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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제 Dec 28. 2023

강력한 자기 불신은 경청과 열린 태도의 밑거름이 된다

짧은 소설 20231228

자기 얘기를 하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처럼 추한 것도 없다고 민영은 생각했다. 퇴근 후 잔업을 하기 위해 카페에 온 민영은 바로 옆 테이블에 앉은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무선이어폰을 챙겨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한 블록을 더 걸어가기 귀찮다는 이유로 이 카페를 고른 자신의 선택도. 딱 봐도 40대 중반 혹은 그 이상은 되어 보이는 남자의 윽박지르듯 떠들어대는 목소리에 민영은 감기약에 몽롱해졌던 정신이 일순 맑아지는 착각이 들었다. 쾅쾅 쳐 대는 피아노 건반 같은 남자의 목소리와 달리 여자는 꼭 필요한 최소한의 말만 아주 조그맣게 말하는 중이었다. 여자가 속이 더부룩하다는 핑계로 집에 일찍 들어가겠다고 하자 남자는 편의점에 가서 소화제를 사오겠다며 가볍게 달려 나갔다. 일단 먹어보고 그래도 안 괜찮으면 그때 집에 들어가라는 남자의 말을 우선은 들어 볼 심산인 듯했다.

나는 지금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있으며 너의 다른 의견에도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일단은 내 말이 맞을 확률이 더 높다고 나는 믿고 있다. 내뱉는 모든 문장의 높낮이가 기울기가 음인 일차 함수의 꼴을 그리면서 내리찍는 남자의 목소리에는 이러한 믿음이 깊게 깔려 있었다. 마음의 안테나가 안과 밖으로 균형잡힌 채 향해 있지 않고, 오롯이 세상을 향해 바깥으로 곧추세우고 있는 사람. 매초마다 영혼의 빈틈마다 스며드는 외로움을 견딜 방법을 찾으려 타인을 향해 촉수를 세우는 사람. 이 순간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남자뿐만 아니라 대화를 종결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틈새를 맹렬하게 파고들지 않는 여자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들이었다.

민영은 어디선가 저런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집에서도 있었고 학교 동아리에서도 있었고 회사에서 먹는 점심 시간에도 있었다. 그 사람들은 모두 민영이 좋아하거나 좋아했던 사람들이었다. 이성적으로든 인간적으로든 민영은 그런 사람들에게 쉽게 마음을 빼앗기곤 했다. 자신감에 찬 목소리가 높은 자존감을 가졌다는 증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대해 판단해야 하는 일이 생길 때면 언제나 부족한 자기 확신 때문에 자주 괴로움을 겪는 민영은 그런 사람들이 부러워 보였다. A라는 사안에 대해 B와 같은 생각이나 감정이 드는 C라는 이 상황, 맞는 걸까요? 대학교 익명 커뮤니티든 친구들에게 시나리오화해서 보여주는 메시지 창이든 민영은 자신의 판단에 대한 타인의 판단을 구할 수 있는 창구를 언제나 갈구해 왔다. 내면이 무른 이러한 성향은 대외적으로 민영이 타인의 말을 잘 경청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어주었다. 자기 불신은 민영이 안테나를 바깥쪽으로 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남자와 여자는 돌싱 클럽에서 만났다. 남자는 아들과 딸이 있었고 여자는 자녀가 없었다. 남자는 애인과 1년 2개월 전에 헤어졌다. 역삼역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진행한 정모가 끝나고 사는 곳이 근처인 둘은 인천 부평의 한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카페 바로 앞의 세븐일레븐에서 약을 안 판다며 건너편 지에스까지 다녀온 남자는 봉투째로 여자에게 약을 건넸다. 약을 먹고도 괜찮아지지 않으면 카페 안의 공기가 좋지 않을 수도 있으니 같이 가볍게 밖에서 걸어 보자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여자의 컨디션을 살피는 질문에서 금세 최근에 술약속이 많아 건강검진을 미처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대화는 넘어갔다.

이십 분 후에 그들은 카페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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