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미의 신작 <깃발, 창공, 파티>가 보여주는 연대의 초상은 그 제목처럼 힘차고 아름답다. 깃발은 집회에서 모일 수 있는 좌표를 제시하고, 몸짓 패 창공은 각자 다른 서사를 살아 온 이들의 언어를 하나의 리듬으로 결집시킨다. 파티는 잔치와 정당을 동시에 의미하는 중의적 표현이다. 이는 영화의 러닝타임 중 빈번하게 등장하는 노조원들의 생일파티를 연상시키면서, KEC사측과 어용노조(KEC노동조합)에 의해 배제당하는 금속노조 구미지부 KEC지회(이하 KEC지회)의 위치를 환기하게끔 만든다. <깃발, 창공, 파티>는 KEC지회의 입장에서 노조투쟁을 따라가지만 어용노조 대 KEC지회, 혹은 투쟁의 앞면 대 뒷면이라는 이항의 대립구도를 형성하지는 않는다. 영화는 투쟁과 잔치가 함께 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의 투쟁과 잔치는 ‘투쟁=잔치’라는 하나의 이상향으로 제시되는 대신 ‘투쟁-잔치’라는 병렬구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한다. 이는 장윤미의 영화에서 구현되어 온 언어적 특징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장윤미가 지금까지의 작업에서 대상에 맞추어 언어를 다뤄 온 방식은 특기할 만하다. 만학도 어머니를 촬영한 <어머니가방에 들어가신다>,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할머니를 촬영한 <늙은 연꽃>, 감독 자신이 에세이 형식으로 직접 쓴 픽션을 읊으며 진행되는 <콘크리트의 불안>과 평생을 건설노동자로 일해 온 아버지를 다룬 <공사의 희로애락>에 이르기까지, 장윤미의 전 작업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특징은 경청이다. 장윤미의 작품은 말하기보다는 듣는다. 나레이션 혹은 자막을 통해 설명을 덧붙이지도 않는다. 카메라는 확고한 체계 속에 대상을 배치한 뒤 그 구조를 부각시키기보다는 대상의 활동을 그저 따라간다. 그 과정에서 대상에게 제일 익숙한, 혹은 대상을 담아내기에 가장 적합한 언어가 구사된다. 일관된 형식의 영상언어와 대상에 따라 달라지는 음성언어의 조합이 빚어내는 패턴이야말로 감독으로서 장윤미가 가지는 주요한 특질일 것이다. 따라서 장윤미의 카메라에는 ‘관망’이라는 시각적 표현보다는 ‘경청’이라는 청각적 표현의 수식어가 더욱 적합하다. 또한 장윤미의 영화들은 소위 사적 다큐멘터리의 카테고리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장 혹은 변화를 추구하고 있지는 않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성장이란 필연적으로 인과론적 구조 속에 위치해 있기 마련인데, 이는 목적론과 거리가 먼 장윤미식 화법과 동떨어질 수밖에 없다. <깃발, 창공, 파티>가 연출자의 적극적인 개입이나 편집 없이도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노동자들의 초상을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다. 이 영화는 1년 동안의 성장을 기록하기보다는 1년의 시간을 거치며 더욱 확고해지고 강력해진 존엄의 초상을 담아내고 있다.
KEC지회 노조원들이 존엄을 획득해나가는 방식 또한 언어를 통해서다. 영화 초반, 2018년의 KEC 노사 간 임금 단체협약을 앞두고 지회 내 간부회의에서 꼼꼼하게 회칙 개편안을 검토하는 씬이 등장한다. 기존의 회칙이나 노동자들에게 주입되는 마음가짐이 기업가 입장의 서술인 경우가 많았다면, <깃발, 창공, 파티>의 KEC지회 노조원들은 그 부조리를 간파하고 회칙의 주체를 노동자로 바꿔놓고 있다. 노동자들이 안전할 권리, 일할 권리, 그 두 가지를 사측에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점에서 해당 씬은 일종의 품위 내지는 존엄(dignity)을 획득한다. 어떻게든 임금을 적게 주고 불만은 최소화하며 협약의 문턱은 높이려하는 자본의 노림수를 KEC지회 간부들은 적확하게 읽어내고 간파한다. “문제를 모르면 못 바꿔나가요”라는 말마따나 조합원들은 회사의 임금등급제가 품고 있는 문제를 공유하고, 성과급제가 곧 임금삭감제도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여성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차별과 착취에 대해서 토론한다. 조합원들은 나아가 그들 자신의 언어로 대안을 창출하기까지 한다. KEC지회가 일관되게 밀고 나가는 대안인 단일호봉제는 자본이 그어놓은 미세한 위계의 금들을 타파할 수 있는 대책이다. 이들에게는 노동시간을 사회적 비용과 치환한 뒤 그에 걸맞은 임금을 요구할 수 있는 떳떳함이, 교섭의 정의를 “정확하게 노동조합의 힘만큼 따내는 것”으로 다시 내릴 수 있는 당당함이, 자신들의 공로와 위치를 객관화할 수 있는 명징함이 있다. 앎과 실천의 상호작용은 곧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으로, 노동자의 힘으로 수렴되어 간다.
공청회, 플랜카드, 단체협약 핵심요구를 풀어 써 붙여놓은 게시물, 사내 성폭력 대응 만화, 점심시간 중 일터에서 외치는 구호, 스티커, 이 모든 것들이 다 KEC지회가 구사하는 ‘언어’의 양상들이다. 전국민주노동자총연합 집회 현장에서는 공권력의 경고에 맞서 끄떡도 않는 언어들이 존재한다. 집회는 투쟁의 현장임과 동시에 이미옥 수석의 노상생일파티가 열리는 자리이기도 하다. 생일축하노래 직후에 최(저)임(금)개악 저지하자는 구호가 위화감 없이 뒤따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회사의 손해배상가압류 청구소송 대상자들에게 실시한 설문은 공적인 문항들과 사적인 서술의 여백이 교차하는 지면을 보여준다. “전혀 아니다/아니다/그렇다/매우 그렇다”는 네 가지 답변으로 재단되는 객관식 문항에서는 막힘이 없던 손이, “소송이 제기된 후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입니까?”라는 주관식 문항에 이르러서는 클로즈업된 채 한참을 망설인다. 이내 천천히 적혀 내려가는 글자는 앞서 던져진 활발한 음성의 자가진단과는 거리가 먼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래서 더욱 보는 이의 마음을 건드리기도 한다. 공과 사를 넘나들고 긴장과 이완을 번복하는 가운데 투쟁의 언어는 견고해진다.
<깃발, 창공, 파티>는 KEC지회가 민주노조 연합의 전통적인 투쟁집회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모습 또한 보여준다. 이는 곧 KEC지회가 구현하는 투쟁은 이 전통적인 투쟁의 언어와 차집합 관계가 아닌 교집합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증명인 셈이다. 그를 통해 영화는 고공농성 등 소위 전투적 투쟁주의로만 받아들여졌던 투쟁의 방식 또한 여러 가지 언어들과 다양한 초상들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환기시키며, KEC지회를 ‘투쟁의 모범’ 혹은 ‘이상적 노조’라는 우열의 구도 속에 놓는 행위는 지양하고 있다. KEC지회에게는 여러 모로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던 2010년의 직장 폐쇄 사건은 텔레비전 속의 자료화면으로 제시된다. 자료화면 속에서 배태선 국장의 입을 통해 노조원들에게 전달되는 내용은 강력하고도 명료하다. “저들의 도발에도 우리는 굴하지 않습니다. 굴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지켜야 할 마지막 자존심이기 때문입니다. … 우리 자신을 지킵시다. …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노동자 모두가 한 편이 된다면 우리는 가장 빠른 순간 안에 승리합니다.” 노조의 언어를 말살하려는 자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지난 8년간 KEC지회가 동일한 논리 위에서 투쟁의 언어를 갈고닦아왔음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다만 그 정련의 방식은 이전과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이전이라 함은 좁게는 남성 교섭 임원들이 노조의 중심이었던 2010년 이전을, 넓게는 앞서 KEC지회 또한 참여했던 민주노조연합의 투쟁집회와 같은 정통적이고 전투적인 형태의 노동운동의 계보를 말한다. 같고도 다른 변화의 중심에는 2010년 이후 등장한 여성 간부와 임원들이 있다.
이종희 지회장은 회의에서 “우리가 웃을 일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또 웃으면서 투쟁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며 혼자 앓는 사람이 없도록 서로서로 잘 챙기자는 취지의 말을 꺼낸다. 실제로 이들은 서로를 살뜰하게 보살핀다. 생일을 챙겨주고 틈날 때마다 고스톱을 치는 것은 기본이요, 염색을 도와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사무실에는 항상 계절과일을 비롯한 먹을거리들이 즐비하다. 계곡에서 고기를 구워먹거나 느긋하게 밤 산책을 나서며 회사가 본인들을 사찰하고 있을 거라고 낄낄대는 모습에서는 여유로움마저 느껴진다. 투쟁뿐 아니라 여가까지 조직해나가는 이들의 모습은 자연스럽다. 대부분의 장면에서는 여성임원들이 중심이 된다. 사실 중심이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노조 간부들은 성별과 관계없이 같은 층위의 평등함을 공유하므로 구도적으로도 대립각이 세워질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후술할 어용노조와의 관계에서도 동일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물론이요 잔치를 준비하듯이 옥수수 껍질을 벗기고 여성 동료들을 위해 여성의 날 기념품을 만들기도 하는 남성 노조원들의 모습은 이들 또한 동일한 영역에서 동등하게 공사의 언어를 나누고 있음을 드러낸다. 물론 간부회의에서나 임단협 요구안 검토의견 및 수정요구 문서의 작성에 있어서 주도적으로 언어를 만들어나가는 것은 여성 노조원들 쪽이다.
임단협 찬반투표는 <깃발, 창공, 파티>에서 절정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조합원들은 표 차이가 큰 부결을 목표로 했던 찬반투표에서 어용노조 측 결과가 가결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실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표를 끌고 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는데, 이 말은 곧 KEC지회의 언어에 어용노조가 설득 당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찬반투표가 부결되는 모습을, 다시 말해 승리의 결과를 보여주지만 연이어 등장하는 공적 언어는 “KEC, 임단협 8년 연속 평화적 무파업 타결”이라는 뜻밖의 결과를 알려준다. 어용노조와 사측이 적법한 투표 결과를 배제시킨 채 잠정합의안을 체결된 것이다. 그에 대한 KEC지회의 반응은 놀랍다. 실망스러운 결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주저앉거나 칼을 가는 대신 다시 한 번 언어를 품고 벼려나갈 채비를 다진다. 투쟁을 계속해오면서 완성을 거듭해가는 그들 언어의 공고함은 쉬이 무너지지 않는 종류의 것이다. KEC지회는 실제 싸움의 상대가 어용노조가 아닌 회사라는 점을 잘 알고 있으며, 자본의 노림수는 여러 노조들을 한데 몰아넣어 각 노조들 사이의 충돌을 야기하는 것이라는 사실 또한 잊지 않고 있다. 특히 KEC지회의 현장 상황을 전국의 민주노동조합원들과 공유하자는 의견은, 이들이 2018년의 투쟁을 하나의 총체이자 전체를 구성하는 일부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여기서 전체는 갇힌 전체, 닫힌 전체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전체, “일상에서의 꾸준한 투쟁으로 인해 (작동이) 가능”해지는 전체다. 그 자리에서 배태선 국장은 임원들에게 조합원들의 신뢰를 받는 만큼 책임을 다할 것을 요구한다. 신뢰와 책임은 곧 언어의 층위에 따라 통합적, 연합적 관계로 서로 연결되는 상호적인 통사론적 의존의 관계를 상기시킨다.
‘투쟁’이라는 말은 단지 실천만이 아니라 언제나 이론과 연결되어 있다. 노조 임원에게는 투쟁성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와, 그를 통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조직하는 과정이 요구된다. <깃발, 창공, 파티>는 그때에야 비로소 진정한 투쟁이 가능하게 되며, 나와 조직과 세계를 들여다보는 새로운 렌즈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점을 알리고 있다. 같은 깃발 아래 같은 창공을 바라보는 이들의 잔치는 자본이 진화했듯이 노동자와 투쟁 또한 진화했음을 알려준다. 한편으로 이는 상대적 피지배 억압집단인 여성 일반의 문제로도 읽힐 수 있다. 피지배계층끼리 싸움을 붙임으로써 경쟁시키고 연대할 수 없도록 만드는 수단은 문명사적으로 지배집단 쪽이었던 남성이 여성 집단을 억압해온 논리와 유사하다. 자본의 논리에 속지도, 갇히지도 않는 KEC지회의 강건함을 여성운동이 나아갈 방향 혹은 대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유다. 에필로그에서 임원 황미진이 인용한 독일 제3제국 시기 마르틴 니묄러의 금언은 그 자체로 투쟁의 당위성을 역설한다는 점에서 앞서 배태선 국장이 요구한 노조 임원들의 책임감을 대변한다. 이들은 또한 다른 언어를 전유하여 자신들의 언어를 강화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언어의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는 가운데 연대는 점점 더 강력해진다. 바로 거기서부터 썩지 않는 논리와 힘과 품위가, 그 무엇에도 꺾일 수 없는 품위가 만들어진다.
(202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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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조사 + 정리 일색이고 답답하고 꽉 막힌 20세기 영화 이론 정신(영화를 읽어야 하는 언어-텍스트로만 바라보는)에 입각해 쓰여서 너무... 너무다... 나는 내가 진짜 잘 써야겠다고 각 잡고 쓴 비평들 너무 촘촘하고 꽉 막히고 답답하고 숨 막히고 무엇보다 핵노잼이어서 못 읽겠ㅋㅋㅋ더라ㅠㅠㅠㅠ 장윤미 감독님 너무 좋아하는데...그래서 힘이 들어갔고 결과적으로 실망스러운 글이 탄생하고야 말았다. 그때 봐도 별로였고 지금 봐도 진짜.... 재미 없고 답답하고 딱딱하고 새롭지도 그렇다고 똑똑하지도 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