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상현 Aug 13. 2020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여성 연대 : <세 개의 얼굴>

<세 개의 얼굴>(2018), 자파르 파나히.



자파르 파나히의 신작인 <3개의 얼굴들>은 스마트폰 영상으로 보이는 소녀의 다급한 얼굴에서 시작된다. 스스로를 ‘마지예’라고 소개한 아이는 자신이 시골마을에서 자라왔으며, 배우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부모님과의 거래 조건으로 약혼을 했고, 열심히 공부한 결과 테헤란의 예술학교에 수석으로 입학 허가를 받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합격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이 태세를 바꾸어 진학을 허락해주지 않는다면서 뜻을 거슬러 학교에 간다면 자신은 죽게 될 거라고 울먹인다. 마지예는 TV 연속극의 주연배우로 누구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자파리’에게 몇 번이고 메일을 보내 가족들을 설득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자파리에게서 대답은 없었으며 때문에 자신은 유언이 될 이 영상을 보낸 뒤 자살로 생을 마감할 거라고 예고한다. 마지예는 밧줄에 목을 걸고 발을 구른다.



화면이 전환된다. 초췌한 얼굴의 여성이 조수석에 앉아있다. 히잡 아래 화려한 주홍빛 머리카락이 구불거린다. 마지예가 영상 편지를 보낸 대상인 배우 자파리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을 통해 영상을 전달받은 자파리는 이전 스마트폰의 모든 기록을 뒤져봤지만, 마지예가 보낸 문자나 메일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자파리는 이 영상이 한 소녀의 장난에서 비롯된 연출일 거라고 의심하면서도, 그녀 자신의 양심에 이끌려 감독과 함께 마지예의 고향마을로 향한다. 그곳은 페르시아어가 통하지 않을 만큼 깊은 산악지대다. 어머니로부터 배운 터키어를 더듬더듬 말할 수 있는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자파리와 마을 사람들 사이의 유일한 교량이 된다. 두 사람은 마을에 그 어떤 죽음이나 매장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마지예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시건방진 골 빈 것’ 취급을 받는다는 것도 알게 된다. 벽촌의 사람들은 인기 배우 자파리와 유명 감독인 자파르 파나히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러 왔다”라고 생각하여 환영하지만, 두 사람이 마지예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밝히자마자 불쾌해하며 등을 돌린다. 마지예의 집에는 누나가 제 소유인 양 날뛰는 난폭한 남동생(당장에라도 명예살인을 저지를 것만 같고, 실제로도 실행에 옮기겠다고 주장하는)과,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여동생, 아들을 제지할 힘이 없는 연약한 어머니가 있었다. 두 사람은 영상 속 마지예가 언급했던 ‘마에데’라는 소녀도 만나지만 마에데는 마지예가 실종된 것조차 모르는 양 보인다.



우여곡절 끝에 마지예가 나타난다. 마지예는 무사했고, 역시 마을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노파 ‘세헤라자데’의 외딴집에 숨어 있었다. 영상은 자파리를 유인하기 위한 가짜였다. 진로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될 막막한 상황에 놓여 있는 건 사실이다. 자신이 소녀의 자살에 책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눈물을 보일 만큼 마음고생이 심했던 자파리는 울면서 애원하는 마지예를 마구 때리고 욕한 뒤 그 자리를 벗어난다.



마을을 떠나려는 두 사람의 차는 오래 가지 못하고 멈춘다. 좁은 길의 정중앙에 주저앉은 병든 소 때문이다. 이 마을의 길목은 차 두 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없을 만큼 좁은지라, 마을 사람들은 경적을 울려 신호를 주고받는 규칙을 만들었다. 한 번 누르면 “나 지나간다”, 두 번 누르면 “급하니까 양보해달라”, 그 뒤 한 번을 더 길게 누르면 “정말 급한 일이니 꼭 지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앞서 마을 사람에게 배운 대로 경적을 울리지만, 길을 가로막은 것이 차가 아닌 소인 이상 신호가 받아들여질 리가 없다. 소의 주인은 차라리 안락사를 시키라는 감독에게 이 소가 어떤 소인 줄 아느냐고, 번식력이 왕성하기로 유명한 ‘황금 불알’의 소라고, 바로 다음날로 예정된 마을 축제에서 어린 암소들을 잔뜩 실은 트럭이 올 텐데, 한 탕 벌 기회를 놓칠 순 없다고 거부한다. 자파리가 조수석에서 내린다. 말 못 하는 소의 곁으로 다가가 가만히 그 얼굴을 지켜보던 자파리는 문득 차를 돌려 다시 마을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마지예를 용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마지예가 3일 동안 가출하고도 발각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세헤라자데의 집이 마을에서는 공공연한 금단의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젊었을 때 춤을 추고 노래도 하는 배우였다는 게 이유다. 촌장 등 남자를 주축으로 한 마을 사람들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세헤라자데는 들판에 나와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쓰고, 벽에는 과거 자신이 출연했던 영화 포스터를 붙이는 등 본인만의 세계를 지켜 나간다. 그만큼 예술을 사랑하는 그녀가 배우를 그만두고 폐쇄적인 산골마을로 들어오게 된 것은 이란 영화계의 감독들(아마도 대부분, 아니, 분명코 전부 다 남자였을)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지나가듯 언급된다. 남자이자 영화 연출자인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세헤라자데에게는 썩 달갑지 않은 존재이다. 때문에 감독은 세헤라자데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다. 카메라 또한 집 외관만 보여줄 뿐 내부와 집주인의 얼굴은 보여주지 못한다.

젊은 마지예가 스마트폰 영상에 얼굴을 비췄고, 중년의 자파리가 TV 매체에 얼굴을 비추는 데 비해 과거를 삭제당한 존재인 세헤라자데는 시네마의 영역에서조차 재현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도피와 거리가 먼 능동적 거부이자, 가부장적인 이란 사회 내에서 남성들의 통제 밖 문화 영역도 존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이데올로기적 저항이다. 마지예와 자파리만이 세헤라자데의 작은 세계에 초대받을 수 있는 이유는, 이들이 이란 여성의 세대를 대표하는 얼굴로서 세헤라자데가 겪었던 과거의 아픔을 공유하고, 미래를 공모할 수 있는 젊은 여성 예술인들이기 때문이리라.



이튿날 자파리는 마지예의 집으로 향하고, 함께 들어가려는 감독에게 “이것은 여자들이 더 잘하는 일”이라고 만류한다. 마지예를 찾는 여정은 자파리와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함께였지만, 마지예의 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는 감독이 빠지게 된다. 남성적 폭력이 지나간 자리에는 폐허가 남는다. 그를 재건하고 화해시키는 것은 여성들의 몫이다. 완고했던 세헤라자데마저도 감독에게 자신이 직접 쓴 시집을 건네며 (자파리의 손을 빌어서긴 하지만) 화해의 제스처를 취한다.

남자들로부터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자기 집에서 하룻밤 묵고 가라는 마을 남자들의 친절한 초대를 받고(거부한 결과, 다 들리도록 뒷말도 듣는다.), 아들의 대부가 되어달라는 정중한 편지와 함께 포장된 꾸러미도 받는다. 꾸러미 안에 들어있는 것은 소금에 절인 남자아이의 귀두 포피다. 꾸러미를 건넨 노인은 할례 의식 때 잘라낸 살점을 ‘좋은 곳’ 근처에 묻으면 아들의 미래도 덩달아 밝아질 거라는 미신을 믿고 있다. 그 결과, 아이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유명 감독에게 대부가 되어 포피를 책임지고 묻어 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 것이다. 전작 <택시>에서 그러했듯 감독은 미신에 깊게 빠진 사람의 부탁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지는 않는다. 한 가지 더, 감독의 차창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젊은 남자가 있다. 마지예가 배우가 되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던 그 남동생이다. 부모가 제 누나의 편을 들기 시작하자 울그락불그락한 얼굴로 분을 못 이겨 날뛰는데, 건장한 체격의 청년이 어째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다. 청년은 눈에 띄게 풀이 죽어 보인다. 하지만 자파르 파나히 감독을 쫓는 그의 집요한 시선에서는 폭력을 향한 끊임없는 갈망이 느껴진다.



다음 장면에서 자파리와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다시 함께다. 두 사람은 차를 타고 수도로 돌아가는 중이다. 차 전면 유리창의 우측 하단부에는 전에 없이 깨진 부분이 있는데, 마지예의 선량한 남동생이 작별을 기념해 만들어준 듯하다. 차는 좁은 길목에서 어린 암소들을 한가득 실은 트럭을 맞닥뜨린다. 전날 만난 소 주인이 말했듯이 축제가 열릴 것이고 교배가 시작될 것이다. 두 대의 차량이 진퇴양난에 빠진 가운데, 자파리가 바람을 쐬고 싶다며 내려서 걷겠다고 말한다. 카메라는 운전석의 위치에서 감독의 시선으로 고정된 채, 천천히 저 너머로 이동하는 자파리의 뒷모습을 담는다. “자파리님! 자파리님!” 자파리를 소리쳐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하얀 빛깔의 히잡을 휘날리며 마지예가 뛰어오고 있다. 자파리는 잠시 멈춰 서서 마지예가 자신을 따라잡도록 허락한다. 손을 꼭 잡고 함께 걷는 두 사람을 카메라는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귀두 포피가 담긴 꾸러미와 금이 간 차창 또한 앞서 걸어 나가는 두 여성의 뒤편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전작 <택시>에서 이란 사회의 지배적인 질서가 사회와 그 구성원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스며들어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었다. <3개의 얼굴들>에서 감독이 비판하는 대상은 잔존하는 가부장제로 옮겨간다. 감독은 마지예와 자파리와 세헤라자데를 통해 남성에 의해 통제되는 이란의 문화예술계와 각각의 가정이 여성 문화예술인들에게 얼마나 가혹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 중 가장 나은 처지인 자파리마저도 마지예가 걱정되어 촬영장을 무단이탈했다는 이유로 스텝한테 심한 욕을 듣는다. 문화예술 분야에 종사했거나 종사 중인, 혹은 종사하고자 하는 이란 여성들에게 삶의 위협은 일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감독은 여성들을 지배하고 억압하며 착취하는 가부장제가 좌초되어가는 선박이나 다름없는 상황임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예술의 가치를 알고 서로를 도우며 대화로 갈등을 해결하는 여성들에 비해 영화 속 남성들은 부정적으로 묘사된다. 길을 넓힐 생각을 하기보다는 자기들만의 폐쇄적인 신호를 개발하여 불편한 통행을 거듭하고, 촌장이 시킨 대로 손님에게 묵어갈 것을 권하지만 손님의 거절을 받아들일 아량은 부족하며, 구시대적인 미신과 폭력의 맹아盲啞―소금에 절여 놓은 귀두 포피와, 분풀이로 만들어진 깨진 유리창―들이기도 하다. 그들의 무용한 사고방식과 일상화된 폭력성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파괴 본능이 갈 길을 잃고 고착된 결과로서의 퇴행처럼 보인다. 병든 수소는 착취와 퇴행의 메커니즘에 가담하는 남성들이 종국에 가서는 희생자로 전이되어 파멸을 면할 수 없을 것임을 예고하는 은유나 마찬가지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 본인도 예외가 아니다. 선의를 가지고 영화 속 여성들을 돕는 입장이라고는 하나, 감독 또한 남성 중심적인 이란 사회와 문화예술계에서 알게 모르게 수혜를 받았을 사람이다. 그와 같은 연대 책임을 결코 좌시할 수는 없다는 것을 영화는 후반부의 엄격한 역할 배제와 공간 분리를 통해 보여준다.



엔딩에서 나란히 앞서 걷는 자파리와 마지예의 모습을 보면,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새로운 질서를 추동할 주역은 남성이 아닌 여성이 될 것이고 이들은 세대를 넘어서 연대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듯하다. 그런 한편 씨받이로 소모될 운명에 놓인 어린 암소들이 있다. 너무도 당연하게 운용되어왔으나 생각해볼수록 잔혹하기 짝이 없는 굴레다. 이 굴레가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여지려면 얼마나 오랜 노력과, 많은 희생양이 필요할까. <3개의 얼굴들>은 꺼림칙한 생산과 재생산의 연쇄를 최종 청사진에 끼워 넣음으로써, 그 암소들과 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이란 여성들은 여전히, 너무도 많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자본이 휩쓸고 간 빈터에 남은 그 무엇 : <강호아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