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의 뿌리와 앞날을 위한 반성의 시간
창 밖으로 안개가 뿌옇다. 짙은 안개를 보고 있자니 밥을 안치기 위해서 쌀을 밥솥에 넣고 물로 씻을 때 나오는 쌀뜨물이 갑작스레 떠오른다. 두 상황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단지 뿌옇게 흐려져 바로 앞을 볼 수 없다는 데 있다. 창 밖을 뒤덮은 안개가 내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이런 날은 보통 두 가지 서로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생동감 넘치는 활동을 하면서 답답한 가슴을 뻥 뚫어주거나,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에 그저 나를 맡기고 차분히 생각에 잠기는 것이다.
나의 조부모님은 슬하에 일남 사녀를 두었는데 그중 아버지는 형제자매 중 맏이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농업중심의 사회였기 때문에 아들의 의미는 무척 중요했다. 가문의 대를 이어갈 존재였고 농사일에서 힘을 써야 할 장정이었다. 게다가 한국전쟁의 여파로 굶주림 없이 먹고사는 일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한 기대는 무척 높았던 것 같다. 아주 어릴 적 돌아가셨던 할아버지께 아버지에 대한 기대를 여쭤볼 수 없으니 그저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흘러온 가족의 역사를 돌이켜봤을 때 그랬을 것이라고 짐작할 따름이다.
나의 선조는 강화도 지역에서 농사를 지어오던 토박이였으며 꽤나 번성하여 씨족마을을 형성할 정도였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도 큰 어려움 없이 농사를 짓고 터전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셨던 증조부는 슬하의 세 아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물려주셨는데 할아버지께서는 넓은 토지를 받으셨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할아버지께서는 군대 생활 중 뼈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해 장애를 얻으셨기 때문에 몸 쓰는 일을 제대로 하실 수가 없었다. 당연히 물려받은 땅에서 농사를 짓는 일도 할아버지에겐 무리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일곱 가족의 생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물려받은 땅을 고스란히 처분하기로 결단을 내리셨다. 이윽고 가솔들을 이끌고 도회지로 터전을 옮기시고는 시장에 포목점을 여셨다. 다섯 자녀를 기르시며 고군분투하셨던 조부모님은 벌이보다 지출이 많아지게 되었고 할아버지께서 큰 병까지 얻으시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기어코 운영하시던 가게까지 세를 감당할 수가 없어 정리하실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생계를 이끌어가셔야 했던 할머니는 복잡한 시장통 속에 좌판을 깔고 장사를 하셨다. 나이가 들어 노쇠한 몸으로 복잡한 시장의 통로 옆, 딱딱한 철제 의자에 몸을 의지한 채 장사를 하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애잔하게 떠오른다.
곱씹어보면 나의 어린 시절은 유복했다. 집에는 할아버지께서 항상 상주하시며 나를 돌봐주셨고 온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여러 이유로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지금을 살아가는 나의 삶의 근저에 사랑이 가득하지 않나 생각한다. 내 삶의 다양한 선택과 인간관계에서 충분히 사랑의 온기를 품고 살아온 것은 어릴 때 받은 사랑이 가슴속에 따뜻하게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금도 사람들을 만나면 한결같이 따뜻하게 인사하고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가족으로부터 받아온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곧 그것이 나의 복이고 삶의 자양분으로써 싹을 틔우고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는 아름드리나무로 살아올 수 있었다고 자평한다.
할아버지께서 편찮으신 이후로 경제적 역할, 육아, 가사, 병시중까지 도맡았던 어머니의 고충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마 내가 이런 상황에서 아내를 맞이한다면 혼인서류를 제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혼 서류를 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할머니와 어머니 두 분 모두 각자의 상황에 따라 고충을 겪어 오셨고 지금 두 분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어보니 누군가의 삶을 함부로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실례가 되는 일인지 깨닫는다.
관심과 사랑을 많이 받았던 어린 시절이었지만, 내가 의지해야 하는 어른들의 갈등과 다툼으로 두려움에 떨기도 하고 경제적 어려움으로 주변 사람들의 삶과 비교하며 초라함을 느끼기도 했다. 어떤 아픔은 트라우마가 되어 아직까지 나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필요 이상으로 씀씀이를 아끼는 습관을 강박처럼 유지하고 있다.
지금도 내 앞에 펼쳐진 길은 안개 속이다. 비록 예전과는 다르게 직장도 갖고 있고 즐거운 취미도 즐기며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지 않은가? 구성원 모두가 힘을 합쳐 힘겹게 살아온 우리 가족의 역사를 떠올리며 지금까지 헤쳐온 그들의 삶이 지금 나의 삶과 맞닿아 이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비록 지금은 또렷이 앞 날을 바라볼 수 없지만 가족들의 삶의 행적이 내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 움직이고 있음을 생각한다.
가풍이라는 생활양식 속에서 형성된 사고방식과 생활 태도는 분명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친다.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성공한 자들의 책을 읽고 강연을 들으며 그들의 사고방식과 생활 태도를 익히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뿌연 안갯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그저 발걸음이 움직이는 대로 살아가는 것보다 안개 너머의 길을 예측하고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노력이 대견하다. 그간 미루어두었던 독서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하는 안개로구나.
2023.1.13(금)
시끌벅적한 거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