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어쩔 수가 없다
박찬욱 감독의 <어쩔 수가 없다>을 보았다. 연휴 간 영화 세 개를 연달아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더라.
대체 불가능한 부품이 되기 위해 싸우지만 끝내 퇴역될 부품이 되어버리는 노동자들 사이의 피 튀기는 소모전이 중심이다. 그 앞뒤로 중산층이 이루어놓은 안정이 기초하는 시체들이 무엇인지를 불편하게 조명하고, 아내가 하자는 대로 하지 않는 중년 남성들이 자초하고 마는 비극을 조롱한다. 자기와 닮은 - 대체 가능한 - 존재들을 지워버림으로써 끝내 완벽히 자아를 삭제하여 ‘부품’이 되는 데 성공하는 유만수에게 완전히 감정을 이입하기도, 그렇다고 거리를 두기도 어렵다. 이것은 단순히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내가 혹은 나의 가족이 벌이고 있는 잔혹극이며, 더 나아가서는 대한민국의 국민적 차원에서 대물림되고 있는 생존법칙에 대한 조소이기 때문이다. 봉준호가 <기생충>에서 성공적으로 지운 불편한 자국들을 박찬욱은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유만수는 성공한 노동자다. 교외에 번듯한 집이 있고, 이상적인 핵가족의 가장이다. 자신과 아내의 비싼 취미도 유지하고, 자녀의 교육을 위해 적절한 비용도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분재, 테니스, 첼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있어도, 그것이 돈 드는 취미와 돈 드는 예체능 계열의 교육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관찰자로서 그의 가족은 꽤나 탄탄한 기초를 지니고 있다. 유만수에게 이 성취는 흔들릴만한 구석이 없다. 그렇기에 자신 있게 ‘와라, 가을아’라고 외칠 수 있다. 계절이 변한 들, 이 행복이 사라질 리는 없다, 그것이 유만수의 믿음이다. 자신의 성취에 대해 공정한 보상의 결과이므로.
계절이 바뀌면서 그의 믿음의 기초도 흔들린다. 그가 행복하게 구웠던 장어는 일종의 인덱스였다. 너를 자르진 않을 테니 널 대신해서 잘려나갈 사람들을 고를 기회를 주겠다는, 새로 인수한 외국계 기업의 신호. (+ 댓글처럼 장어는 사실 그도 찍혀나가는 정리해고 대상임을 알려주는 신호라는 해석이 좀 더 매끄러워 보인다. 그가 동료를 지키겠다는 연설과 허세는 어떻게봐도 우스꽝스럽다.) 그는 동료들을 버릴 수 없다고 믿는다. 노동조합을 포기한 대신 완전고용을 약속했던 과거 경영주와의 합의를 들먹일 새도 없이, 가지치기에 동의하지 않은 죄로 그 자신이 가지치기의 대상이 된다. 3개월의 유예기간 동안 가족의 씀씀이를 줄이고,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취업 캠프에서 자신감 회복 프로젝트에 참여하지만 그것뿐이다. 석 달이 지난 후의 유민수에게 남은 것은 빚을 갚으라는 최고장과 집을 팔아야만 한다는 아내의 폭탄선언이다. 그것만큼은 그가 포기할 수 없다.
굳이 아파트가 아닌 교외 단독주택을 사서 꾸몄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자기 집에 가지고 있을 애정과 자부심은 명료하게 드러난다. 한국 사회에서 환금성이 좋은 아파트가 아닌 형태의 주거지를 구입한다는 것은 사실상 돈을 버리는 행위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에게 아파트에서 산다는 것은 자기가 아끼고 공들였던 주택을 빼앗긴다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렇게 아파트에서 살 거였다면, 그 돈으로 아파트를 사서 가격이 올랐을 때 팔 걸! 나는 그렇게 돈에 목을 매는 사람이 아닌데,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속물’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건 유만수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자존감 상실이다.
물론 아내의 입장에서 그건 알 바가 아니다. 돈이 없으면 씀씀이를 줄이고, 집이 크면 줄이면 된다. 다시 회복하면 그만이다. 그녀에게 이 집은 분명 추억이 많고, 서로가 고생한 결과물이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가족보다 소중하진 않다. 비싸게 팔아서 빚을 갚고, 다시 재기하면 된다. 아이들 교육을 뒷바라지하느라 사실상 경력이 단절되어 있지만, 치기공사로 다시 근무해서 맞벌이를 하면 재기하는 게 큰 문제가 될까? 그렇기에 남편에게 반드시 제지회사로 돌아가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을 강하게 만수에게 밀어붙이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집안을 둘러싸고 있는 안정이 깨져버렸을 때 만수가 저지른 짓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만수에게서 술 냄새를 맡았던 미리는, 오래전 가정폭력의 기억을 불현듯 떠올린다. 술을 마시고 개가 된 유만수는 아이에게도 공평하게 폭력을 행사한다. (명료하진 않지만 그 폭력은 리원에게도 영향을 끼친 것처럼 보인다) 만수가 선출의 집에서 술을 마시자마자 고삐가 풀려버리는 모습을, 미리는 이미 오래전에 봤다. 만수가 제지회사로 되돌아가지 못하면 술을 다시 찾게 되는 상황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미리가 그 상황을 다시 겪느니, 차라리 현상을 유지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이라도 있다면 차라리 그걸 모른 체 눈감아주는 쪽이 낫겠다는 판단을 했을지도 모른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그건 우리 둘이 같이 한 일이라는 그 말은 미리에게도 이 가정의 외견적 평화가 그 무엇보다 중요했음을 실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별다른 해결책이 없었나? 따지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노동조합을 만들어도 되고, 제지회사가 아닌 곳에서 일을 시작해도 된다. 실직이 아니라, 실직에 대처하는 자세가 문제라는 이아라의 말은 구범모와 유만수의 변명을 관통한다. 그리고 그 말처럼 총알은 구범모를 관통한다. 이렇게 안 할 수는 없었을까? 유만수든 구범모든 뭔가 뒤틀려서 그런 건 아니다. 단지 가장 익숙한 방식의 삶으로 돌아가려고 애썼을 뿐이다. 하지만 그래서 뭘 지켰나? 한 아내는 남편을 (실수로라도) 죽였고, 한 아내는 남편의 범행을 묵인하고 공모하게 되었다. 유만수의 집에 울려 퍼지는 첼로 소리는 한 편으로는 희망이지만, 그 희망의 밑바닥에 묻혀 있는 고시조의 그로테스크한 육체는 언제든 발각의 위기에 놓여 있다. 미리도 이제 집에 묶여버렸다. 그들에게 다음 기회가 있을까?
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계속해서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고시조의 육체다. 사과나무 아래엔 범행의 흔적들이 묻혀 있다. 아들의 절도와 남편의 살인은 맛있는 사과로 영글어간다. 우리가 누리고 싶어 하는 그 평화와 안식의 뿌리엔 우리가 죽인 것들, 우리가 빼앗은 것들이 있다. 유만수는 아들의 범행을 없던 것으로 돌리기 위해 아들의 마음을 다잡기 위한 이야기를 꺼낸다. 유만수의 아버지가 베트남전에서 전리품으로 가져온 권총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가 권총을 가져온 건 그가 먼저 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살았으며 역으로 내가 먼저 쏴야 산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그랬다는 거다. 아들에게 자신이 범행을 주도한 게 아니라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네가 모든 것을 뒤집어쓰게 된다는 엄포를 놓는 것이다.
국가의 성립 직후 발생한 잔혹한 내전은 먼저 총을 겨누고 쏘는 것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된다. 공동체보다는 내가 먼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신자유주의의 광풍 이전부터 이미 대한민국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자리는 하나뿐이고 사람이 넷일 때, 자리를 늘리는 구조적인 대응보다 사람을 죽여서 내가 들어가겠다는 개인적이고 저열한 폭력을 택하는 건 단지 신자유주의적 인간관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사고가 아니다. 이미 우리에겐 그런 ‘공동체’가 없었다는 게 감독의 입장은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이 나라의 중산층들에겐 모든 순간이 전시 상태다. 언제든 서로가 만들어 낸 안락한 장소가 붕괴할 수 있을 만큼 얄팍한 근거 위에 서 있고, 누구든 무너뜨리면 달려들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에서 내가 먼저 총을 집어 들지 않으면 상대가 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진리로 작동한다.
그러나,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고 해서 유만수의 편에 설 수도 없다. 그가 선출을 죽이는 건 아무런 이유가 없다. 빈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것도 아닌, 단지 나의 자리를 빼앗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죽이는 것, 그러면서 앞선 두 사람을 죽인 것이 개죽음이 되면 안 된다는 개소리를 늘어놓는 것, 우발적으로 죽이는 것도 아니고 사고로 위장하면서 치밀하게 흔적을 지우는 것, 이 것들까지 ‘어쩔 수가 없다’고 동조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영화가 굳이 선출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가는 건, 관객으로 하여금 어느 쪽에도 마음 둘 곳이 없게 만들려는 시도다. 마음속에 있는 유만수를 깨워낼 것인가? 그랬다간 이 영화처럼,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을 걷게 될 거다. 하지만 외면할 수 있는가? 내가 발 디디고 서 있는 이 부와 명예, 그리고 편안함의 뿌리엔 외면한 죽음이 있다. 아니라고? 그럼 지금 당신의 앞마당을 같이 파보도록 하자. 나는 내 앞마당에서 ‘시체’를 발견했다.
아쉬운 점. 차라리 대중적으로 더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싶었다면 적어도 <헤어질 결심>만큼만이라도 형사가 진상에 더 가까이 갔어야 했다.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느낀 건, 서스펜스가 조금 부족했다는 거다. 범행을 저지르는 사람은 자신을 뒤쫓는 형사, 가까이서 나를 지켜보는 가족, 그리고 범행의 대상에게 자신의 마음이 들킬까 봐 걱정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가장 약한 건 형사 쪽에서 오는 서스펜스라는 생각이었다. 좀 더 진상에 다가갔다가 오해해 버리는 방법은 없었을까. (하지만 그럴 수 없었겠지. 우리에게 불편함을 이런 방법으로 줄 필요는 없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