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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자선생 Feb 10. 2021

섣달그믐 하얀 눈썹과 미인박명

  꼬맹이들이 크리스마스 때 진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와서 선물을 준다고 믿듯이 필자도 그런 어린 시절이 있었더랬다. 먼 옛날 두메산골에서 크리스마스를 기념 할리는 만무하고 일 년 중 손꼽아 기다리는 날은 먹을 게 풍족한 추석이나 설날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설날을 유독 기다렸다. 그건 설빔이라도 한 벌 얻어 입을 수 있는 행운이 간혹 있었기 때문이었다. 

  각설하여, 요즘엔 그런 미신 누가 믿어하겠지만 필자는 철석같이 믿는 미신이 있었는데 ‘섣달 그믐날 밤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얘진다’는 말이었다. 여기서 요즘 젊은것들은 잘 몰라서 풀이해주는데 ‘그믐’은 순수한 우리말로 마지막 날을 뜻한다.(작년 8.15 연휴 때 "왜 삼일인데 사흘이냐"고 물었잖아?) 그러니까 섣달(설이 있는 달=설달=섣달, 세밑, 설밑이라고도 함) 그믐은 그다음 날이 정월 초하룻날인 설날 전 날 밤이란 것이다. 건너 마을 박 씨 할아버지의 하얀 눈썹 얘기까지 거들면서 어른들은 절대 잠을 자서는 안 된다는 걸 거듭 강조하였다. 겁이 난 우리 형제들은 그럼 그 할아버지도 섣달 그믐날 밤 잠을 자서 눈썹이 하얘진 거냐고 물으니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 하룻밤 정도야 하면서 버티는데 밤이 깊어질수록 졸린 잠을 쫓는데 힘이 들어지고 어른들의 말소리가 띄엄띄엄 들리다가 점점 멀어지는 듯하였다. 깜짝 놀라 일어났는데 아뿔싸 아침이 환해져부렀다. 밤새 아무 일 없었겠거니 하고 있는데 작은 형이 “야 네 눈썹 하얘졌어. 거울 한 번 봐!” 거짓말처럼 들렸지만 혹시나 하고 거울을 보니 양 눈썹이 진짜로 하얘진 것이다. 울움보가 터지려는 걸 참으며 눈썹을 만지니 하얀 먼지 같은 게 날리고 있었다. 어른들한테 밀가루는 전 부치는 데만 필요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도대체 왜 섣달그믐에 잠자면 안 된다고 했을까? 그냥 좋게 해석하여 온 집안 식구가 설 준비를 하는데 어린이라 할지라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함께 거들어야 한다는 훈화만은 아닌 뭔가 있는 건 아닐까? 알고 보면 그냥 미신이라 여겼던 여기에는 오래된 ‘신화적 배경’이 있었다.          


  왜 하필 섣달 그믐밤일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날에는 인간이 죄를 많이 지으면 죽는다고 믿었다. 어렸을 적 무서운 말 중 하나가 "죄로 간다"는 말이었다. 이 말은 필시 나쁜 짓을 하면 죽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거 같다. 그래서 나온 말이 '자는 짐승(을) 잡으면 죄로 간다'라든가 물건을 함부로 쓰거나 낟알을 함부로 버려도 따라붙는 말은 '죄로 간다'였다. 사람의 뱃속에는 세 마리의 죽음의 벌레가 있는데 바로 ‘삼시충(三尸蟲)’이란 것이다. 요놈은 사람이 죄를 짓도록 화를 내개 한다든가 질투를 내도록 충동질을 한다. 왜냐면 빨리 죽어야 제삿밥을 얻어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짜증 부리거나 인간이 죄를 짓는 건 바로 이 삼시충 때문이라는 것이다. 요놈은 우리 뱃속에 있기 때문에 몰래 나쁜 맘먹은 것까지 다 알고는 기억해 두었다가 섣달 그믐날 사람들이 잠든 사이에 우리 몸을 빠져나가 하늘에 있는 옥황상제께 고해바치는 임무를 띠고 있다. 그러면 옥황상제는 죄에 따라 사람의 수명을 깎는다. 우리가 한 살 한 살 먹을 때마다 늙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더 이상 깎을 수명이 없으면 비로소 인간이 죽는다는 얘기다. 

  그럼 오래 사는 방법이 없을까? 삼시충은 섣달그믐 때 단 하루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옥황상제께 보고를 한다. 그러니까 이 날 하룻밤만 참고 잠을 안 자면 늙지도 죽지도 않을 것이란 결론이 나온다. 눈썹이 하앻지는 건 섣달 그믐날 밤 잠을 자는 동안 삼시충이 그동안의 죄업을 몽땅 옥황상제께 고해바쳐 나이를 갑자기 많이 먹어 노인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란 것이다.            

  위 삼시충 얘기는 동양신화 중 하나인 『산해경』이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는데 산해경 신화는 중국 신화라기보다는 동이족 등 북방 유목민이나 주변국들의 신화가 대부분이니 동북아 신화라고 말하는 게 정확할 것이다. 이 신화는 도교에서 적극 받아들여 하늘이 내려준 사람의 수명을 120년으로 본다. 이리하여 생긴 도교식 수련법인 경신(庚申)수련법이란 게 있다. 경신이란 60갑자(甲子) 중에 경신일 전날인 해자 시부터 경신일 날 해자 시까지 단 한 번도 졸지 않고 하루를 꼬박 새우는 것이다. 경신일은 1년 중 6번 돌아오는데 이 6 경신을 통과한 사람 중 한 명이 사명대사라는 전설이 내려온다. 민간의 섣달 그믐날 잠 안 자는 것에서 몇 걸음 더 진화된 버전 같다. 

  경신수야라는 이 풍속은 고려 때 흥행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놀기 좋아하는 우리 민족, 왕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전 백성이 이날 밤엔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밤을 불태웠다고 한다. 특히 충렬왕 때는 국고가 바닥날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놀기를 좋아했으면 그랬을까 싶다. 이런 놀이성이 조선시대에 와서 유교라는 이념에 억눌리고 억압받아 감정을 드러내는 것조차 저급하고 사악한 것으로 취급받았다. 그래서 요즘 멸칭하는 '씹선비'(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인간을 SNS 상에서 겉으로는 타인의 성 관념을 비판하며 뒷짐을 지고 순수한 척, 고상한 척 하지만, 뒤로는 난잡하게 색을 탐하며 호박씨 까는 모습을 조롱)도 있었을 것이다. 그려 때부터 흥행하던 밤샘 연회는 조선조에 와서 유교의 성리학이 확립된 성종으로부터도 200년이 지난 영조 때 사라졌다. 영조는 신하들의 등쌀에 못 이겨 밤샘 연회를 금지시키는 대신에 등불을 밝히고 근신하면서 밤을 새우도록 명하였다. 섣달 그믐날 밤 온 집안에 등불을 훤하게 밝혀놓고 수세(해지킴이)를 하는 풍습은 이렇게 생긴 것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섣달 그믐날 밤엔 전기세 아끼지 말고 집안 구석구석까지 모든 등불을 켜놓게 하는가 보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현대판 경신수야가 나왔는데 바로 ‘불금’이라 할 수 있겠다. 예나 지금이나 노는 데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민족이 안 놀고 배기겠는가. 한편 세계적인 장수마을인 그리스의 이카리아 섬 주민들에게는 특이한 풍습이 하나 있는데 한 달에 한 번 ‘불금’이 있다. 이들은 유럽인들보다 평균 최소한 10살 이상 오래 사는데 주민 세 명 중 한 명은 90세 이상이라는 통계가 있다. 이들이 장수하는 비결은 가족과는 물론 친구나 이웃과도 거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유대감을 갖고 살아가는 데 있다고 하는데 그중 최고의 장수 비결은 ‘불금’ 같은 놀이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요즘엔 코로나19 돌림병으로 밤 9시가 통금이나 다름없는 불우한 시절을 살고 있지만 코로나가 가시면 마음껏 즐길 체력 준비나 해두시라. 그런데 우린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지구가 많이 아파 우리가 가고 싶은데 못 가고 놀고 싶은데 모여서 못 노는 건 인간이 그동안 지은 죄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죄를 많이 지어 감옥에 가거나 염라대왕의 판결에 따라 지옥에 가는 것만이 '죄로 간다'가 아니라 코로나19 돌림병으로  인류가 고통받는 건 바로 지은 죄에 대한 업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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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의심 가는 대목 한 가지! 미인은 잠꾸러기라는 말이 있는데 이들은 섣달 그믐밤에도 늘어지게 잠을 자서 ‘미인박명’이 되었을까? 즉, 삼시충이 드나드는 것도 모른 채 잠만 자다가 수명을 다 깎아먹었기 때문에 박명하는 걸까? 미인박명이 나온 배경은 중국의 소동파(蘇東坡)가 쓴 칠언율시 <박명가인(薄命佳人)>이라는 게 있다는데 이 시에서 '자고가인다명박(自古佳人多命薄)'이라는 구절 즉, '예로부터 미인은 운명이 기박한 사람이 많다'라고 하였다. 이 가인명박(佳人命薄)이 '가인박명(佳人薄命)'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미인박명(美人薄命)'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다. '미인박명'이란 미모가 뛰어난 여자는 그 운명이 기구하거나 길지 못함을 뜻하는 말이다. 불행한 일이 따르기 쉽고 요절하기 쉽다는 말인데 당시 무슨 과학적인 통계가 있었다든가 하는 건 아닐 테고 아마 세인으로부터 주목받는 미인이다 보니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을 거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다 보니 차츰 미인은 빨리 죽더라는 확증편향에 빠진 게 아닐까 추측된다. 

  즉 미인박명은 의학적으로 보면 완전히 틀린 얘기라는 걸 알 수 있다. 잠을 충분히 잘 자야 머리도 맑고 피부가 탱탱해지는 미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신화적으로는 미인박명이 맞을 수 있겠지만 의학적으로 ‘미인장수’가 맞다는 역설에 부딪히게 된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에서는 잠을 많이 자면 잠꾸러기나 잠보라는 핀잔을 듣는다. 왜냐면 세계에서 잠을 가장 적게 자는 나라가 한국이고 심지어는 잠을 죄악시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 성적에 잠이 오냐?”라며 잠자는 것을 면박하고 구박하기도 한다. 한 때는 부지런한 국민이라고 자찬했는데 수면부족은 국민건강을 위협하고 그 때문에 드는 비용이 오히려 많아진다. 통계에 의하면 OECD 주요 국가 중 프랑스인이 평균 9시간에 가까운 수면으로 잠을 제일 많이 자고 한국인은 평균 수면이 8시간도 안 되는 꼴찌 나라다. 영유아나 노인까지 포함한 평균 수면 시간에 대한 통계이니 학생들이나 직장인의 수면시간은 고작 6시간도 안될 것이다. 수면부족은 여러 가지 질병을 유발하는데 최근 연구에 의하면 뇌가 점차 줄어들어 치매 발병 위험이 높다는 것이다. 잠을 무려 9시간씩이나 자는 프랑스인을 예전에는 비웃었겠지만 대한민국이 프랑스보다 더 문화국이라거나 강대국은 아니지 않은가. 대한민국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좀 속돼 보이지만 잠 잘 자고 잘 놀고 요즘 뜨고 있는 먹방처럼 맛나게 먹어야 할 것이다. 심리학자 매슬로우가 얘기한 욕구 5단계 중 생리적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수 조원을 가진 재벌이나 무소불위의 권력자도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요즘 신화를 잃어버리고 있는 점이 안타까워 오래된 옛 얘기를 해보았다. 신화와 전설은 문학과 예술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재미’의 요소, 즉 놀이의 요소 이기도하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겨울 왕국’ 등이 모두 북유럽의 신화인 켈트 신화가 원천인 게 증명해 준다. 여러분들이 즐겨 찾는 스타벅스의 상징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요정 사이렌을 갖다 쓴 것이다. 사상 최초로 달 뒷면에 착륙하여 중국인들을 들썩이게 만든 달 탐사선 창어(중국어 발음)도 달의 여신이라는 ‘항아’에서 유래된 것이다. 21세기는 스토리텔링 시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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