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또는 에세이 #36
처음엔 음식 배달 문화가 이렇게나 발달할 줄은 몰랐다. 코로나 이후 급격히 우리 식습관에 스미어, 어떨 때는 도자기류 식기보다 플라스틱 용기가 넘쳐나는 부엌 개수대 모습이 보인다. ‘도대체 저 많은 플라스틱은 다 어디로 가는 거지?’라는 생각이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지?’까지 의식의 흐름이 이어지는 건 심히 괴로운 일이다.
그러다 나는 과도한 플라스틱 배출에 심한 죄책감을 느껴서, 최근에는 배달음식을 줄이는 노력 중이다. 너무 바쁘면 어쩔 수 없지만, 요리해서 먹는 일이 일상에서 멀어질수록, 플라스틱이 넘치는 부엌 개수대로부터 나라는 인간이 소외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꺼림칙하기 때문이었다.
우습지만 나는 ‘장을 봐서 요리해 먹는 노력’을 한 달째 지속 중이다. 놀라운 것은, 살이 정말 많이 빠졌다는 거다. 독립하기 전, 모친에게 귀에 피가 나도록 듣던 ‘바깥 음식은 다 짜고 달고 양이 많다.’는 말은 정말 사실이다. 인간이 ‘맛있다’라고 느끼게 하려면 달고 짜면 쉽기 때문이다. 수익 계산을 위해 2인 이상 먹게끔 정량화된 배달 음식은, 필요 이상으로 그 양이 많고 달고 짜다.
그런 의미에서 몸은 참으로 정확하다. 배달 음식을 줄이니, 빠르게 건강해지는 몸과 마음 덕에 일상을 살아가기 가뿐한 상태를 금방 만들 수 있었다.
그다음 좋은 점은 일상에 마디가 생겼다는 점이다.
나 같은 현대인은 강박적으로 바쁘게 살기 때문에 동시에 하는 일이 두 가지인 경우가 번다하다. 컴퓨터 모니터에 업무 화면과 메신저 화면을 둘 다 띄어 놓는 것처럼, 밥을 먹으며 스마트폰을 한다든지 하는 행동들 말이다.
요리하는 순간만큼은 재료 손질부터 익혀, 그릇에 음식으로 내기까지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오로지 먹기 위해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 목적과 수단이 명료한 일에서 나는 어떤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먹고살기 위해 컴퓨터를 두들기고, ‘도파민 충전’을 위해 영상과 이미지를 빠르게 소비하며 시청각 이외에 감각에서 멀어지는 어리숙한 내게, 요리는 일종의 ‘촉감 놀이’가 된다.
다 만들어진 음식에선 맛있는 냄새가 폴폴 풍긴다. 만든 요리를 사랑하는 사람과 따뜻한 그릇에 덜어 소소하게 이야기하며 나누어 먹는다. 직접 끓이고 볶은 채소와 고기들에서 스며 나온 즙과 향이 알맞게 뒤섞여 내 목 너울을 넘길 때, 이제 이 음식은 내 몸을 구성하는 단단한 근육과 에너지가 되리라는 확신이 든다. 내일이 더 나을 거라는 희망이 된다. 희망이라는 새로운 세포가 내 몸을 이루는 피와 살이 된다.
이는 어떤 종교적 의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도 살아있음에 신성함과 감사함을 느끼며.
‘식사’라는 일상의 마디에서, 바쁘게 사느라 잊고 있던 단순한 진리를 그제야 깨닫는다.
- 그래.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밥을 나누어 먹기 위해 사는구나! 삶은 이토록 단순하다.
그것이 살아가는 데 큰 위안이 된다.
한국 전쟁 당시, 갈 곳 잃은 한국의 여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음식을 요리하는 재주를 가지고 ‘한식’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먹고살 일을 걱정하던 것은 오늘날 우리와 다르지 않지만, 그들이 모여 만든 한식 문화에는 확실히 무언가 다른 게 있다. 예를 들어, 한식집에 가면 “만지면 뜨거워요.”하고 집게에 들려 나오는 따뜻하다 못해 뜨거워 눈앞에서 팔팔 끓는 뚝배기. 요즘 같이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차가운 음식도 미지근하고, 뜨거운 음식도 미지근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동아시아 북방의 추운 나라답게, 식사 내내 처음부터 끝까지 온몸을 뜨겁게 데울 수 있는 뚝배기 음식. 그 안에는 ‘추워도 기죽지 마!’라는 갸륵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그 뚝배기를 보고 있으면 우리나라 여인들이 먹는 사람을 얼마나 생각했는지, 그 재치와 배려에 웃음이 나곤 한다, 덕분에 다 먹고 나면 그렇게 속이 든든하고 벅찰 수가 없다.
어쩌면 이 뚝배기가, 우리가 지난 60년 동안 ‘한강의 기적’을 만든 힘의 원천은 아니었을까. 같은 이유에서 일까, 요즘 ‘가성비 좋다’, ‘보기만 해도 든든하다.’라는 말을 ‘국밥’이라고 말하기도 하던데. 참 재미난 일이다.
앞서 말한 나의 ‘요리를 해 먹는 노력’으로 다시 돌아와 보자. 주변 먹거리가 풍부해졌으나 바빠서 아무거나 입에 마구 넣는 일이 많아진 요즘. 그래서 일상의 마디가 차츰 사라지는 요즘. 그럼에도 커피로 꾸준히 ‘카페인 충전’을 해야 하는 참으로 기이한 요즘. 우리는 무엇을 위해 먹고사는 걸까? 반세기 전 그 어려운 전쟁을 겪고도, 뚝배기 한 그릇에 삶의 긍지와 존엄을 담아 나눠 먹던 우리가.
적어도 삶을 지탱할 작은 마디 정도는, 가엾은 우리에게 허락해야 하지 않겠는가.
움직이는 화랑 <비껴서기> 운영 |
코스미안뉴스 인문 칼럼니스트
브런치 작가
bkks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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