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영희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와 제주 4.3.
나는 다른 사람의 가족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한다. 가족의 취향, 허물, 비밀, 싸움, 누군가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해프닝이고 누군가가 듣기에는 무거운 일일 수도 있는 화제가 '가족'으로 묶인 이의 입을 거쳐 나올 때 획득하게 되는 일종의 역사성만큼 흥미로운 것도 없으니.
작년 1월 영상자료원에서 뒤늦게 <수프와 이데올로기>(2022)를 보았을 때, 눈물 콧물을 함께 흘리는 와중에도 '이건 반칙이다!'라고 생각했다. 상영관에는 나 말고도 마스크 안으로 콧물을 흡흡 들이키는 관객들이 가득했지만 말이다. 영화이론을 공부하던 학부 시절 보드리를 위시한 구조주의 이론("영화는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는 데 최적의 상영 조건과 매체 언어를 가진 위험한 장치야!!!")을 지겹도록 읽어야 했던 사람으로서는 나를 울게 만드는 영화, 특히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날 때마다 한껏 도끼눈을 뜨게 된다. 애초에 내겐 흔치 않은 경험이기도 하거니와 이 영화의 무엇이 나를 울렸는지 분명히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영화를 시퀀스 별로 뜯어보며 구성안 분석이라도 해 봐야 하지 않을까? 헌데 이미 울면서 파토스 덩어리로 받아들인 영화를 어떻게 낱낱이 분해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같은 영화를 한 번 이상 더 봐야 하는구나!(그때는 울지 않을 수 있다면 말이다.) 반칙이다, 반칙이야.
공평하게 말하자면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그 어떤 반칙도 저지르지 않았다. 양영희 감독이 본인의 어머니 강정희 여사를 주축으로 만든 다큐멘터리고, 나는 원래도 다른 사람의 가족 이야기를 듣는 걸 아주 좋아하니까. 양영희 감독은 그 자신의 특수한 이산가족이 내포하고 있는 말하기-체제 비판-신변 위험이라는 연결고리를 알면서도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가족 이야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영화 작가다. 내게는 <수프와 이데올로기>가 양영희 감독과의 첫 만남이지만, <디어 평양>(2005), <굿바이 평양>(2009)과 극영화 <가족의 나라>(2012)를 본 관객이라면 양영희의 필모그래피를 따라 일관되게 등장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북한 체제를 신봉하던 재일조선인 1세대로서 제 손으로 아들 셋을 북송선에 태운 아버지 량공선 씨, 일제강점기 오사카에 살던 조선인 난민이었다가 2차 세계 대전을 피해 고향 제주로 건너갔지만, 다시 한 번 4.3 사건으로 인해 오사카로 밀항해야 했던, 그 뒤로 평생을 북한의 세 아들에게 소포와 택배를 부치며 이산가족의 가장 노릇을 해 온 어머니 강정희 씨. 청소년 시절 '귀국사업'으로 북송된 뒤 지상낙원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곳에서 좋아하는 음악도 듣지 못하고 마음대로 배를 채울 수도 없었던 세 오빠 건오, 건화, 건민 씨. 늦둥이 막내딸로 태어나 재일조선인인 동시에 북한에 충성하는 조총련의 정체성을 동시에 안고 가야 했던, 정작 본인은 아나키스트에 가까운 신념을 키우며 자라난 양영희 감독, 북한에서 태어나 주체 사상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조카 선화씨까지, 이 가족 이야기에 내포된 한반도의 근현대사와 냉전, 분단의 비극성은 과연 20년의 세월 동안 한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해지기만도 벅찬 거대 서사들이다. 그럼에도 양영희 감독은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꾸준히 해 나가는 중이고, 작년에 내놓은 신작 <수프와 이데올로기>에서는 원가족이 아닌 그 자신이 새로 꾸린 가족의 이야기 또한 소개하고 있다. 하여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기존의 가족 이야기 계보에 속하는 동시에 새로운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4월의 나는 눈물과 콧물로 이루어진 파토스의 강에서 빠져나와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다시 한 번 보았다. 두 번째로 이 영화를 보았을 때는 울지 않았다. 사실 이 영화는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려 작정하고 만들어진 류의 영화는 절대 아니다. 범박하게 분류했을 때,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4부 구성의 21개 시퀀스로 구성된 영화다. 1부에는 (입원한 강정희 여사가 넋두리처럼 4.3을 회고하는 오프닝 시퀀스를 제외하면) 양영희 감독의 전작들의 흔적이 짙게 묻어 있다. 나처럼 이 영화로 양영희 감독의 가족 이야기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위해 가족의 역사를 개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영화는 '어머니'가 4.3의 피해 유족이자 목격자임을 가장 먼저 어머니의 목소리로 직접 밝힌 뒤, <디어 평양>의 일부 클립("미국놈과 일본놈은 (사위로) 안 된다!"고 호쾌하게 외치는 량공선 씨의 모습)을 제시한다. 그 뒤 재일조선인 부락이라 불렸던 오사카의 빈민촌에서 그들 가족이 꾸려졌음을 몇 장의 기록사진과 가족사진을 통해 소개하고, 북송사업으로 북한에 건너간 오빠들을 '어머니'가 적극 원조해왔음을 밝힌다. 이제는 완전히 노년기에 접어든 어머니가 더 이상 빚지면서까지 오빠들을 원조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감독의 강경한 태도를 이어 함께 전하면서 말이다.
흥미로운 점은 영화에서 '수프' 씬들은 전부 다 2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1차 관람 때도 총 3번의 '수프' 장면을 한데 몰아넣은 구성이 인상 깊었더랬다. 영화의 구성을 전부 다 문장으로 풀어 설명하기는 뭣하니, 여기 두 번째로 영화를 보면서 간략하게 메모한 구성안을 첨부하겠다. 구성안..이라고 하기는 뭣한 게 도표화를 하지 않아서... 어찌 되었든 영화의 공식 콘티와는 관계가 없고, 그저 감상을 분석적으로 하기 위해 시도한 자의적인 해석이라는 점은 염두한 채 봐 주시기 바란다.
0. 오프닝 시퀀스 : 침상에서의 4.3 참상 회고
1. 량공선 씨 푸티지 필름
2. 량공선 씨 우리말로 고향 제주에 대해 노래
3. 오사카의 재일조선인사회에서의 가족의 탄생
4. 북송사업으로 북한에 건너간 오빠들을 지금까지 원조해 온 어머니 vs 이제는 원조를 그만두자는 감독
5. 첫 수프 : 아라이상의 첫 방문
6. 두 번째 수프 : 아라이상, 요리를 돕다
7. 결혼사진 찍기
8. 세 번째 수프 : 아라이상의 아들 노릇(장례 견문 센터에 통화로 아들을 자처하며 으름장), 그가 어머니를 위해 직접 삼계탕을 조리하다
9. 4.3 연구소의 방일 방문 : 어머니, 우리말로 직접 4.3의 참상을 회고하다
10. 알츠하이머 발병 : 깜빡깜빡 기억을 잃기 시작하는 어머니, 무너지기 시작하는 일상, 데이케어센터 말고도 아예 전일 입소를 준비
11. 알츠하이머가 많이 진행된 어머니, 혁명가만큼은 우리말로 온전하게 불러내다
12. 세 식구, 제주 방문
13. 클레이 애니메이션으로 4.3 설명
14. 국가 단위의 4.3 위령제 : 어머니, 잘 모르는 애국가지만 따라 부름
15. 4.3 연구소 방문 : 어머니, 질문에도 묵묵부답
16. 제주지역행방불명희생자 묘지 : 김봉희씨 유족인 친동생의 이야기로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본 당시의 젊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최초로 전해들음. 어머니, 여전히 묵묵부답.
17. 완전히 할머니가, 아기가 되어버린 어머니 : 더 이상 딸도 사진 속 자기 자신도 인식하지 못함
18. 어머니가 입원하게 되어 집을 비우고 김일성 부자의 초상을 포함한 사진 액자들을 내리는 부부
19. 조카 선화씨로부터의 편지 : 여전히 함께 먹는 수프를 가능케 하지 못하는 국가 이데올로기의 상처. 활자로는 전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기에, 부치지 못할 편지들은 쌓여만 간다.
20. 머릿속에서는 가족들과 함께 둘러앉아 수프를 먹고 있을 어머니를 떠올리는 감독.
(나레이션 : 돌아가신 이후의 어머니를 생전 소원대로 평양에 묻혀있는 아버지와 나란히 매장할 수 있도록 북한까지 유골을 전달할 방법을, 북한 입국이 금지된 상태인 양영희 감독은 지금부터 고민해야만 할 것.)
위 구성안을 거치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도출할 수 있다.
1. 왜 수프를 한데 몰아 끓였을까?
2. 수프 장면들은 이데올로기로 인한 원가족의 이산과 몇십 년여에 걸친 붕괴를 제시한 직후이자, (오프닝 시퀀스에 비해) 어머니의 당사자성이 훨씬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4.3 참상의 구술 증언 직전에 배치되어있다. 가족주의라는 그, 2-1)사회를 유지시키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면서도 한 개인을 지탱하는 정서적 기둥으로 존재하는 그것을, 2-2)각종 재료들을 한데 모아 넣고 끓여 한 식탁에 내놓을 수 있는 융화의 메뉴인 수프로, 2-3)본격적인 4.3의 고통을 보여주기 이전에 선보인 이유가 무엇일까?
3. 세 번의 수프 장면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면서 점차로 역할과 행동반경을 넓혀가는 아라이 카오루의 역할, 이 영화에 있어서의 기능적인 역할은 무엇일까?
꼬 빠욱 감독의 <여명이 비추는 길>을 보다가 문득 깨달은 게 있다. 그가 미얀마의 봄이라 명명한 2021 민주화 혁명과 마찬가지로 남한에도 무수히 많은 기억할 날짜로서의 봄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주 4.3은 오랜 시간 동안 금기시된 주제였거나 와전되어 전해졌을 뿐 공인된 역사 기억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지금도 4.3은 그 어떤 역사적 수식어도 달지 못한 채 날짜 그대로의 이름으로 불린다. 2000년대 이후 국가가 주도하는 역사적, 문화적 기억에서 4.3은 제주도민들의 항쟁보다는 7년여에 걸친 민간인 대량학살로 인식되는 것 같다. 그 점이 4.3이 가지는 제일 큰 비극성이자, 오늘날 4.3을 추념하기 위한 정당성을 찾기 쉬운 내용이기 때문이 아닐런지.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강정희 여사의 증언을 통해 4.3이 일종의 인민 봉기였다는 점, 이념적 대의를 위해 맞서 싸운 혁명이기도 했다는 점을 빼놓지 않고 언급한다. 남한 사회에서는 일종의 봉합이 이루어져 조총련계인 어머니 또한 정부가 주최한 공적 기억의 행사인 4.3 추념식에 초대되기는 했으나, 오랜 세월 동안 안착할 자리를 찾지 못한 어머니 개인의 기억은 그 시점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영화는 북한에 사는 조카 선화에게 쓰는 편지를 마무리짓지 못하는 감독 자신의 모습에 이어, 가족들이 살아 있다고 믿으며 그들의 안녕을 기도하길 반복하는 살아 생전의 어머니를 마지막 이미지로 선택한다. 어머니는 죽었으나 국가 폭력의 남긴 상흔도, 분단의 현주소도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다. 감독은 평양에 묻힌 아버지와 건오 오빠의 옆에 어머니를 묻어주겠다는 불가능한 약속을 이행할 방법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양영희 감독에게 남겨진 그, 끝나지 않는 숙제는 그 자체로 국가적 기억의 아카이브와 아카이빙조차 되지 못하는 사적 기억들 사이에서 진동하는 우리의 숙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