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보다 빨간 고무장갑이 먼저였다

욕심을 내려놓으면 안 보이던 게 보인다

by 한 줄이라도 끄적

“야~ 수학 잘 봤어?”


“수학은 뭐... 늘 그렇지 뭐... 너는?”


“나 몇 점이게? 맞춰봐~”


“음... 90점?”


“나 100점이야!! 100점!! 부럽지?”


“오~ 축하축하! 역시 너는 수학 잘할 줄 알았다니까~ 축하해 슬아”


고등학교 1학년 시험 본 후 하굣길, 같이 걸어가던 단짝 친구의 말에 축하를 해주었을 뿐인데 화살 같은 말이 한 무더기 날아왔다.


“야! 너는 안 부러워? 100점 맞은 내가 안 부럽냐고! 너는 내가 일부러 너 자극받으라고 더 얘기하는데 반응이 왜 그래? 너는 왜 그렇게 욕심이 없어? 응? 내 점수 듣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어? 너 그렇게 살면 안 돼!!! 안된다고!!!”


‘너는 너 나는 나’인데 그땐 친구 반응이 왜 그리 과격하나 싶었다. 성인이 되어보니 무욕이 때론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차츰 느끼기 시작했다.


“우리 애가 다른 건 걱정이 안 되는데 욕심이 너무 없어서 걱정이에요. 바로 위 언니는 얘랑 다르게 진짜 욕심이 많은데... 사람이 욕심이 좀 있어야 잘 살 텐데...”


상견례 자리에서 엄마가 하신 말씀이 내내 마음에 남았다. 어느 정도의 욕심은 살아가는데 필요하다는 말씀!!

엄마는 자식들 키우며 공부하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5남매 중에 욕심 많은 자식만 장학금 타며 학교 다녔다.

살다 보면 상황과 때에 맞춰 알아서 의지와 욕심이 불타오를 줄 알았다. 아니었다.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중학생인 첫째는 공부 욕심이 없다. 좋게 포장하면 욕심이 없고 포장을 풀어보면 공부 머리가 없어서, 공부에 대한 동기가 없어서 큰 의지가 없다.


“엄마, 오늘 영어 단어 시험 봤는데 반타작했어요.”


“오~ 벼락치기로 반이나 맞췄어? 다른 애들은?”


“수민이는 만점이고 저보다 낮은 친구도 있어요.”


“이야~ 대단한데~ 수민이 보면 어때? 부럽거나 너도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뭐... 수민이는 공부를 잘하니까 당연히 만점이죠~ 수민이는 저와 레벨이 아예 다르기 때문에 부럽거나 하지 않아요. 걔는 걔죠. 저는 어차피 그렇게 못해요.”


욕심이 없다기보다는 체념하는 듯한 어조였다. 내가 너무 공부에 대한 성취감을 못 느끼게 했나? 어릴 때부터 작은 성취감을 느껴보는 게 중요하다고 하던데 난 그동안 뭐 했지?


이런 건 왜 시키지 않아도 닮는 건지... 이것도 유전인 건가? 아니면 자라면서 나를 보고 자연스레 흡수한 건가?


생각해 보니 아이들이 원하지 않는다는 핑계로 공부 학원을 한 번도 보내지 않았다. 대신 집에서 할 수 있는 나름의 방법으로 이것저것 해보았다. 아이가 아닌 내 주도로 말이다. 이러니 오래갈 리가 있나! 매번 조금 따라오다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다.

내가 이끄는 방법이 오래갈 리 없음을 알면서도 나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불안함이었을까?


생각을 바꾸었다.

공부보다 일상에서 작은 성취감을 하나씩 쌓아가는 방법으로 말이다.

일상을 낱낱이 까보니 아이들은 기본 생활 습관 자체가 많이 부족했다.

공부보다 우선시되어야 할 것들 말이다.

그동안 당연하다는 듯이 내 손을 거쳤던 것들이 이젠 아이들을 통해 재탄생하고 있다.


“엄마! 이불 다 갰어요~ 아침 주세요~”


“엄마! 우리 영상통화해요~ 제가 오늘 아주 괴상한 요리를 만들었어요. 이것 좀 보세요! 아까 낮에 영진이가 놀러 왔는데 계란 프라이랑 스팸 구워서 밥이랑 줬어요. 보기엔 이상한데 친구가 맛있대요! 엄마도 오시면 해드릴게요”



“엄마~ 막 한 따뜻한 밥 먹고 싶어요! 영상통화로 밥하는 방법 좀 알려주세요!”


“엄마! 전에는 저 설거지 잘 못했잖아요, 오늘은 진~짜 깨끗하게 했어요. 이제 형만큼 잘해요. 이따 와서 보세요.”


“엄마! 쓰레기 버리러 나갔다가 놀이터 가서 그네 타고 오느라 늦었어요~”


요리하느라 가스레인지 주변이 폭탄 맞았을지라도, 까치발 들고 설거지하느라 부엌 바닥이 물바다가 되었을지라도, 뿌듯해하는 아들들 얼굴 보면 목구멍까지 올라온 잔소리는 어느새 꿀꺽~


매일 저녁 학교 체육복 빨아달라는 첫째에게 세탁기 돌리는 방법은 언제 알려줄지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는 중이다.

며칠 전 남편이 새로운 고무장갑 두 켤레를 사 왔다. 겨울이라 신경 써서 기모 고무장갑으로 마련했다.

겉에 검정 매직으로 큼직하게 아이들 이름도 썼다.

반갑게도 내 고무장갑은 쓰레기통 행이다.


퇴근길, 빨간 고무장갑을 낀 두 아들이 아른거린다. 잠뜰 유튜브 보며 초스피드로 설거지하는 첫째와 행여 기름 튈까 봐 고무장갑 낀 채 계란 프라이 하는 둘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