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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미정 Feb 03. 2021

28. 중요한 곳에 머무르기 <오월의 달리기>

- 책 모임《소녀들의 명작읽기》이야기

부모가 머무르면 아이도 함께 머무른다.


아이들과 산책하다가 새싹, 풀꽃, 달팽이, 지렁이 등 작은 생명을 만나면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아이를 데려와 한참을 들여다보고, 이야기 나눈다. 아이에게 그들의 살아있음을 보게 해 주려고, 그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들인지 느끼게 해 주려고. 부모는 그렇게 아이를 키운다. 아이에게 꼭 보여줘야 할 것이 있으면 가던 길을 멈춘다. 아이와 함께 앉아 살피고, 이야기 나눈다. 바삐 가던 부모가 멈추고 들여다보는 것을 보고 아이는 ‘아, 이게 중요하구나.’한다. 부모와 나눈 이야기를 마음에 담는다.


  나는 부모가 아이와 함께 책 읽는 일이 산책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부모는 책장 사이에서 책 한 권을 고른다. 아이가 꼭 만나보았으면 하는 인물과 생각해볼 주제가 있는 책, 아이가 느껴보았으면 하는 감정이 담긴 책. 그런 책을 골라 아이와 함께 읽는다. 아이와 책장을 넘기며 읽다가 어떤 장면, 어떤 문장에서 머무른다. 부모가 머무르면 아이도 함께 머무른다. 부모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이도 자세히 들여다본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눈, 작고 여린 것을 보듬는 마음,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자세 등. 부모가 아이 마음에 담고 싶은 것들을 슬그머니 건넬 수 있다.


  그런데 아이 둘이서만 이야기 나누면 자꾸 가르치고 싶어 진다.  “이건 이런 뜻이야, 이게 중요해”하고 일방적으로 일러주게 된다. 장면이나 문장에 지긋이 머무르지 못하고 얼른 책장을 넘겨 버린다. 이럴 때 친구들을 초대해서 함께 읽으면 좋다. 책 모임을 하는 거다. 아이 친구들 여럿과 함께 산책을 하면 도무지 빨리 걸을 수가 없다. 작은 곤충 하나라도 발견하면 아이들마다 한 마디씩 거들고, 함께 소리 지른다. 책 읽기도 마찬가지다. 여럿이 읽고 나누면 하나의 질문에 오래 머물게 된다. 한 아이의 말에 다른 아이의 말이 이어지니 끊을 수 없고, 아이들끼리 한바탕 노는데 어른이 끼어들어 가르치기 어렵다. 할 수 없이 기다리고 지켜보게 된다.


  아이 책 모임에서 어떤 질문으로 이야기 나눌까 고민될 때는 머물고 싶은 문장이나 장면을 정리해보면 좋다. 책의 주제가 드러나는 장면,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장면, 인물의 신념이 드러나는 문장. 아니면 그저 부모인 내가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드러난 장면이나 문장을 골라도 된다. 아이 손잡고 머물고 싶은 장면, 문장이면 무엇이든 좋다. ‘우리 아이가 책장 넘기기를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좋은 곳’을 고른다. 고른 장면이나 문장에 “이 장면을 어떻게 보았나요?”, “이 장면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나 느낌이 들었나요?”, “이 문장을 어떻게 보았나요?”, “이 문장의 뜻은 무엇일까요?”하고 물으면 간단하게 질문 몇 가지를 만들 수 있다.


<오월의 달리기> 함께 읽기


 《소녀들의 명작읽기》14회 모임 책은 <오월의 달리기>로 골랐다. 책은 5.18 민주화 운동을 다룬다. 주인공 명수는 달리기 국가대표선수가 되고 싶어 하는 평범한 소년이다. 전국소년체전에 출전하기 위해 열심히 운동한다. 그런데 ‘비상 계엄령’, ‘데모’ 와 같은 험한 말들이 소년과 친구들의 앞날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아이들은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가족을 잃고, 꿈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서로 의지하며 맞서고 견딘다. 끝내 살아낸다. 교과서의 한 줄 문장으로 담아낼 수 없는, 소중한 이야기다. 아이와 이 책에 머무르고, 이야기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오월의 달리기(김해원.푸른숲주니어)



장면과 문장에 머무르기


 <오월의 달리기>에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장면과 문장이 많다. 이런 책은 애써 어떤 질문을 만들지 않아도 좋다. 한 장면에서 인물이 느꼈을 감정을 읽고, 지금 우리와 연결된 부분을 찾고, 아이들 마음에 어떤 울림이 느껴지는지 나누면 족하다. 역사 공부는 단순한 지식 암기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개인의 삶을 알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 읽으며 아이들이 그해 5월 광주에 살았던 아이들의 삶을 온 마음으로 느꼈으면 하고 바랬다. 뭔가를 가르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책 읽으며 표시해둔 장면과 문장 몇 가지를 질문으로 만들었다.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내용은 책의 부록에 잘 정리되어 있어서 아이들과 챙겨 읽었다.)



 명수의 마음에 머물기  


 [질문1] 명수는 전국 체전 참가를 위해 합숙훈련을 합니다. 훈련 중에 양동시장을 지나다 한 남자를 만납니다. ‘남자는 다리를 절룩이면서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히고 땅바닥에서 연신 뭔가를 주웠’(p.60)습니다. 명수는 그 남자가 자기 아버지라는 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는 체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 장면을 어떻게 보았나요?


  명수의 아버지는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전다. 명수는 절름발이 아들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 아버지를 모른 척한다. 아이들은 이런 명수의 마음이 이해된다 했다. “아버지가 넘어져 있는 모습이 너무 초라해 보였을 거예요. 안쓰럽지만 모른 척하고 싶은 그 마음 이해해요.”, “아빠를 못 본 척하는 명수가 안쓰러워요. 친구들한테 아빠라고 얘기하고, 아빠를 도와야 했어요.”,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불편했을 거예요.”, “절름발이 아들이란 소리 듣기 싫었겠지만, 나라면 아빠를 도울 거예요. 내가 아빠 몫까지 두 배 뛴다고 하면 되지요.” 했다. 자신을 아끼고 자랑스러워한 아버지의 마음을 읽지 못한(또는 모른 척한) 명수의 마음을 아이들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날 아버지를 모른 척 한 명수의 행동은 뒤에 큰 후회로 남는다. 아버지가 군인의 총에 맞아 돌아가시기 때문이다.    


거대한 폭력에 맞서는 용기에 머무르기


[질문2] 광주 시내에 나갔던 정태, 명수, 진규, 성일은 군인들이 시민을 폭행하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합숙 장소로 돌아와 두려움에 떨며 대화를 나누는데요. 성일이가 “그랑께 군인들이 악당인 거여랴?”하고 묻자, 정태가 “아니제. 만화서 보믄 나쁜 로봇을 조종허는 진짜 악당은 뒤에 숨어 있잖여. 군인들은 나쁜 악당헌티 조종당허는 로봇인거제.”(p.110)라고 대답합니다. 여러분은 이 장면을 어떻게 보았나요?


  책 모임을 시작할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골라 돌아가며 말했다. 이 장면을 고른 아이가 많았다. 군인들이 시민을 폭행하는데, 이 군인들은 진짜 악당이 아니다. 그럼 진짜 악당은 누구일까? 아이들과 이 장면에서 오래 머무르며 이야기 나눴다. 이 장면을 어떻게 보았니? 하고 물으니 한 아이가 “엄청 잔인한 장면인데, 만화로 표현해서 잔인함을 조금 줄인 것 같아요. 군인이 시민을 해친다는 게 끔찍해요.” 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아이들이라 이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어른들은 알지만, 아이들은 이해하기 어렵잖아요.”, “아이들 시선으로는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겠죠.” 하며 공감한다. “군인은 우리를 지켜줘야 하는데, 우리를 죽이네요.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요.”하며 화도 낸다.


아이들은 눈앞에 보이는 군인이 저지르는 폭력에 집중했다. 거기서 머물면 안 되었다. 아이들과 군인들 뒤에 숨어 조종하는 거대한 권력, 신군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군인들을 조종한 진짜 악당은 누구였을까?” 라 물었다. 마침 아이들은 학교에서 근현대사 공부를 했다. “전두환 정권이요.”, “전두환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니까 군인을 보내서 사람들을 패고 죽였어요.” 한다. 책 뒤에 실린 자료를 살피며,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 표정이 꽤나 심각해 보였다.


더 나아가야 했다. 부록에 실린 공수 대원들이 시민을 곤봉으로 내리치는 사진을 보며 물었다. “진짜 악당들에게 조종을 당한 군인들은 잘못 있는 걸까, 없는 걸까” 아이들 대부분은 군인들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했다. 판단하지 않고 명령을 따르기만 해서, 부당함에 반대하지 않아서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국민의 생명을 함부로 짓밟았다 했다. 한 아이는 군인들도 잘못이 없지 않지만 오랜 독재에 익숙해졌을 것이며, 명령을 어기면 큰 해를 입을 거라 두려웠을 거라는 입장을 냈다. 나는 상부의 명령을 어기고 시민을 지킨 사람들 이야기를 해줬다. 엄청난 고통과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생명을 지키고, 정의의 편에 선 사람들. 그들의 용기와 결단이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고.


가족과 이웃의 연대에 머물기 


[질문3] 군인들이 광주 시민들을 무차별 폭행하자 박 코치와 김 감독은 체전 출전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 나눕니다. 박 코치는 체육대회를 ‘설령 헌다고 혀도 우덜은 나가믄 안 된당께요.’(p.120)라고 말합니다. 김 감독은 ‘대회에 나가고 안 나가고는 우리가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의견에 공감합니까?


5월의 그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공수부대에 맞섰다. 거창한 사상이나 신념 때문이 아니라 가족과 이웃과 함께 하려는 마음 때문이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선량한 마음이 시민의 연대를 이끌어 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박 코치와 김 감독의 대화를 질문에 넣었다. 김 감독은 “사람들이 어 나가는디 소년체전이 다 뭐다요.”한다. 아이들에게 이 말을 하는 김 감독의 마음을 전해주고 싶었다.


이 장면에 머무른 아이들은 “아이들이 다칠 수 있으니 소년체전에 나가면 안 된다.”며 입을 모아 말했다. 폭력으로부터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거였다. 아무래도 상상할 수 없는 폭력이 일어나는 상황이니 생존의 문제가 중요하게 여겨진 모양이다. 이야기가 더 깊어지지 않아서 다음 질문을 던졌다. “모두의 안전이 보장된다면 소년체전에 나가도 될까?” 하니 표정들이 어두워진다. 쉽지 않은 선택이다. 아이들 중 반은 나가야 한다 했고, 반은 나가면 안 된다 했다. 나가야 한다는 쪽은 아이들이 대회 출전을 위해 노력했고, 꿈을 이뤄야 하기 때문이란다. 나가면 안 된다는 쪽은 밖에서 사람들이 죽고 있는데 어떻게 달리기를 하고 있냐 했다. 달리기도 하나의 유흥이라는 격한 말도 나왔다. 잠시 후, 아이들은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니 모두 맞는 말 같다며 혼란스럽다고 했다.


명수와 아이들은 소년체전에 나가기 위해 열심히 운동했다. 체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장차 국가대표가 되겠다는 꿈도 꾼다. 하지만 가족과 이웃에게 일어난 비극을 모르는 척할 수 없다. 모두가 불행한데 나만 행복해질 수는 없는 거다. 이런 이야기를 해주니 아이들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용서와 화해에 머물기


[질문4] 이야기는 시계방 주인과 남자의 대화로 끝납니다. 남자는 광주 사태 당시 군인으로 ‘산등성이에서 경비를 섰’(p.151)고, 한 아이가 ‘자기 아버지가 죽어 집에 알려야 하니까 보내 달라고 빌’(p.151)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아이가 잘 달리고 있는지 보고 싶었습니다.”(p.153)라고 합니다. 실수로 컵의 물을 흘리곤 시계방 주인에게 “정말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p.155)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읽었나요?


책의 마지막 장면이다. 시계방 주인과 과거 군인이었던 남자의 만남. 시계방 주인은 명수이고, 남자는 광주 사태 당시 명수와 만났던 군인이다. 그들의 슬픔과 고통은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 명수와 군인의 만남에 머물며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살피고 싶었다.


“남자는 시계방 주인이 옛날 그 아이란 것을 눈치채고, 미안하다고 한 것 같아요. 이걸로 다 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라도 사과를 하는 게 다행이에요.”

“이 남자가 전두환보다 훨씬 나아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니까요.”

“이렇게라도 사과를 받아서 좀 나아요. 하지만 용서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내가 시계방 주인이면 눈물이 났을 거예요. 그때는 군인이 나쁘게 보였는데, 이 사람이 후회를 하는구나 싶어 마음이 아파서요.”


 아이들은 자신이 시계방 주인이라면 예전 일이 떠올라 슬프고 화가 날 거라고 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리워 눈물도 날 거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도 남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해서 다행이라고, 시계방 주인의 마음이 조금은 나아졌을 거라 했다.  


현실에서는 광주 사태 때 가족과 이웃을 잃고, 삶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아무도 사과하지 않는다. 사실 아이들이 피해자의 감정을 깊이 이해하기는 어렵다. 피해자 입장에서 용서와 화해를 떠올려보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다만,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데서부터 피해자의 치유가 시작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오월의 달리기>는 끝나지 않았다.


책 모임을 마치며 아이들은 <오월의 달리기>가 ‘결승선 없는 마라톤’이고, ‘시곗바늘 없는 시계’라고 했다. ‘결승선 없는 마라톤’인 까닭은 그 날의 일들이 모두 밝혀지고, 해결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곗바늘 없는 시계’인 까닭은 광주 사태를 겪은 사람들이 아직도 멈춰진 시간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그날 광주’의 일이 오늘 ‘우리의 일’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오월의 달리기>를 읽으며 1980년 5월, 그날의 사람들을 만났다. 정태, 명수, 진규, 성일이와 박 코치, 김 감독 그리고 군인. 나는 아이들 손을 잡고 그들 곁에 머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들이 자세히 보아주었으면 하는 장면과 문장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 시대, 그 장소에 살았던 사람들의 마음을 살뜰히 살폈다. 그들의 아픔을 조심스레 가늠해보았다.  이 한 권의 책으로, 이 한 번의 모임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나는 계속 아이의 손을 잡고 책을 읽을 거다. 가슴 아픈 장면과 비통한 문장에 아이와 함께 머물 것이다. 우리에게는 멈추고, 들여다보고, 마음으로 느껴야 하는 아픈 역사가 너무 많다. 그러니 우리의 책 모임은 계속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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