는 쪽이라.


나온 지 40년도 넘었고 내용도 워낙 유명하니, 굳이 스토리를 설명할 이유는 없겠다. 그래도 한 줄로 말하면, 한 성공한 영화감독의 성장기 또는, 소년과 할아범의 우정(혹은 애정)에 대한 이야기다. 플롯은 단순하고, 소리는 화면과 종종 어긋난다. 영화는 낡은 이불에서 흩날리는 먼지처럼 종종 관람객인 나와 아내에게 재채기를 유발한다. "후시녹음 영... 감정이 안 사네..." "화면 전환이 좀 구태의연하구먼?" 물론 기침이 잦아드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어느새 조용해졌고, 다시금 훌쩍거렸다.


어디서부터 울었더라, 처음 울먹거린 건 알프레도가 영사실에 다시 찾아왔을 때였다. 정확히는 알프레도가 토토의 얼굴을 쓰다듬을 때 소년에서 청년으로 바뀌는 장면. 그러니까 그 사이에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지만, 알프레도에겐 여전히 걱정되고 어린 소년이었던 거겠지. 어디로 튈지 예측이 안 되고, 매번 쫓아내지만 금세 영사실로 돌아와 끊임없이 주절대는 아이, 아버지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묻고 그를 닮았다던 배우의 포스터를 보고 미소 짓던 아이. 그런 아이에게 자신과 같은 삶을 반복하게 하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손끝으로 얼굴을 더듬으며 그날의 화재에서 토토가 털끝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했음을 알고 안도했을지도 모른다. 혹시나 자기가 걱정할까 주변 사람들이 토토는 무사하다고 거짓말했을 수도 있으니까. 자신에게 남은 이 화상이 토토에겐 없다는 것은 그러나 이곳에 오래 머무르면 이 상처가 토토의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함께 한시바삐 그를 이곳에서 내쫓기로 마음먹게 된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너는 나처럼 되지 않을 수 있다, 아직까지는.


네겐 아직 희망이 있단다, 토토.


알프레도는 토토에게 끊임없이 여기가 네 장소가 아님을 말한다. 여기를 떠나고, 향수에 젖어 고향을 돌아보지 말고, 우리의 부름에 응답하지도 말고, 그곳에서 만난 것을 사랑해서 거기서 살아가기를 부탁한다. 자식만큼 아꼈던 아이와의 영원한 이별을 요청하는 사랑을 하겠다는 건데, 토토도 만만치 않은지 그 사랑에 응답한다. 30년이 넘게 돌아가지도, 연락을 받지도 않았으니. 어디선가 반복한 닳고 닳은 클리셰 같은 사랑, 그렇지만 매번 이런 잔인한 사랑에 매번 나는 속으며 운다. 그런 거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존재라서 그런가.


신부님, 과거의 사람이 보여주는 때늦은 사랑. 나는 그 사랑도 가끔은 그립다.


그런 그가 알프레도가 죽었다는 말에 - 사실 그것마저 알리지 말라고 했던 알프레도는 참으로 토토를 사랑했었던 것인데 - 3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다. 그리고 돌아와서 자신의 유년시절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극장이 철거되는 모습을 본다. 그곳엔 떠나간 알프레도와의 우정이 있었고, 영화를 사랑한 자기 자신의 유년기가 있었고, 함께 했던 마을 사람들과의 연대감이 있었다(광인이 영화 내내 '광장은 내 것이야'라고 말하던 목소리가 차츰 줄어드는 것은 그 모든 것들의 소멸과 맞닿아있는지도 모르지). 잘려나갔지만, 강렬했던 첫사랑의 기억도 거기에 있었고.


그 모든 것이 무너질 때, 폐허 속에서 극장을 일으켰던 시치오의 회한에 찬 미소를 보며 또 펑펑 울었다. 그는 외지인이었지만, 마을의 유일한 극장이 불에 타버렸을 때 자신이 번 돈으로 미련 없이 극장을 다시 세웠다. 그가 없었다면 알프레도와 토토 모두 불타버린 과거의 폐허 앞에서 후회를 곱씹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렇기에 토토가 알프레도의 관을 운구하던 행렬에서 그를 보고, 다른 사람들을 지나쳐 그의 옆에 서게 된 것인지도 모르지. 나의 첫 사장님이었지 않느냐며. 그것은 단순히 그를 고용해서 먹고살게 해 주었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후회하며 폐허를 끌어안고 살았을지도 모르는 - 화재는 그들의 자비에서 시작되었으므로 - 두 사람을 다시 일상으로 구원해 주었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얼굴에서 파울 클레의 <앙겔루스 노부스>를 떠올릴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그의 또 다른 자비가 끝내 누구에게도 구원받지 못하고 철거되어 빈 땅이 되고야 말았을 때 시치오는 깨달았을 것이다. 과거 신부와 동네 사람들의 절망을 자신이 구원했다면, 이제는 자신의 절망을 누구도 구원하지 못할 것임을. 먼지바람 너머로 비치는 우는 듯 웃는듯한 그 표정은 어쩌면 이 영화의 두 번째 표정인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 표정은, 단연코 마지막 영화관에서 머리를 감싸 쥔 토토의 얼굴이겠으나.


최고의 감독이 어쩌면 가장 가까이 있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던 건 아닐까.


살다 보면 알지 않는가. 약속이라는 걸 오래 간직하고 지키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다시 돌아오지 말라는 약속을 지키는 쪽도, 죽어도 부르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맘 약한 어머니가 끝내 자신의 부고를 전달해 그가 오고야 말 것임을 알아서, 오래전 맡아 놓았던 그의 필름들을 끝내 돌려주고야 마는 쪽도 얼마나 단단한 사람들인가. 그 단단한 약속은 낡고 헝클어진 잔해들 속에서 빛을 내뿜는다. 누가 나에게, 그리고 내가 누구에게 그렇게 지나가듯 말한 사랑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잘려나간 유년기의 기억을 다시 이어 붙인 필름은 어쩌면 고향으로부터 도망쳐 잘려나간 자신의 유년기를 자신의 삶으로 다시 통합시키게 만드는, 알프레도의 선물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선물은 예상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 아니다.


너의 소문을 듣고 싶다는 말만큼 심장 떨리는 사랑 고백이 있으랴.


그러니, 알프레도만큼 훌륭한 영화감독이 있는가. 그는 잘려 있는 토토의 삶을 - 감독판에서 그는 로마에선 토토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활동한다는 사실을 털어놓지만 - 하나로 연결해내고야 만다. 그리고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찾은 토토는 '상실'이 아니라 '추억'으로서 과거를 남겨두고 다시 로마로 떠날 수 있다. 어제는 어제, 내일은 내일. 정말 말 그대로 이곳의 시간은 알프레도의 유작과 함께 '끝났다'. 언제나 똑똑한 건 토토였지만 ("넌 내 친구가 되기엔 너무 영리해") 영화감독으로선 알프레도가 더 위였는지도 모르겠다. 말 대신 이미지로, 그리고 사랑으로 그를 결국 앞으로 계속 나아가게 만들었으니.


내 스스로 버린 것들을 주워 담아 끝내 나의 삶이라는 필름을 돌아가게 만드는 사람들, 그런 사랑들이 아니었다면 삶은 얼마나 부박하고 단절적인가. 한편으로는 아주 보수적인 사랑이지만, 그렇기에 가끔씩 그런 사랑이 주는 온화함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 아닌가 싶고. (그런 사랑이 솔직히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이제 곧 다가올 새로운 가족에게, 나는 그 아이가 잘라서 버려놓은 기억의 필름들을 주워다가 끝내 가져다줄 수 있을런가, 나는 그런 사랑을 줄 수 있을지 하는 생각이 들어 옆을 돌아보니 아내도 눈물 방울이 그렁그렁했다. 아니 자기가 보자고 해놓고서는 이렇게 울 일인가, 아니 근데 마지막 엔딩 크레디트가 잘 안 보이네, 초점이 왜 이리 안 맞나, 눈에 뭐가 들어갔나 자꾸 시큰거리네... 나이를 먹으니 사람이 보수적으로 변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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