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플 때 생각나는 맛
어렸을 때부터 건강 체질이라 잘 아프지 않았다. 일단 초등학교 6년 + 중학교 3년 + 고등학교 3년까지 12년 개근! 개근상! 지각한 적이야 당연히 몇 번 있었지만 아이들이 수업 중간에 가끔 하곤 했던 조퇴도 단 한 번도 없었다. 야자 땡땡이도 안쳤다. 아주 큰일이 났을 때만 조퇴를 하고 땡땡이를 치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구 대표로 글짓기 대회에 뽑혀서 나갈 때도 수업 중에 몇 교시를 듣고 학교에서 점심까지 다 먹고 담당선생님 차량으로 이동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세대는 전혀 공감할 수 없겠지만 -사실 나 역시 우리 아이들의 체험학습을 미리 쓰거나, 갑자기 열이 올라서 아프거나 하면 당연히 먼저 학교보단 체험 학습 일정이나 아이들 컨디션을 우선시한다.-
우리 땐 한 반에 개근상이 별로 대단한, 특별한 상이 아니었다. 12년 개근이 물론 지금은 자랑스럽고 마지막 고3시절, 학교 급식을 먹었던 1년을 제외하고 11년을 내내 도시락을 챙기고 싸주신 엄마에게도 감사하지만, 사실, 개근상 당사자로서는 별로 특별한 감정이 솟구치진 않는다. '라테는'(나 어릴 적엔) 아파도 학교에 가서 쓰러져라, 학교 가서 조금 엎드려있고 양호실에서 누워있어, 이런 생각을 가진 부모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파도 학교엔 '무조건'가야 하는 곳이었고 숙제를 못해도 얻어맞거나 체벌이 있었어도, 담임 선생님이 불공정하다고 아무리 일러도 학교엔 꼭 가야 했다. 이런데 아픈 게 대수일까. 학교에서 아파서 끙끙거려도 수업을 듣는 게 참 중요했다. 분명 그 시기에도 유행하던 감기나 질병 같은 것도 다 있었을 텐데 (*이걸 쓰다가 갑자기 생각났는데 초등학교 저학년땐 누구에게 옮아온 지도 모를 이까지 옮아서 머리를 단발로 자르고 매일 하루 두 번 엄마가 참빗으로 착착 머리를 빗겨주고 박박 감겨주시기도 했다. 근질근질 꿈틀꿈틀 이가 돌아다니는 머리를 해가지고도 언니랑 나는 학교에 갔던 것이다!) 어쨌든 게다가 나는 열이 나거나 아프거나, 코피 한 번 안 났으니 학교에 안 갈 방법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누우면 그대로 아침인 것 같은 나날들이 이어졌고 아침잠이 늘 부족했지만 퉁퉁 부은 얼굴로, 머리를 채 못 말려서 물기가 뚝뚝 떨어져도 학교에 갔다. 늦을까 봐 늘 뛰어갔다. 만원 버스에 끼여서라도 학교에 갔다. 여중생을 꽉 채운 버스가 늘 오르막길에선 덜커덩, 뒤로 밀려난 적이 수없이 많았지만 '차라리 버스 사고가 좀 나서 다쳤으면'하는 내 소망이 이뤄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건강 체질과 더불어 이런 일상이 우리를 강하게 길들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쩌다가(?) 한 번씩 나도 고열에 시달리고 감기에 걸린 적이 있다. 손에 꼽을 정도라 확실히 기억나는 그날들은 억울하게도 주말과 닿아있었다. 그땐 주 5일이 아닌 주 6일 수업, 토요일 HR이나 CA활동까지 다 하고 와서 집에서 쉬곤 했는데 아마도 주말은 늘 단축 수업을 했던 것 같다. 식은땀이 날 정도로 아픔을 참을 정도도 아닌 늘 애매하게 아프다가 집에만 오면 고열이 나거나 목이 아팠다. 속으로 왜 월요일이 아닌 토요일 저녁에 몸이 아플까 학교 가기 싫어서 이런 의문을 품었다. 감기에 걸리면 엄마가 커다란 델몬트 오렌지 주스를 두통씩 사 와서 한 잔씩 마시라고 따라주셨다. 뚱뚱한 반 투명 유리병에 든 오렌지 주스는 꽉 차고 언제나 차가웠다. 그 주스는 가끔 마시긴 했지만 엄마는 집안에서 누군가 아프면 꼭 두병이 함께 달린 종이 박스에 담긴 주스를 사 와서 자주 마시게 했다. 식사는 물론 간식까지 손수 만들어주셨던 엄마는 아프면 약보다는 '오렌지'였는지, 오렌지 과일이 과연 얼마큼 들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델몬트 주스를 사 오셨다. 우리 집엔 다 마신 그 유리병에 보리차나 결명자를 끓인 차를 넣어서 차갑게 마시기도 했다. 차 맛이랑 미세하게 남은 오렌지 주스 향이랑 미묘하게 섞인 맛이 은근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주스를 자주 사주는 편이 아니라 '아프거나 몸이 부실 때 에너지를 주는 음료'처럼 인식했던 것 같다. 매끈하면서도 한쪽이 도돌토돌 거칠었던 그 유리병 안에 담긴 차를 마셔도 건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대학교 때도 크게 아픈 적은 없었는데 처음 장염에 걸려 떼굴떼굴 구르고 속이 너무 힘들었는데 병원에 나오면서도 '델몬트'가 떠올랐다. 초록과 노랑이 어딘가 편안한 안정감을 주는 색이었을까, 풀잎 같은 초록색 테두리 마크가 황금과 빨강의 에너지를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이 당분간은 이온음료를 자주 마시고 흰 죽을 먹으면서 장염 약을 챙겨 먹으라고 했지만 나는 왠지 그 델몬트가 마시고 싶어졌다.
엄마의 어떤 따뜻한 손길보다는 학교 가기 싫어했던 나의 열망과 갖가지 엉뚱한 상상으로 가득했던 그 시절이 왠지 그립고 생각나서 웃음이 났다. 그렇게 아프고 싶었던 한 아이의 소망이 결국 이뤄지지 않았지만 델몬트 주스의 약간 쌉쌀하면서도 오렌지 향이 가득했던 다른 가벼운 맛 색소와 달리 묵직했던 노란색 맛이 잊히지 않는다. 주스인데 달지 않았던, 진짜 어딘가 풍요로운 오렌지를 가득 따와서 압착했을 것 같은 맛이 내가 갈 수 없는 유년의 기억을 깨워준다.
유년의 기억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는 게 우리 큰 애가 한 번씩 아플 때마다 나도 매번 오렌지 주스를 먼저 사게 된다. 나도 모르게 투명한 컵에 오렌지 주스를 따라주면서 과일이랑 먹으라고 챙겨주면 아이가 볼멘소리를 한다.
"엄마, 아픈데 왜 자꾸 오렌지 주스만 줘?
난 이거 맛없어!"
정신이 번쩍 난다. 그러게, 자주 아픈 적도 없지만 손맛 좋은 엄마의 무수한 요리들이 아닌, 마트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오렌지 주스가 왜 아프고 힘들 때 마다 꿀꺽꿀꺽 마시고 싶어지는 걸까. 건강에 안 좋다고 평소에 주스나 어떤 음료도 잘 사주지도 않다가 아플 때면 사주었던 엄마의 마음을 이제 조금을 알 것도 같다.
다들 아프거나 입맛 없을 때 무슨 음식이 제일 먼저 떠오르고 생각날까. 각각의 음식도, 음료도 다 다르겠지만 그 맛은 분명 유년의 맛이고 기억의 맛이라고 생각한다.
흔히들 좋은 약은 입에 쓰다고 하지만 나에게 좋은 약은 단순하고 묵직하면서도 늘 변함없었던 델몬트의 맛이었던것처럼.
#델몬트유리병
#아플때떠오르는음식
#12년개근상
#몹시쓸모있는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