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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현 Aug 13. 2020

이강현 감독론 : 무정형의 에너지 Z

<파산의 기술>(2006), <보라>(2010), <얼굴들>(2017)



이강현 감독은 <파산의 기술>(2006)부터 <보라>(2010)를 거쳐 <얼굴들>(2017)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세계관을 제시해왔다. 그의 영화는 공통적으로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비가시화된 채 작동하는 권력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고 있다. 의식의 밑바탕에는 사회 구조에 포획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무고하고 무지하며 무방비한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존재한다. 이강현이 연출한 세 편의 영화에서 연민과 같은 직접적인 정서의 표현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파산의 기술>은 CCTV의 시선으로 시작되고 <얼굴들>은 CCTV를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기계의 무정한 시선으로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종류의 정서를 드러내 보이는 일은 일면 불가능해 보인다. 실은 그 불가능함의 성취야말로 이강현이 영화를 통해 구현할 수 있기를 바라는 효과이자, 구현과 동시에 흘려보냄으로써 지켜내고 싶은 모종의 가능성일 것이다.



이강현의 영화에 있어 틈입하는 정서란 아무렇지도 않게 끼어드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다. 영화가 비판하는 대상인 신자유주의 질서만큼이나 비가시적이지만, 그 작동 원리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로 ‘거대하고 모호한 불변의 힘’이기도 하다. 그 힘이 발현되는 순간들은 그때그때 분명하게 지각되지는 않을지라도 의식의 저변에서 흐르며 삶을 지탱하게끔 돕는다. 감독으로서 이강현은 그 힘을 강조하기보다는 흘려보내는 쪽이 온당하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이강현의 영화들이 믿고 싶어 하는 모종의 힘을 Z라고 명명해보자. Z는 자본의 역학 논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엄밀히 말해서 작동이란 없다. Z는 흐르고 끼어들고 지나가버리는 무정형의 힘이다. 반면 신자유주의 질서는 사회 속의 개인들을 서서히 포위하여 숨통을 막아나간다. 당사자들은 갇혀 있다는 생각조차 하기 힘든데, 이는 지배 체제가 그들에게 자기 성취라는 이름의 마취제를 투여하여 집단적인 운동을 차단하고 반사 행동이 없는 상태를 유지시키려 들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의 역학관계는 그를 통해 노동의 재생산을 꾀한다. 주체에게 실질적인 변화도, 성취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노동의 재생산을. 무정형의 힘 A는 신자유주의에 대항하여 각성 혹은 마취의 무화를 꾀하고 있지는 않다. Z가 가져오는 효과는 전면전보다는 게릴라 활동에 가까운데, 명백한 의도를 가진 행위로 인해 발휘되는 힘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차라리 ‘빠져나감’ 혹은 ‘흘려보냄’으로 명명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는 행위로 인한 에너지의 유출은 체제가 배태하고 장려하는 노동 위주의 신체적 기능을 거부함으로써 수동적인 저항의 기제를 형성한다. 때문에 이강현의 영화가 노동과 노동하는 몸을 주시하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파산의 기술>이 내보이는 감정은 분노에 가깝다. <파산의 기술>은 거대한 메커니즘의 허상을 꿰뚫어 비판한다. 그러면서도 그 작동원리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고 때로 그 수작에 놀아나는 이들, 메커니즘을 탓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탓하며 착취의 변주를 인식하기보다는 순간의 감흥에 더 크게 반응하는 대중을 중점적으로 보여준다. <파산의 기술>이 냉소보다는 분노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영화라는 사실은 대부업자와 신용불량자를 대상으로 한 인터뷰에서도 드러난다. 카메라는 굳건히 고정된 프레임 속에서 위아래로 있는 힘껏 흔들린다. 어른들에게 감사하는 이들을 양성하는 사회, 자가 치료와 자기 개혁을 강권하는 사회, 긍정과 합리와 적극성을 믿는 사회, 정권의 변화로 모든 게 전보다 나아질 거라고 안심시키는 사회 속에서 카메라가 울화통을 터뜨리는 듯하다.


무지하고 무고한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은 후반부 나레이션이 들어오면서부터 극명하게 드러난다. 영화는 ‘이 따뜻한 밤의 기념식’과 ‘차가운 대낮’의 투쟁 현장을 번갈아 내보낸다. 나레이션이 기념식에 참석한 이들의 눈꼬리가 선할수록 부역의 낙인이 찍힌다고 말하는 동안, 카메라는 손동작까지 곁들여가며 투쟁가에 호응하는 한 사람을 오래도록 비추고 있다. 그보다 앞서 이들을 탓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오기는 하지만, 과연 그럴까. 체제의 횡포,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호응을 유도하고 여상한 말투로 파국의 꼭대기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는 이들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개인들의 어리석음, 늘 스스로에게 총구를 겨누고, 자책하고, 이 모든 파국이 본인의 책임인 양 부끄러워하는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 내지는 경멸이 정말 이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파국의 징후, 징후라기에는 늘 작동되어 왔던 그 메커니즘을 포착하지 못하는 이들의 해맑은 표정. “땅 밑에 흐르는 수상한 수맥”을 베고 뒤척이면서도 그 징후를 의식 세계로까지 끌어올리지는 못하는 무방비한 얼굴들. <파산의 기술>이 옹호하는 대상은 차라리 “나의 목숨을 달라 하면 너의 심장에 칼을 꽂겠”노라고 말하는 “늑대”들 쪽이다. 아무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은 무정형의 에너지 Z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보라>에서 이 통한의 정서는 진정되는 국면을 보인다. 나레이션은 사라지고 기계의 시선이 점하는 초월적인 위치는 강화된다. <보라>는 칼 마르크스가 「자본 I」(1867)의 33장에서 설명했던 공장 감독관의 역할을 하는 보건의들, 보다 정확히는 그들의 진료 활동을 보여주며 진행된다.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공장 감독관들은 양가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이들은 착취 메커니즘의 엔지니어로서 착취 과정을 공학적으로 설계, 설정하여 지배계급의 이익을 확대하는 일에 가담하는 한편, 개별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신체적 역량을 초과하여 착취를 시도하는 일에 제동을 거는 역할을 담당한다. <보라>에 나오는 보건의들은 체제의 무정한 얼굴로 노동자의 신체를 진단하면서도 진심을 담은 염려의 말을 건네는 것 같기도 한데, 그런 점에서 그들은 푸코가 이야기하는 생명 권력의 두 가지 얼굴을 대변하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생명 권력은 사회를 구성하는 인구로서의 개인들 전체를 국가가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통치 욕망과 밀접한 개념이다. 신자유주의 통치 체제는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로서의 개인을 각자가 투자하거나 관리해야 하는 기업으로 환원시킨다. 노동자의 가치는 그가 당장 팔 수 있는 노동력뿐 아니라 미래 발휘될 것을 염두에 둔 잠재적 신체 역량의 자본으로도 재단된다. 시장의 논리가 신체라는 개인의 사적 영역에까지 진입하고, 술을 마시거나 운동을 하는 등의 비경제적인 행위도 경제적인 분석 대상으로 포섭되어버린다. 그 과정에서 국가는 복지 제도를 통해 노동자의 신체에 적극 개입한다. 노동자 개인이 자신의 건강을 관리하여 생산성과 잠재성을 내포한 신체로 거듭날 수 있도록, 즉 시장의 논리를 내면화한 자기 관리의 주체로 탈바꿈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통치술의 논리는 공장 감독관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이 「자본 I」의 마지막 장에서 제시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중간 관리자로서의 공장 감독관이 내포한 양가성에는 투쟁적 혁명론 대신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의 구성요소로 인해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마르크스의 비관이 투영되어 있다. <보라> 또한 같은 비관을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보라>는 노동과 분리해서 바라볼 수 있는 활동으로서의 행위 몇 가지를 제시한다. 후반 30여분 동안 영화는 밤샘근무 시간을 할애해서 인터넷 메신저 활동을 하거나 가요를 듣는 관리자, 성인 대상의 사진 수업을 들으러 다니는 학생들, 유소년 야구단과 조기 수영반, 용산의 전자상가 수리 사무실에서 게임을 하고 있는 근무자의 모습을 차례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화면의 뒤편에서 들려오는 기타 선율은 이 일련의 활동들을 희망이나 가능성과 같은 긍정적인 의미의 단어와 흔쾌히 묶어 생각할 수 없도록 만든다. 사진은 테크닉적으로 ‘제일 밝게 나오고 크게 나온 것’을 선호하고, 더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더 비싼 카메라가 필요하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중한 자료들을 복구하려는 사람들은 돈을 지불하기 위해 길게 줄 서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라>가 관객에게 보아주기를 청하는 것이 활동과 희망의 관계망이라는 사실은, 사진을 찍는 게 즐겁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시선에 대해서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된다고 말하는 이의 마지막 인터뷰를 보았을 때 확신할 만하다. 출사를 나온 사진 동호회 사람들의 웃는 얼굴과, 조심스럽게 셔터를 누르는 누군가의 옆모습은 <보라>가 못내 믿고 싶어 하는 가능성으로서의 활동에 대한 포착이다. 다만 활동이 곧 희망으로 연결되는 이 연쇄작용은 다소 예측 가능한 도식이라는 측면에서 균질화된 감이 없잖아 있다. 신자유주의 통치 질서가 포획하지 못할 그 무엇은 불현듯 나타났다가 사라져야 할 것, 쉽사리 들키지 않고 흘러가버리고 말 것으로서 불균질한 대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 그 때문에 이강현은 <얼굴들>에서 기존의 논픽션 영화와는 다른 방법론으로서의 극영화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극영화는 보다 통제가 용이한 상황에서 연출자가 의도하는 대로 균질함/불균질함을 포착하는/흘려보내는 것이 가능하니 말이다.

<얼굴들>은 그 타이틀이 무색하리만큼 인물들의 얼굴을 강조하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종종 프레임 속 별도의 프레임 안에 포획된 얼굴들을 보여준다. 기선이 보게 된 독사진 속 진수의 얼굴이 그러했고, 처음으로 진수를 만나러 갔을 때 축구부실 창문 너머 비치던 어렴풋한 얼굴이 그러했다. 막 엄마 집으로 돌아와 살게 된 혜진의 얼굴은 벽에 걸린 긴 거울에도, 자동차의 룸미러에도 들어 있다. 후에 혜진은 버스 창이라는 하나의 프레임 속에도 들어간다. 이때 혜진이 내린 뒤의 버스에 남아 혜진의 뒷모습을 집요하게 지켜보는 시선이 누구의 것인지는 모를 일이다. 택배기사인 현수의 얼굴은 노쇠한 부모님이 건네준 어린 시절 앨범 속에 존재한다. 영화 후반부의 납골당은 프레임 속 포획된 얼굴들과 이름들의 결집체로서의 장소라 할 만하다. 정작 그곳을 찾아간 진수의 얼굴은 프레임 안에 머물지 않고 빠르게 다음 장면으로 이동한다.

<얼굴들>에서 프레임은 그 자체로 하나의 틀로 작용하여 안에 갇힌 이들을 압박하는 한편 소중한 순간을 박제하여 고정시키는 기능도 한다. 후자의 경우는 프레임이 그 안에 든 대상을 우선하여 강조하는 경우다. 프레임의 종류에 따라 그 안의 대상을 바라보도록 규정하는 방식이 달라지기도 한다. 텔레비전 화면이 프레임 속 프레임으로 등장하는 장면들이 두드러지는 이유다. 혜진은 미디어아트로 탈바꿈시킨 명화 작가의 전시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지켜본다. 좀 더 이전에 기선과 사귀던 시절의 혜진은 방 안의 텔레비전을 통해 건국제 65주년을 기념하는 의장대의 행렬을 흘려보낸다. 병원 라운지에서 진수는 자판기를 찾아 음료를 뽑는데, 그곳에 모인 환자 대부분은 텔레비전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 한편으로 프레임이 아예 탈각시켜 버리는 존재 또한 있다. 기선이 만나고자 기를 쓰는 영진 K&M의 제3조정관이다. 그는 얼굴을 보이지 않으면서도 기선의 심리와 행동반경에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비가시화된 거시 권력의 대변자라 할 만하다. 영화는 기선에게 악수를 청하는 제3조정관의 손만 짧게 보여주고, 그가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간 뒤에는 예수의 부활 장면을 묘사한 회화 한 점을 주욱 당겨 줌 인한다. 명백한 기계의 시선으로 포착되는 신의 얼굴. 신의 존재조차도 액자라는 하나의 프레임 속에 갇혀 있다. 




정육점, 치킨집, 세탁소 등이 모인 주택가의 상점 거리를 배경으로 한 엔딩 시퀀스에서는 시선의 주체로 CCTV가 등장한다. <파산의 기술>을 기억하는 이에게는 낯설지 않은 대상일 것이다. 지배 양식의 국면이 변화하면서 기계의 눈을 통한 24시간 감시 체계가 구축되었고, 지배계급은 자본의 역학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는 동시에 시선의 권력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기선이라는 캐릭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선은 영화에 등장하는 나머지 세 사람 모두와 접점이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학교 행정실 업무를 그만둔 이후 기선은 대기업의 사보를 주로 제작하는 작은 회사에 취업한다. 역설적이게도 행동반경이 넓어진 이후의 기선은 전보다 더 경직된다. 누군가를 신경 쓰고 돌보는 위치에 있었을 때는 그도 제법 많은 질문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찾아다니고 돌아다니고 기록하며 글을 쓰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은 뒤로 기선은 거짓말처럼 입을 닫는다. 기선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는 시장의 원리를 그럴듯한 문화산업으로 포장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자본의 부역자가 되어버렸으며 그의 일상은 그 이전보다 훨씬 지배계급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어버린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 쇼트에서 그런 기선을 프레임의 정 가운데 위치시킴으로써 하나의 물적 경계선으로 만들어버리고, 얼굴은 의도적으로 아웃 포커싱시켜 흐릿하게 처리한다. 뒤이어 길을 물으러 온 행인에게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대답함으로써, 영화는 감시체계의 포위망에서 기선이 길을 잃고 말았다는 사실에 못을 박는다. 러닝타임 이후로 처음 맞닥뜨리는 스코어는 영화의 대미를 수식한다기보다는 듣는 이의 불안정성을 가중시킨다는 점에서 <보라> 속 기타 선율의 연장이라 할 만하다.



<얼굴들>은 시선의 권력을 확보하여 무언가를 보여주고 강조하여 드러내기보다는 그 반대의 길을 걷고자 하는 영화의 저항적 반동이 담긴 작업이다. 사실 영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틀이며, 구성 요소로서의 프레임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얼굴들>은 그에 반해 ‘시선의 프레임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얼굴들’을 보여주려 한다. 각자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닌 얼굴들, 특별할 것 없는 무수히 많은 얼굴들이 흘러왔다가 흘러나간다. 각자의 총체가 얼마나 소소하고 소중한 것인지는 영화적 시선이 이 얼굴들이 ‘미끄러져 빠져나간’ 이후에야 자각된다. 행정실 직원인 기선이 접점이라고는 없는 축구부 학생을 챙기고, 어떻게든 보통의 일상을 영위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모습들. 우연히 발견한 일기장을 통해 펼쳐지는 낯선 이의 일상들. “난 이제 많이 다닐 거예요, 안 가본 데들.”이라고 다짐하듯 뱉어내는 혜진의 선언, 못 견딜 상황을 견뎌내기 위해 취하는 플랭크 동작, 취객을 위해 CCTV 앞에서 시선을 끌기 위해 크게 흔들어 보이는 팔 같은 것들이 그렇다.


<얼굴들>의 불균질함은 이 영화가 고정하거나 설명하려 들지 않는 그러한 순간들을 흘려보내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순간들은 백사장의 모래를 움켜쥐었을 때와 같아서, 움켜쥔 순간 손가락 사이로 쏟아지듯 지나가 버린다. 그러나 손바닥에는 방금 전까지 그러쥐었던 무언가의 증거로서 온기가 남아있고, 따끔따끔한 모래 알갱이의 감각 또한 느낄 수 있다. 때문에 이 불균질함은 아무런 영향력도 주지 못한 채 사라지는 공백의 무엇이 아니다. 나는 쉽사리 정의 내릴 수 없는 이 무엇에 Z이건 Y이건 상관없이 반드시 이름을 주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야만 글로 이 무엇을 붙들 수 있을 것 같기에.



불가해한 질서마저도 이해하고 포착하려는 이강현의 시도는 일견 모순적이다. 첫째로는 불균질한 덩어리로밖에 남을 수 없는 그 무엇을 균질화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영화 연출자로서의 이강현은 그 무엇 하나 의도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파산의 기술>과 <보라>, <얼굴들>의 영화적 구조는 빈틈없이 구축되어 있다. 이전 두 편의 논픽션 영화에 비해 느슨한 전개로 이질감을 가져다주는 극영화 <얼굴들>마저도 정말은 그의 세계관이 일관되게 구축되어 있으며, 그 논리는 외려 강화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그러나 누가 그 시도 자체를 배격하겠는가. 생활이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 걷는 것이라면 인식은 한밤중의 을씨년스러움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그나마 견디게 해 주는 그런 순간들을 포착한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빛나는 순간의 포착도 그때뿐이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질서는 변하지 않는다. “일 년은 꼬박꼬박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이고 철마다 꽃이 피”듯이 말이다. 이강현 감독의 영화들이 전제하고 들어가는 건 그처럼 거대하고 모호하며 불변적인 힘, 자기 원리를 가지고 실제로 작동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의 존재다. 보통의 개인들은 무방비하며 무지하고 무고하기에 그 힘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다만 우리는 “산소 같은 것”으로 공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그 마취약을 거부하기 위해, 인식과 관념의 층위에 머무는 것 이상의 어떤 실제적인 무엇을 취해야 할 따름이다.



존재론을 제1철학으로 내세울 것을 주창하는 하이데거에 따르면 세상에는 수많은 존재자들(beings)이 있다. 하이데거는 존재자들 가운데서도 인간은 현존재(Dasein)로서 특권적인 지위를 부여받았다고 말한다. 인간은 존재와 존재자들의 차이, 존재란 무엇인가 등과 같은 실존적인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유일한 존재다. 한편으로 인간은 존재(Being)로서의 세계 내에 던져진 존재다. 세계는 전통에 의해서 규정된 것이기에 인간이 전통이 규정한 일상성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세계라는 존재의 힘, 자연 그 자체가 지닌 압도적인 힘 가운데 일부를 분유하여 존재 자체에 맞설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실존적 결단을 통해야만이 가능해진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자기 실존적인 결단은 그리스 비극 속 영웅들의 최후와 같은 자살적 실천이었다.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자기 실존의 근본적인 현실을 부정하거나, 거대하고 모호하고 불변적인 힘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거대하고 모호하고 불변적인 힘, 현존재에게 실존적 결단으로 위장한 자살적 실천을 강권하는 비가시화된 힘이야말로 이강현 감독의 영화가 일관되게 증오해온 존재로서의 세계일 것이다. 오늘날의 현존재들은 실존적 결단을 취하더라도 세계를 물리치거나 내파할 수 없다. 그의 최후를 애도하는 것은 신도 코러스도 아닌 CCTV의 무정한 시선뿐일진대.



신적 시선이 사라진 오늘날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기계의 시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계의 시선도 포착하지 못하고 프레임에 포획되어서도 안 되는 그 무엇으로서의 Z가 있다. 늘 나타나는 동시에 숨는 Z는 시간 속에서 전개되는 새로운 존재의 의미의 발견이자,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무한한 경험의 총체이기도 하다. 잠깐 나타났다 잠깐 사라지는 것들. 삶에 틈입하는 것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꾸준한 동력으로서 표면 아래에서 흐르고 있는 어떤 힘과 질서. 그와 같은 무정형의 에너지 Z가 일상의 저변에 흐르고 있으며, 영화가 그를 돌출하여 순간적인 존재의 확인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하는 한은 우리는 마비의 감각에 온 몸을 내어주지 않고 세계 밖으로 몸을 내던져 죽음을 맞이하지도 않는 채 계속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작동한다고? 틀렸다, 인간은 작동하지 않는다. 기계나 체계만이 작동을 한다. ‘인간’이라는 주어와 ‘작동한다’는 술어가 붙을 수 없는 까닭은, 인간이란 아무리 획일화시키고 측량화시키려고 하더라도 그에 온전하게 붙들려 양화될 수만은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Z는 신이나 기계, 체제의 설계 속에 포함시킬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오로지 인간만이 그런 종류의 에너지를 흘려보내고 놓쳐버리는 오류를 저지른다. 그렇기에 이강현 감독의 세계는 굳건히, 인간의 맨손으로, 피가 맺힌 맨손으로 증축시켜 나가는 비관적 징후의 왕국이며, 그 비탈에는 산딸기와 우유를 받아 마시며 누릴 수 있는 지복의 순간이 이따금씩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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