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곳니>(2009), <더 랍스터>(2015), <킬링 디어> 외.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연출한 영화들은 하나같이 폐쇄적인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송곳니>에서 <더 랍스터>, <킬링 디어>와 <더 페이보릿>으로 이어지는 란티모스 영화의 계보는 자체적인 규칙과 원리 하에 엄격하게 프로그래밍된 사회를 보여주고 있다. 각각의 영화는 엄혹한 분위기 속에서 극도로 수행성을 띠게 된 인물들의 말과 행위를 조명하는데, 이는 형식적으로 영화(자연주의적으로 촬영되었음을 전제한)보다는 부조리극(연극)에 가까워 보인다. 란티모스 월드의 특징이기도 한 수행성과 조형성, 풀 쇼트의 빈번한 사용은 현실세계와 영화 세트 사이의 경계를 명확하게 인지하도록 만든다. 정상성에서 비껴나간 극 중 사회의 가치 체계는 너무도 태연하게 통용되는 반면 부조리함은 우스꽝스러울 만큼 투명하게 드러난다. 때문에 란티모스 영화는 종종 보는 이들의 실소를 자아낸다. 그러나 각각의 사회가 담지한 비정상성은 극 중 인물들에게 실제적인 폭력을 행사한다. <송곳니>, <더 랍스터>에서 나타나는 폭력의 강도는 조금도 우습지 않다.
란티모스 영화 속 비정상사회들은 역으로 우리 사회가 강요하는 정상성의 수행에 대한 각성을 유도한다. 각성은 곧 현실이 은폐한 가치 체계의 범주화에 대한 고민으로, 지배 계급과 통치 체제가 채택한 것들의 작동 원리를 의심하는 과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들을 집단과 개인의 관계에 대한 알레고리로, 전체주의적인 폭력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 반-ISA 장치의 역할을 수행해내는 예술작품으로 독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작업에는 결정적인 맹점이 존재하는데, 이는 란티모스 감독의 작가성을 인정하더라도 그의 작업을 마냥 긍정할 수만은 없게 만들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글의 말미에서 다시 언급하게 될 것이다.
<송곳니>는 기호 자체가 외부 세계와 다르게 설정되어 있는 가부장의 울타리에 갇힌 가족들을 보여준다. 울타리를 경계로 위험한 ‘적’들의 세계와 안전한 가장의 공간이 나뉜다. 극 중 자녀들은 사랑이라는 명목 아래 순종과 순수성을 강요받는다. 그 강요는 폐쇄적인 집단이 순수성을 고집할 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예시인 근친상간 행위의 지시로까지 이어진다.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큰딸의 욕망은 죄가 되고, 결코 흔들리지 않을 송곳니를 매개로 한 거짓 희망은 가장이 예상하지 못한 결말을 낳는다.
<킬링 디어> 속 가장(家長)은 안전을 가장(假裝)해 보일 만큼의 위력을 발휘하지도 못한다. <킬링 디어>는 현대사회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등가교환의 프로그램을 요구하는 한 소년으로 인해 발생하는 가정의 균열과 파국을 조명한다. 균열의 원인이 되는 것은 소년의 입을 빌어 나온 신탁, 즉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하려 들어서도 안 되는 초자연적인 힘이다. 그로 인해 드러나는 진짜 문제는 가족 체제를 유지시키는 신뢰와 사랑, 이타심과 같은 가치체계가 실상 허울뿐이었다는 점이다. 가족들은 치명적인 손상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그런대로 영위해 나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한번 허위를 깨달은 이상 그들의 삶은 결코 전과 같이 작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 페이보릿 : 여왕의 여자>는 사랑과 권력을 욕망하는 세 여자 간의 파워게임을 시대극의 외양을 빌어 재현하고 있다. 권력도, 권력자도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라는 앤 여왕에게 입에 발린 말을 할 수 없었지만, 권력이 주는 안온함 자체만을 사랑한 아비게일은 여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 그녀에게 무엇을 제공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극 초반에 우위를 점하고 있던 사람은 사라였다. 사라와 앤 여왕은 서로 사랑하는 관계였으며 두 사람 사이의 신뢰는 역사가 깊었기 때문이다. 사라는 바로 그 사랑을 이유로 자신의 관점, 자신의 욕망, 자신의 정의를 정직하게 피력한 결과 아비게일과의 게임에서 패배하고 만다. 사라가 굴러 떨어진 게임판 위에 남은 것은 권력과 아첨의 암묵적인 합의 하에 이루어지는 거래관계다. 거기에 사랑은 없다. 영화의 끝에 가서야 앤 여왕과 아비게일은 자신들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는 각각의 지옥도 속에서 자기 역할을 수행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더 랍스터>는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필모그래피 중 사랑에 대해 가장 직접적으로 냉소를 보내는 작품이다. 그러나 영화를 뜯어볼수록 이 작품이 보내는 냉소는 사랑 자체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더 랍스터>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본질적인 특징, 즉 우발성을 통제하려 드는 사회의 두 단면을 이항대립 구도로 제시한다.
‘호텔’ 사회는 한 명을 인정하지 않고 한 쌍을 강제하는 사회다. 제한된 시간 내에 자신의 짝을 찾지 못한 이들은 인간의 외피를 포기하고 동물로 ‘변신’되어야 한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서는 인간이 신들의 변덕 혹은 진노, 드물게는 자비로 인해 동식물로 변화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고대의 세계관에서는 인간이 현실과 다른 차원으로, ‘지금, 여기’의 자신과 다른 존재의 차원으로 건너가는 일이 지금보다 더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졌다. 문제는 <더 랍스터>가 보여주는 호텔 사회의 변신은 구성원들을 포용한다기보다는 배제하는 방식으로, 부조리한 가치체계와 엄격한 프로그래밍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호텔에 감금된 사람들은 주로 자신과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 이들을 짝으로 택한다. 때문에 호텔 사회 속 사랑관은 인간(남성)이 동류(남성)와 완전한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고대 그리스적 가치의 연인 관계와 닮아 있다. 이는 플라톤의 <향연>에서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들려주는 완전성의 신화를 연상시킨다. 인간은 본디 하나였으나 그 완전함을 경계한 제우스에 의해 두 갈래로 찢어진 뒤, 헤어진 반쪽을 애타게 그리워하며 하나 됨을 열망하게 되었다는 우화 말이다. 사실 호텔의 지배인 부부가 그 반쪽을 끝내 발견하지 못한 이들에게 내리는 일종의 처벌은 아리스토파네스의 그것보다는 차라리 파우사니우스의 논리에 가까워 보인다. 파우사니우스는 사랑에 위계를 매겨 좋은 사랑과 나쁜 사랑으로 구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사랑의 감정을 인위적으로 발생시키거나 통제하려 드는 호텔 사회의 시도만큼이나 그 본질(자연발생적이고 우발적인)에 반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호텔 사회는 홀로 된 떠돌이들을 사냥하는 과정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타락한 아곤, 즉 안타곤의 장을 펼쳐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의 경쟁은 명성의 획득을 위해 신체와 지성의 부단한 단련을 거친 뒤 정정당당하게 승부한다는 본연의 의미를 잃은 지 오래다. 그런 면에서 <더 랍스터>의 호텔 사회는 고대 그리스 세계의 뒤틀리고 변형된 껍데기를 입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반대편에는 짝짓기를 거부하는 ‘숲’ 사회가 있다. 숲 사회는 사랑을 아예 불순물 취급하며, 구성원들로 하여금 함께 행동하면서도 독신으로 존재할 것을 종용한다. <더 랍스터>가 취하고 있는 양 사회의 이항대립 구도에 비추어 봤을 때 숲 사회는 안티-변형 그리스적 세계로 명명될 수 있을 듯하다. 요컨대 숲은 개인의 존재를 처음으로 인지하고 그 가치를 설파했던 근대적 인간관에 따라 형성된 사회이며 그 외양은 비교적 현대사회에 가깝다. 데이비드와 근시 여자가 커플인 척 가장하고(정말은 그들이 실제 커플이라는 것을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위장의 위장이며, 진실의 구현이지만) 도시로 나간 장면을 떠올려 보자. 숲 사회의 규율은 전원 다 암묵적으로 동의한 가운데 부자연스럽게 역할의 분담과 수행이 이루어지는 호텔 사회의 허위적 위장과 달리 ‘자연’스럽게 보인다. 그 작동 원리 또한 보다 은밀하다. 숲의 리더와 그 측근이 독신이기를 위반한 근시 여자를 처벌하기 위해 안과에 데려가는 과정이 군더더기 없이 자연스러웠음을 떠올려 보자. 적어도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의식’을 치르게 해주는 호텔 사회와 비교해 보았을 때 숲 사회가 규율을 어긴 개인을 단죄하는 방식은 조용하고 매끄럽고, 그래서 더욱 치명적이다. 고립된 규율 사회는 눈에 보이는 폭력을 행사하지만 보다 넓은 의미의 사회 일반은 훨씬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내밀면서 개인이 특정 규격에 자신을 끼워 맞추도록 압박한다. 그런 점에서 란티모스야말로 그리스 비극의 초연한 절망과 오늘날 신자유주의 사회의 허무주의적 절망을 가장 잘 연계시키고 있는 작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 비극은 신의 정교한 트랙에 휘둘리는 인간의 무력함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리스 비극은 인물들이 신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자연-폭력 앞에서 그들 자신의 성격적 특질이라는 또 하나의 자연(비할 바 없이 취약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자연적인 질서를 가지고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맞서는 과정을 보여준다. 요컨대 인간은 제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최선의 결정은 최악의 실수가 되며, 결과적으로는 거대한 초자연의 힘 앞에서 패배하게 된다. 그리스 비극의 숭고함은 역설적으로 인물들의 인간적인 약점이 야기한 패배에서 빚어진다. 그들은 인간이기 때문에 고집을 부렸고 인간이 으레 그렇듯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밝혀지지 않는 편이 나을 그 자신의 근본으로 향하는 모든 과정을 앞장서서 진두지휘한 오이디푸스를 떠올려보자. 자신이 믿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 최고 권력자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가 산 채로 죽은 자들의 세계에 갇히고 만 안티고네는 또 어떠한가. 비단 이들 부녀뿐만이 아니더라도 그리스 비극은 자기 자신의 파멸을 향해 있는 힘껏 채찍질을 하는 인물들로 가득하다. 메데이아는 본인이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지르려는지 알면서도 이성보다 더 강한 분노의 힘에 스스로를 내주었다. 인간으로서의 메데이아 자신은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리라. 아이아스는 광기가 자신의 온몸을 지배하도록 승복한 뒤 마지막에는 명예를 지키기 위한 죽음을 향해 직접 몸을 던졌다. 인간으로서의 아이아스 자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리라!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 모두가 운명에 끌려다니면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다는 기이한 역설을 획득한다. 그러나 란티모스 월드에서 신적 폭력의 주체는 불가해한 자연이 아니라 인위로 설계된 프로그래밍이다. 주체 혹은 대항마가 되어야 할 인간은 인간은 자기 자신을 발현해 보이지 못하고 사그라들 수밖에 없다.
플라톤의 <향연>이 흥미로운 지점은 철학이 기존의 서술 방식을 탈각시켰다는 데서 나온다. 하나의 완성된 체계로서 정합성을 담보해야 하는 철학은 처음부터 회고라는 불완전한 방식을 통해 소환되며, (딸꾹질하는 사람과 만취한 채 등장하는 사람 등의) 불균질한 요소가 계속해서 끼어든다. <향연>은 그 빈틈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는다. 초대받은 이들과 초대받지 않은 이, 비극 작가와 희극 작가, 의사와 철학자가 한데 모여 사랑의 본질에 대해 논하고 각자가 생각하는 사랑의 가치를 겨루어보는 이 자리에서는 철학 텍스트가 지켜야 할 질서도, 한 사람의 승자를 내세워야 하는 아곤의 규율도 통하지 않는다. 이들의 논의 주제인 사랑 자체가 질서나 규율에 끼워 맞춰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영화의 비극은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끼워 맞춰지지 않는 것들이 끼워 맞춰지기를 강요받는다. 자연발생적인 욕망은 인간이 만들어낸 집단의 논리에 귀속되어야 한다. 법은 규율에 응하지 않는 개인에게 언제나 응징을 가할 준비가 되어 있다. 사회 전반에 걸쳐 그와 같은 폭력의 경고가 무겁게 드리워져 있다. 그들 사회에서는 통치 체제가 선택한 단성적 진리만이 정답이며, 다성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질 수 있는 장(場)으로서의 공동체는 허락되지 않는다. 둘이 짝을 이루어야만 완전해질 수 있다는 호텔 사회의 강요는 인간이 단독적인 존재로 홀로 설 수 없다는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며, 홀로 존재할 때만이 완전할 수 있다는 숲 사회의 원칙은 서로 다름을 끌어안고 관계 맺는 일 자체에 대한 기피에서 기인한 것이다. 두 사회는 영화 안에서 대립 구도를 취하고 있을지언정 자연으로서의 개인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개별적인 체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숲도 호텔도 모노포니의 음률만이 울려 퍼지는 세계다. <더 랍스터>가 자아내는 기이하고 음산한 정취는 우리에게 사랑과 욕망이 프로그래밍 밖 예외의 것이라는 사실과, 각각의 성부가 독립성을 유지한 채 따로 또 같이 흐를 때에만이 개인들의 건강한 공존이 가능하다는 진실을 환기시킨다.
데이비드는 호텔 사회에서는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과 억지로 짝을 맺고 싶지 않았지만, 숲 사회에서는 마음이 끌리는 상대와 마음껏 사랑하고 싶어 했다. <송곳니>의 큰딸은 가부장의 억압을 떠나 자유로워지고 싶었고, <킬링 디어>의 가족들은 그저 살고 싶었다. <더 페이보릿>의 세 여인은 사랑과 권력이 가져다주는 안정성을 욕망한다. 인간으로서 당연하게 가질 수 있고, 당연한 만큼 강렬하게 분출되는 감정들은 빈틈없이 짜인 시스템에 부딪힌다. 시스템의 부조리한 작동 원리는 충돌로 인해 부각되고, 한 번 그 사실을 인식한 개인은 결코 전과 같이 순응하며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손을 쓸 수도 없다. 란티모스가 그려내는 개인은 무력하다. 부조리한 세계는 붕괴되지 않는다. 체제의 비정함도 바뀌지 않는다. 그 거대한 질서를 신으로 상정한다면,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신이 설계해놓은 질서를 따라 걸어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이라는 그리스 비극의 전통적인 계보를 재현하고 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위에서도 말했듯이 오늘날의 신들은 <변신 이야기>의 종잡을 수 없는 신들과는 다른 견고하고 빈틈없는 거대 시스템으로 표상된다. 신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체제의 부동성 앞에서 보이는 인간의 무력함은 란티모스 영화가 제공하는 경험을 카타르시스적인 쾌감과는 거리가 먼 씁쓸함으로 귀결시킨다. 그런 점에서 란티모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권장하는 전통적인 서사시 작법에서 벗어나 있는 이단적 계승자이기도 하다.
진실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는 단순히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 지어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이데올로기는 억압 기제를 유지시킨다는 점 때문에 부정적으로 사유되곤 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가장 큰 구성 성분(혹은 이데올로기의 다른 이름)이 ‘믿음’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았을 때, 이데올로기를 단순히 제거되어야 할 ‘나쁜 것’으로 볼 수만은 없다. 개인은 사회를 등지고 살아갈 수 없다. 사회 속의 개인이 삶을 버텨내기 위해서는 그 자신의 ‘믿을 수 있는’ 가치를 발견하고 지켜나가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은 모두 다 진리일 거라는 <향연> 속 등장인물들의 믿음은 일종의 판타지다. 이를 거칠게 등식화하면 모든 진리는 곧 판타지라는 등식을 세울 수 있다. 이 가정은 일견 끔찍해 보이지만 판타지라고 해서 나쁘게만 볼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취약하고 무력한 인간이 과연 믿고 바라볼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진리 없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진리에 대한 판타지는 반드시 필요한 삶의 조건이다. 대중영화는 이데올로기의 논리에 따라 작동하면서도 이데올로기가 가장 두려워하는 진실을 타자의 외피를 입혀 재현하는 과정을 수행해 보인다. 비록 타자는 극 중에서 철저하게 제거됨으로써 이데올로기가 주는 안정성에 균열을 가하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는 드러내어 말할 수 없는 결핍이 극영화의 형식을 빌어 가시화된다는 점에서 대중영화는 분명 가치가 있다.
모던 시네마 감독들이 대중영화 씬에 등장하여 주목받던 1962년, 앤드류 새리스는 영화에서의 작가주의 이론을 정립한다. 새리스는 영화 작가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 작품은 특징이 될 수 있는 형식적인 기법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둘째, 그 기법은 해당 작가의 고유한 서명으로 인식될 만큼 패턴화되어 있어야 한다. 셋째, 그 패턴은 비단 형식뿐 아니라 내용적 측면에서도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첫 번째 조건과 두 번째 조건에 부합한다.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작가로서 보여주는 패턴(연극적이고 장식적인 세트, 철저한 좌우 대칭, 채도가 낮은 컬러 화면, 인물들의 부조리한 말과 행위 등)은 허구 중에서도 가장 허구 같은 세계를 구성해 보임으로써 진실의 끔찍한 공백을 들여다보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란티모스는 공백을 대체할 그 무엇도 제시하지 않는다. 흔히들 대안으로 거론하는 사랑도 무용하다는 사실을 일깨울 뿐이다. 영화로 인해 인지된 공백을 감당해내는 것은 오롯이 관객의 몫이다. 그와 같은 허무주의적 함의를 생각해보았을 때 란티모스 영화가 국내 개봉한 아트하우스 계열 영화 중에서는 대중적인 입지를 확보한 것이 신기할 지경이다. 현상 진단의 역할만을 잘 수행한다고 해서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있을까. 냉소는 누구나 지을 수 있다. 냉소로 가능해지는 위트는 이 세상에 이미 차고 넘친다. 란티모스 월드의 초월적인 시선은 곧 신의 위치를 담지할 때 나오는 것이며, 란티모스는 어떠한 ‘그 너머’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직무 유기를 저지르는 신이 아닐는지.
‘믿고 따를 수 있는 가치’가 뚜렷하게 관념으로 존재했던 고대 그리스 사회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사회는 너무도 다르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지금, 여기’의 폐허에서 조소하거나 연민하는 대신 ‘그 너머’를 바라보아야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영화가 ‘좋은’ 작업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지금, 여기’를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 ‘그 너머’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로써 우리가 단일한 믿음이 아닌 다수의 믿음,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취사선택할 수 있는 복수의 이데올로기를 마주할 수 있다면, 게임판 위에서 살아야 한다고 하더라도 그런대로 받아들일 만한 역할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