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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자선생 Nov 09. 2020

당신의 딸이 남친과 1박2일 여행을 간다면

지난여름이었던가, 페이스북에서 아래와 같은 글이 눈에 띄어 댓글을 단 적 있었다.      

     

대학 1학년 친구 딸이 엄마에게 남친과의 1박2일 여행을 허락해달라고 카톡을 보내왔는데 어찌할지 모르겠다고 내게 의견을 물었다. 친구는 당황스럽지만 현명한 처신을 하고 싶다고 했다.

“딸 잘 키웠네, 내 친구.

보통은 몰래 다녀오는데 솔직하고 당당하게 엄마의 허락을 요청하니 고맙지 않아? 

넌 기분이 어때?”

“넘 당황스러워”

“허락해주고 싶어?”

“허락 안 한다고 안 갈까?ㅠ”

“그럼 뭐가 제일 걱정되는데?”

“몰라”          


금이야 옥이야 잘 키운 딸이 이런 상황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당황하고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왜 그럴까? 당일치기 여행이 아닌 1박 2일 이라서다. 즉, 자고 온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만약 이런 제안을 한 자식이 아들이었다면 사뭇 다를 것이다. 이어지는 다음 대화를 보면        


“걍 남친과 즐거운 여행하고 오라고 해. 안전하게 다녀오라고, 

단, 하나 피임은 꼭 얘기해야 해. 제일 중요해.”          


실은 남자 친구랑 섹스를 할 거라는 게 걱정스럽고 걸리는 것이다. 선뜻 ‘그래 즐겁게 놀다 와’라고 하기엔 아직 우리 정서야말로 선뜻 허락을 안 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아래와 같이 댓글을 달았다. 

<놀자선생> "시대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죠.

본능인 쾌락을 부정하거나 덮는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니 어떻게 잘 누릴 건지 긍정적인 역발상 쾌락 사용설명서가 필요하네요."          

이에 대한 답 댓글은 

<Sarang Park> "쾌락이라기보다는 사랑이겠죠 ...아이들의 사랑도 존중받을 권리가 있으니까요"



음, 보아하니 이 답글을 쓰신 분은 사랑과 쾌락은 별개의 것이거나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 같다. 그러나 사랑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이고 쾌락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필자는 <쾌락사용설명서>를 작성한 적이 있는데 그중 한 대목을 인용하면, ‘철학자인 이왕주는 그의 산문집 『쾌락의 옹호』에서 쾌락은 유죄인가 물으며 “가장 지혜로운 생의 목표는 진정한 쾌락주의자가 되는 것이다.”라고 얘기한다. 고도의 지적 쾌락인 예술적인 감동뿐만 아니라 온몸의 말초신경을 전율시키는 성적 쾌락, 혀에 전해져 오는 미각의 쾌락,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는 감각의 쾌락 등 쾌락에는 우열의 차이가 없으며 오직 종류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그것을 회피하는 기술이나 극복하는 방법이 아니라 오히려 변별하는 안목으로 추구하는 요령을 익혀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쾌락’에 대해 죄책감을 갖고 있다. 일단 꺼림칙한 느낌을 갖게 만들고 만약 쾌락을 누렸다면 숨겨야 할 거 같은 강박관념이 있다. 그래서 쾌락과 관련 있는 것들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오락이나 놀이가 그렇고 특히 섹스는 최고의 쾌락이어서 전쟁이나 난리 통에도 목숨 걸고 누리려고 하는 것인데 왠지 모를 죄책감을 갖게 만들었다. 이런 관념을 갖게 만든 건 아마 종교의 영향이 가장 클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주자학이라는 유교 이념을 받아들이면 서다. 이성을 중시하는 성리학에선 심지어 감정을 드러내는 것조차 금기시하고 죄악시 여기게끔 만들었다.           


우리는 철학자 이왕주의 주장처럼 자식들에게 쾌락이나 섹스를 회피하거나 극복하는 방법이 아니라 변별하는 안목으로 추구하는 요령을 가르쳐야 한다. 인류 역사상 쾌락이나 섹스를 회피하거나 극복한 사례는 절대적으로 없다. 또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만약 인간의 생존 본능인 먹는 것을 단절시킨다면 굶어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번식 본능인 섹스를 단절시킨다면 인류는 소멸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인간은 이런 본능에 쾌락이라는 옵션을 선택사항이 아닌 필수사항으로 장착시켜 진화를 하였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놀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건 인간의 생존, 번식과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이고 유전적인 상황이 이러하다면 우리는 부정적으로 보아왔던 ‘쾌락’을 제대로 쓸 수 있도록 쾌락사용설명서가 필요하겠단 생각이 든다.            



<충격적인 독일 초등학교 성교육>이라는 1boon 글을 본 적이 있는데 독일에서 성교육의 제1원칙은 ‘윤리적 판단 금지’의 원칙이라 한다. 대한민국으로 와선 유교적 잣대를 들이대선 안 된다는 얘기이다. 성은 인간의 본성으로 자연 생물학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성에 대해 죄의식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한다. 앞서 얘기하였듯이 성은 최고의 쾌락이다. 바꾸어 얘기하면 쾌락을 윤리적으로 판단하거나 죄의식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성교육에 앞서 우리는 부정적인 이미지로 덧칠된 성과 쾌락을 복권시키는 작업부터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성과 쾌락을 제대로 잘 누릴 수 있도록 적극적인 사용설명서를 작성하여 배포해야 할 일이다.           

‘섹스를 빼고 사랑을 말하면 인간은 절망할 수밖에 없다. 사랑을 빼고 섹스를 말하면 인간은 추악해질 수밖에 없다. 원래 하나였던 것을 둘로 나누어 놓다 보니 갈등만 생기고 섹스를 해도, 사랑을 해도 허무하고 외로워지는 것이다.’(『그래도 나는 사랑을 믿는다』의 저자 조명준) 



참고로 최고의 쾌락인 섹스는 서양 말이다. 한자말로는 성교다. 노골적인 표현인 씹하다는 매우 속되게 들린다. 섹스, 성교, 씹 등이 갖고 있는 이미지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 건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던 정치, 종교적인 배경과 무관치 않다. 잠자리라는 은유적인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긍정적인 단어를 만들어 쓸 필요가 있겠단 생각이 든다. 그런데 혹시 ‘몸잔치’란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개성공단 사람들』이라는 책을 쓴 김진향 교수는 북한 노동자들 사이에서 성에  대해 매우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농담들이 목격되는 것을 보고 놀랐다는 글이 있다. 북한에서는 우리가 말하는 성교나 섹스를 ‘몸잔치’라고 한다는데 속되지도 않고 몸의 유희(쾌락)에 대한 건강성과 긍정성이 프레임 된다.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던 참으로 알맞춤한 신조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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