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태인 Aug 13. 2020

이례적 영역에서의 시적 다큐멘터리의 작동 방식

<위로공단>(2014), 임흥순.



존 그리어슨은 ‘다큐멘터리’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하면서, “‘다큐멘터리’는 사실적인 것의 창조적인 표현”이라고 규정했다. 나는 그리어슨의 정의에 반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개론서를 작성하기 위한 것이 아닌 한 “다큐멘터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개인의 주관(혹은 경험)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질문을 자문해 본 사람 중에서는 특정 다큐멘터리와의 특별한 만남을 경험해본 이들도 있을 것이다. 특정 다큐멘터리가 레퍼런스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만남은 본인의 주관이 들어간 해석이자 본인의 역사로 가능해진 경험이기 마련이다. 결국 “(내게) 다큐멘터리란 무엇인가?” “(내겐) 어떤 다큐멘터리가 좋은 다큐멘터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각자의 대답에는, 그 자신이 세계(혹은 대상)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 자신과 세계(혹은 대상)가 관계 맺는 방식이 어떤 식으로든 반영될 것이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가지고 있는 한, 나는 어떤 다큐멘터리와 만나더라도 대화를 시도해 볼 자신이 있다.

이번 학기에 와서야 다큐멘터리의 정의와, 어떤 다큐멘터리가 좋은 다큐멘터리인지에 대한 개인적인 기준을 세울 수 있었다. 내게 다큐멘터리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 정확히는 자기 눈으로 본 어떤 이야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좋은 다큐멘터리는 ‘좋은 대화를 이끌어내는, 자기 눈으로 본 어떤 이야기’이다. 좋은 대화는 수신자로 하여금 반응reaction이 아닌 응답response을 이끌어내게 되는데, 이는 다큐멘터리의 영역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좋은 다큐멘터리는 자기 안에 고립되지 않고 세계를 향해 말 걸기를 시도한다. 그로써 관객을 스크린 너머의 객석이라는 고립과 단절에서 이끌어낼 수 있다면, 그 다큐멘터리는 좋은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다큐멘터리를 수사修辭의 한 종류로 바라본다면, 다큐멘터리의 말 걸기에도 여러 가지 방식이 있음을 전제하게 된다. 이에 대한 가장 대중적인 분류체계는 빌 니콜스의 양식론이다. 그 안에서 임흥순의 <위로공단>(2014)과 험프리 제닝스의 <리슨 투 브리튼>(1942)은 시적 다큐멘터리로 분류될 수 있을 것 같다. 니콜스 또한 다큐멘터리를 논리나 스토리텔링보다는 수사학적 전통에 위치시키고 있다. 다큐멘터리가 “논쟁적인 쟁점에 대해 특정 관점이 옳다는 확신을 심어주거나 믿음을 고취시킬 목적”1)을 가지고 있다면, 수사학적인 배치를 하는 작업은 그만큼 중요해진다. 배치는 수사적 연설이나 영화에서 부분들을 위치시키는 통상적인 순서다. 니콜스는 배치에 있어 증거(사실)에의 호소와 청중(감성)에 대한 호소를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고 말한다.2) 즉 “그 주장을 개인과 관계없는 추상적인 논리 영역이 아닌 구체적인 경험과 역사적인 상황의 영역 내에 위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시적 양식을 가진 다큐멘터리는 원재료가 되는 역사 세계를 특정한 방식―일련의 단편들, 주관적인 인상, 비연속적 행위 및 느슨한 연결관계―으로 재현한다.3) 결과적으로 시적 다큐멘터리에서는 수사적인 요소를 통한 믿음의 확보보다는 분위기, 톤, 정서적인 감흥이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위로공단>에서 두드러지는 이미지는 자연물을 담은 쇼트와 눈을 가린(혹은 얼굴을 보이지 않는) 여성들이 행하는 일종의 퍼포먼스다. 이와 같은 인서트 컷은 영화의 내용이라 할 만한 인터뷰와 푸티지 영상에 접합되어 있기는 하지만, 연속적인 사고의 흐름은 파편화하는 하나의 ‘틈’으로 기능한다. <리슨 투 브리튼>에서는 적국 타도 의식을 고취시키는 이미지가 사용되지 않는다.4) 이 영화는 적군을 의식하는 대신 전시戰時에도 웃음을 잃지 않고 여가를 즐기는 군인과 국민들의 모습,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흐르는 아름다운 선율을 즐기는 청중들을 보여준다. 두 영화의 이미지 사용법은 각각의 작품들이 다소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진 장르 안에 위치해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았을 때 더욱 이례적이다. 말인즉 <위로공단>은 아시아 여성의 노동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이며, <리슨 투 브리튼>은 소위 선전영화로 일컬어지는 프로파간다 필름이기 때문이다. 모든 다큐멘터리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지만, 이 두 가지 장르에서는 특히나 더 ‘감정 촉발’과 ‘믿음 확보’의 문제가 중요해진다. 사회고발 영화와 선전영화라는 각각의 장르는 타 장르에 비해 목적의식이 분명하다. 이 목적의식들은 실상 정치적이지만 보편타당하게 보일수록 효과를 발휘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때문에 이들 장르에 속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라면 니콜스가 말하는 ‘목소리’ 혹은 이미지를 통해 내용에 대한 믿음과 정서적인 효과를 끌어내려 할 것이다.






이쯤에서 내가 이번 과제의 분석 대상으로 <위로공단>을 택한 진짜 이유를 밝혀야겠다. 나는 <위로공단>의 이미지를 읽어내는 데 유독 실패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위로공단>을 시적 다큐멘터리의 영역에 위치시키더라도, 이질적인 인서트 컷의 삽입을 ‘시적 은유’ 혹은 절합된 이미지들 사이에서 특정 효과를 환기시키는 ‘틈’으로 보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다. 비교대상으로 <리슨 투 브리튼>을 소환한 이유는 조금 다르다. <리슨 투 브리튼>에서도 장면과 장면의 연결성은 그다지 강하지 않으며, 의미를 통해 장면을 해석하거나, 장면들을 통해 의미를 해석하는 과정이 그때그때 명료하게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영화는 보는 이로 하여금 직관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느끼게 만든다.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가 있는) 영국’이 그것이다. 그에 반해 <위로공단>의 시적이고 회화적인 이미지들은 내겐 아무런 연상이나 의미 작용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이미지가 서사와 맞붙지 않을 때, 이미지를 의미화하는 데 실패했을 때, 그 이미지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결정할 엄두가 나지 않을 때 영화는 ‘어렵다’ 혹은 ‘잘 못 만들어졌다’는 가치판단의 대상이 되기 쉽다. 작품의 ‘사실 전달’에 비중을 두는 관객이 많은 다큐멘터리의 영역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다큐멘터리를 ‘자기 눈으로 본 어떤 이야기’로, 좋은 다큐멘터리를 ‘좋은 대화를 이끌어내는, 자기 눈으로 본 어떤 이야기’로 보고 있는 내게는, (다큐멘터리가 가져야 할 조건으로서의) 중립성 혹은 편파성이나 사실이 곧 진실이 되는가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위로공단>과 나와의 ‘대화’의 실패를 개인적인 차원의 미해결 문제로 남겨 둘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다 모호하고 단순한 <리슨 투 브리튼>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가 너무도 쉽게 이루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장르나 양식의 구분과 혼용에 대한 이해의 결여와는 별개로 <위로공단>이 이미지 사용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 앞서 니콜스의 양식론에 제기되는 비판 문제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 6가지 양식의 분류법이 순전히 ‘분석을 위한 (후천적)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니콜스의 양식론은 실상 뤼미에르와 멜리에스라는 이분법,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라는 이분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즉 도식적이며 교과서적이다.5) 도식적이라는 말은 달리 말하면 체계적이라는 뜻도 된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논의 안에서는 시적 다큐멘터리라는 체계가 필요하다. 이 체계를 이용한 접근만이 다큐멘터리의 ‘(말하는)사상’과 ‘(이미지를 보여주는)표현’을 6가지로 환원하여 분류하는 것이 사실상 늘 작동하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을 건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실패를 보여주기 위한 의도적인 시도로서의 방법론이다.

마찬가지로, 분석틀로서는 적절치 않다는 생각은 들지만(영상언어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과 『시학』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겠다. 그 유구한 텍스트에서조차도 ‘시적 언어’는 수사적으로 사용되기 어렵다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담론을 논할 때는 “말해야 할 것(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론 충분치 않으며, 이를 어떻게 말해야만 하는가(표현)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담론에서의 표현(말하는 양식)은 시(재현)에서와는 다르기 때문에” 담론에서의 표현이 지향하는 바는 시에서의 표현과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즉 담론에서 사용하는 표현의 목적은, 낱말의 층위에서의 일탈이라는, 전형적으로 시적인 탐색에 있지 않게 된다.6) 보통 시(여기서는 서정시를 말한다)는 어떤 개념을 전개하는 데 목적이 있지 않고, 논리를 어기면서까지도 이미지를 구성 혹은 종합하여 전체적인 새로운 하나의 의미를 창발시키려고 한다.7)

지적했다시피 <위로공단>은 영화이고, 몇십 년째 변함없이 공고한 착취 메커니즘을 고발하고 있는 ‘노동 다큐’이다. 이질적인 인서트 컷과 퍼포먼스 씬이 당혹스러운 것도 그 때문일 거라 생각될 법도 하지만, 과연 그게 이유의 전부일까? <위로공단>이 영화의 재료, 세상의 일부, 사건의 단편, 영화가 아닌 사실들처럼 간주되는 스토크 쇼트8)만을 사용했다면 발생하지 않았을 문제일까? 그에 대한 반례로 미술작가의 작업이며, 노동 문제를 사회 고발하는 또 다른 작품 <감정의 시대 : 서비스 노동의 관계미학>(김숙현 · 조혜정 연출, 이하 <감정의 시대>)을 들 수 있다. <감정의 시대> 속 이질적인 이미지들, ‘미술적’인 이미지들은 <위로공단>의 그것들만큼 모호하거나 당혹스럽게 다가오지 않는다. <감정의 시대>는 퍼포먼스 이미지만을 일관성 있게 배열하면서, 해당 상황에 걸맞은 사운드트랙을 통해 이미지의 의문을 종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감정의 시대>는 니콜스의 분류 체계 안에서는 시적 다큐멘터리가 아닌 퍼포먼스 다큐멘터리에 위치시키는 게 더 어울린다. 그렇다고 해서 <위로공단>과 <감정의 시대>가 공유하는 사회 문제가 양식적으로 ‘분류’될 수 있는 건 또 아니다. 결론은 한 가지다. <위로공단>의 ‘시적’이고 ‘미술적’인 이미지와 나머지 부분과의 괴리감은, 장르나 양식에 걸맞지 않은 수사법 때문만은 아니다.





앞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적 언어 혹은 은유가 수사적 명료성을 필요로 하는 담론 제기에 적합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지만, 수사적 표현에 있어서 시적 언어가 가지는 효과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건 아니다. “… 필요한 것은 두 가지를 섞어 쓰는 것이다. 하나는 색다른 효과를 낳고 진부함을 피할 수 있을 것이며, 반면 일상어는 명료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 일상적인 언어 형태와의 거리는 관습과 충돌함으로써 색다른 것을 낳고, 반면 관습적인 형태와 공통된 부분은 표현을 명료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9) “… 중요한 것은 은유를 만들 줄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만은 남에게서 빌릴 수 없는 것이며, 타고난 천품을 드러내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은유에 능하다는 것은 유사성을 보는 것이다.”10) 은유는 작가의 시선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기의에 혼선을 주며 말을 계열체적으로 전이할 수 있는 능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을 빌자면 ‘타고난 천품’, 즉 본인만의 고유한 상징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작가성의 증명이 되기도 한다.

<위로공단>이야말로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함으로써 작가성을 증명받았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권위 있는 국제대회에서의 수상이라는 형태의, 보편적 작가성의 증명에는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위로공단>과의 대화에서 실패한 원인은 <위로공단>이 쉬이 알아보지 못할 은유를 사용했기 때문도, 내가 시적 다큐멘터리에서 이미지가 작동하는 방식을 충분히 숙지하지 못했기 때문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상 ‘해독할 수 없다’는 것이 <위로공단>의 이미지가 가지는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동의할 수 없’고 ‘지지할 수 없’는 부분이 동의할 수 있고 지지할 수밖에 없는 부분과의 연결고리를 단절시키고 있다는 게 문제다. <위로공단>을 이해하고 변호하기 위한 시도를 해 보았으니, 이제 <위로공단> 자체의 내재적인 구성에서 실패의 원인을 찾아보고 싶다.

<위로공단>의 구성은 기본적으로 이분법적이다. 노동과 자연의 이미지가 대비되고, 새떼와 개미떼 등 비인간 자연물의 이미지는 여성의 이미지로 수렴된다. 이 이미지들은 여성을 자연, 물질, 감정 등과 연관시켜 온 전통적인 이성/자연 이원론의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구분은 자연과 여성, 노동자를 긍정하는 입장이라 하더라도 본질주의와 단순화라는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11) 더 큰 문제는 <위로공단>이 영화의 구성 자체도 단순화했다는 것이다. 여성노동자들과의 인터뷰 사이사이에 자연물을 담은 쇼트와 이질적인 퍼포먼스 이미지를 끼워 넣는 반복적인 배치는, 장면과 장면을 오감에 따라 의미가 점차로 정교하게 직조되는 <리슨 투 브리튼>의 구성과 다르다. 다큐멘터리 감독은 타인에 대한 성찰로, 또는 그 성찰을 통해 타인의 이미지들과 우리를 연결하거나 갈라놓으면서 자신의 고유한 관점을 통해 포착한 세상을 작품 속에 구현한다.12) 이에 복잡성과 엄밀성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요,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간의 긴장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13) <위로공단>은 고유한 작가적 ‘스타일’은 보여줄지 몰라도 ‘고유한 관점’으로서의 작가성은 보여주지 못했다. 다만 선의로 가득할 뿐인데, 이 선의는 엄밀하지도, 탄력적이지도 않아 다른 세계와 충돌하거나 직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리슨 투 브리튼>은 후반 4분여에 걸쳐 마이라 헤스의 피아노 연주를 들려준다. 헤스가 연주하는 음악은 다음 장면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며 관객으로 하여금 ‘어떠한 생각과 연상’을 하게 만든다.14) 전시상황과 클래식 연주회, 군수공장과 내셔널 갤러리는 어울리지 않고, 맞붙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슨 투 브리튼>은 장르가 의도하는 특정한 효과를 성취함과 동시에 예술적 정취마저 획득하고 있다. <위로공단>의 이미지가 의도적인 ‘틈’을 만듦으로써 시도했고 실패했던 효과가 <리슨 투 브리튼>에서는 사운드라는 다른 층위와 이미지의 결합, 여러 층위의 이미지의 축조와 접합으로 어떻게 성취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보편적 차원에서의 분류나 증명이 아니다. 똑같은 말 걸기 방식을 사용하거나 같은 내용의 말을 하고 있더라도, 다큐멘터리는 그 자체로 각각 다른 독자적인 세계다. 하나의 세계가 그 독자성과 복잡성을 반영하지 못했다면, 만남과 대화는 성공적일 수 없다. 반응은 그 자리에 머무른다. 응답은 무한히 앞으로 나아간다. (2018. 6. 20.)







1) 빌 니콜스, 『다큐멘터리 입문』, 이선화 옮김, 한울아카데미, 2012, p.97.

2) ibid., pp. 107-108.

3) ibid., pp.173-174.

4) 에릭 바누, 『세계 다큐멘터리 영화사』, 이상모 옮김, 다락방, 2000, p.174.

5) 변성찬, 2018년 1학기 “다큐멘터리 이론 세미나” 강의, 2018.5.3.

6)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로즐린 뒤퐁록 · 장 랄로 주해, 김한식 옮김, 펭귄클래식 코리아, 2010, p.377.

7) 박이문, "박이문의 문학과 철학 이야기 - 시의 언어와 산문의 언어”, 2018.6.3. 접속,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518847&cid=41884&categoryId=41885.

8) 프랑수아 니네, 『다큐멘터리란 무엇인가』, 조화림 · 박희태 역, 예림기획, 2012, p.32.

9) 아리스토텔레스,ibid., p.460.

10) 아리스토텔레스, ibid., p.462.

11) 그랙 개러드, 『생태비평』, 강규한 옮김,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4, p.(추후 추가).

12) 프랑수아 니네, ibid., p.33.

13) 프랑수아 니네, ibid., p.33.

14) 에릭 바누, ibid., p.175.

작가의 이전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여성 연대 : <세 개의 얼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