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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우성 Oct 20. 2020

[남자의 클래식] 5회. 당신이 바쁘게 사는 이유,

생상스 <동물의 사육제>





친구와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걸려 온 전화에 친구는 “손님과 미팅 중입니다. 이따 전화 드리겠습니다” 하며 전화를 끊는다. 난 손님도 아니고 미팅 중인 것도 아닌데, 친구랑 차 한잔하고 있다면 될 것을 왜 저렇게 대답할까? 후에 친구가 다시 전화를 걸게 되면 상대방은 “요즘 많이 바쁘시죠?”라는 인사말로 대화를 이어 갈 터다. 친구는 실제로도 바쁜 사람이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쉴 새 없이 일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느라 필요 이상으로 더 바쁘게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현대인은 바쁘게 산다. 워라밸 문화가 확산 하면서 휴식이나 여가 생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내 주변의 중년 남성들에게 워라밸은 아직 먼 나라 이야기인 듯하다. 어쩌면 그들 스스로가 휴식이나 여가와는 점점 멀어지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인다. 그 친구의 메신저 프로필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졸면 죽는다.” 아, 이 정도라면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오스트리아 작은 마을에서의 카니발



프랑스 출신의 음악가 카미유 생상스Charles-Camille Saint-Saëns는 자신의 작품 연주를 위해 1886년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두 나라에서의 연주 여행은 바그너의 추종자들과 생상스 안티 팬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한 해 전에 생상스가 독일 음악과 바그너에 대한 비판을 가한 적이 있는데 이게 화근이 된 것이다. 결국 오스트리아의 빈과 체코의 프라하를 제외한 모든 곳에서의 연주를 금지당하고 연주 여행은 대실패로 끝난다.


당시 음악계에서 생상스의 입지는 위태로운 상태였다. 오페라가 주를 이루던 프랑스에서는 기악 위주인 생상스의 고전주의적 작품들이 독일풍 일색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독일에서는 독일 음악을 프랑스화하며 격하시켰다는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연주 여행까지 실패한 생상스는 큰 좌절과 괴로움을 맛봤을 것이다.


생상스는 괴로움을 잊고 여독을 풀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한 시골 마을로 힐링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는 그의 친구이자 첼리스트 샤를 르부크가 살고 있었고 마침 사육제가 열리고 있었다. 샤를 르부크는 생상스에게 사육제 마지막 날 열릴 음악회에 쓰일 작품을 써보라고 제안한다. 연주 여행도 망했겠다, 비평가의 펜이 닿지 않는 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 생상스는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제멋대로 작품을 쓰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동물의 사육제Le carnaval des animaux>다. 휴가 중 재미 삼아 작곡한 작품이 오늘날 생상스를 기억하게 하는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작품이 된 셈이다.




프랑스의 모차르트





카미유 생상스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후기 낭만 시대의 작곡가이다. 고전적 절제미와 섬세한 표현력을 겸비한 그는 이미 2세에 피아노를 시작하고 3세에는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4세에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할 수 있을 정도의 재능을 보여 ‘프랑스의 모차르트’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0세에는 피아니스트로 데뷔 연주회를 열었고 13세의 나이로 파리음악원에 들어가 14세에는 파리음악원 오르간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음악 영재였다.


생상스는 작곡가로서의 명성만큼이나 천재 오르가니스트로도 유명했는데, 기교파 피아니스트 리스트는 “생상스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 오르가니스트다”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22세인 1857년에는 파리 중심부에 자리한, 파리에서도 최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다니는 마들렌 교회의 오르간 주자로 임명되었는데, 그곳의 오르간 주자가 된다는 것은 파리 최고의 오르가니스트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1886년 <동물의 사육제>를 작곡할 당시 생상스는 51세였다. 사실 이 해는 프랑스 최고의 교향곡이라고 평가받았던 생상스의 걸작 <오르간 교향곡>이 만들어진 해이기도 하다. 이 교향곡에는 작곡가로서의 치밀함과 진지하고 성스러운 오르가니스트로서의 진가가 최고조로 발휘되어 있다. ‘악기들의 황제’로 불리는 오케스트라와 ‘악기들의 교황’인 오르간의 결합을 통해 세속적인 웅장함과 종교적인 장엄함을 동시에 담아내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생상스 자신도 “나는 이 작품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부여했다. 내가 여기에서 성취한 것은 나 자신도 결코 다시는 이루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며 자신이 남긴 걸작의 위대함을 의심치 않았다.





숨기고 싶었던 명작



같은 해에 작곡한 <동물의 사육제>가 초연 당시에 비공개로 친구들 사이에서 연주되었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공개 연주가 열린 데에는 이유가 있다. <동물의 사육제> 작곡 당시 생상스는 이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길 원치 않았다. <오르간 교향곡>처럼 고상한 작품, 엄청난 스케일의 작품들을 써오던 프랑스 최고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의 이미지에 금이라도 갈까 두려웠던 것이다. 사자, 닭, 거북이, 수족관을 묘사한 14개의 짤막한 모음곡은 애당초 친구들과 재미 삼아 연주하려고 만든 것이기에 진지한 작곡가의 이미지를 버려가면서까지 세상에 알리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생상스는 이 작품에 ‘두 대의 피아노, 두 대의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 플루트, 클라리넷, 하모니움소형 오르간, 실로폰, 첼레스타벨 소리를 내는 건반 악기를 위한 동물학적 환상곡’이라는 부제를 별도로 붙여놓았다. 부제를 통해 동물들을 묘사했음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동물학적 환상곡’이라는 단어를 통해 가볍게 농담 삼아 작곡한 작품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있다. 그래서 그중 고상하고 완성도가 높다고 여긴 열세 번째 곡 ‘백조’만 출판을 허락하고 나머지 13개 곡은 자기가 세상을 떠난 후에나 출판을 할 수 있다고 계약서에 단단히 못을 박아두었다. <오르간 교향곡>과 같은 웅장한 대작을 쓴 해에 아기자기하고 짧은 곡들의 모음곡인 <동물의 사육제>를 같이 창작한 것도 재미있지만 이 유머러스하고 위트 넘치는 작품 덕분에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그가 남겨놓은 고상한 작품들도 관심을 갖고 찾는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Play list




<동물의   사육제> 


 카미유 생상스(1835~1921)


 Le carnaval des animaux


 by Camille Saint-Saëns


https://youtu.be/wBGEf4urGNo



이 아기자기하고 위트가 넘치는 소품곡 모음집은 제1곡. ‘서주와 사자왕의 행진’, 제2곡. ‘수탉과 암탉’, 제3곡. ‘당나귀’, 제4곡. ‘거북이’, 제5곡. ‘코끼리’, 제6곡. ‘캥거루’, 제7곡. ‘수족관’, 제8곡. ‘귀가 긴 등장인물’, 제9곡. ‘숲속의 뻐꾸기’. 제10곡. ‘큰 새장’, 제11곡. ‘피아니스트’, 제12곡. ‘화석’, 제13곡. ‘백조’, 제14곡. ‘피날레’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작품들은 동물들을 묘사하기 때문에 작품마다 악기의 사용이 매우 변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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