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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나우 Aug 21. 2023

몽고반점과 멍

폭력과 훈육의 차이

엄청난 폭염을 뚫고 갯벌에 갔다. 우리 가족이 자주 가는 대부도 방아머리 해변.


고막을 뚫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진동과 소리, [안전안내문자]는 쉴 새 없이 울렸다. 이미 달려가는 길 위에서도 안산 지역은 어마어마한 폭염 주의보. 몇 시간 휘리릭 놀고 오자 마음을 먹었지만 망설여지기도 했다.

▶왜냐? 갯벌은 그늘이 없거든. 그냥 허허벌판, 내리쬐는, 작렬하는 태양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곳이다.


이번주에 간 동해로의 휴가가 태풍으로 입수 금지가 된 탓에 수영장에서만 논 것이 아쉬웠는지 아이들은 바다를 그리워했다. 갯벌의 진득한 진흙팩도, 작은 구멍으로 쏙 들어가는 작은 털게도, 스펀지밥의 모델 격인 바다선인장 해면도 마음껏 주무를 수 있는 갯벌, 거기만 가면 아이들의 놀이 시간은 순삭이었기에  '신랑'은 더 추워지기 전에 꼭 가자고 했다. (가는 길에도 나는 몇 번이나 키즈카페로 회유하려 했으나 실패;;)


잘 놀고, 후다닥 이른 정리를 하고 맛있는 점심도 먹었다. 폭염답게(?) 찜통더위 속에 사람들이 평소 다른 주말보다 한가해서 갯벌을 좀 더 여유 있게 차지한 기분이 들었다. 씻을 때도 우리 식구들만 줄 서지 않고 씻는 건 처음 겪는 일.

오늘은 근데 갯벌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대부도 갯벌로 들어가는 입구에 천안 호두과자를 파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 커피랑 호두과자를 몇 개 사서 간식으로 먹을 생각에 들떠서 이거 저거 샀다. 담아서 차가 주차된 곳으로 걸어가니 신랑이 찌뿌둥한 표정으로 차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차 안에 있는데, 더위를 많이 타는 양반인데 주차장에서 접촉 사고라도 났나? 무슨 일이지? 걱정이 돼서 후다닥 뛰어갔다.


-무슨 일이야?

-아니..., 그게, 아휴.


그제야 울고 있는 작은 여자아이 두 명이 보였고 다른 한 가족의 무리도 보였다. 우리 선율이만한 작은 여자아이도 젊은 엄마의 치마 뒤에서 쏙 나왔다.


-내가 차를 타서 정리를 하고 쓰레기를 버리려고 나오는데 여자 아이들 두 명이 바로 우리 차 앞에서 울고 있더라고. 더운데 그것도 그늘 하나 없는 곳에서 가게 앞에서. 너무 울기에 무슨 일이냐고 사고가 났나 가서 묻는데 이제 옆에 저 가족 무리가 나랑 그 여자 아이 두 명을 보더니 오는 거야. 덩치 큰 어른이 또 아이들을 괴롭히는 상황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 거기선 또 지켜주고 싶었던 것 같고.


11살 두 명의 아이들은 (쌍둥이라고 했다) 아빠가 화를 내고 핸드폰을 부수고 나가라고 내쫓아서 오갈 곳이 없어서 그곳에서 울고 있었다. 그것도 꽤 오랜 시간을. 문제가 생기면 해결부터 하고 나서자는 성격답게 나는 서둘렀다.

-그럼 당장 아이들 있는 차로 가서 문 좀 열어 달라고 하자, 더운데. 세상에.

-아냐, 나경아, 내 말 좀 들어봐 봐.

신랑은 나를 붙잡았다.



요점은 우리가 개입해서 문을 두드린다고 '그래? 반성 많이 했지? 어서 와.'하고 반길 상황이 아니니 경찰이 나서게 하자는 의견이었다. 경찰엔 이미 아이들 상황을 살피며 아빠들이 신고를 했다고 한다.

그제야 다시 찬찬히 보이는 아이들. 계속 흐느끼고 울고 손으로 눈물을 꾹꾹 덜어내고 몸은 떨리고 있었다. 떨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확 밀려오고 화도 나고, 안쓰럽고, 짠하고...




-에구, 얘들아. 많이 놀라고 힘들었지, 날도 더운데. 너무 무서웠겠다.

아이들 등을 쓰다듬어주니 울음을 더 크게 터뜨린다.

-아빠가 무서워요, 너무 무섭고, 핸드폰도 부수고(액정이 가루가 날 정도로 부서졌다) 우리에게 나가래요.

-지난달에도 한 번 또 부수고 또,

-아빠는 원래 착한 사람인데 평소엔 착하고 좋은데 이렇게 한 번씩 화를 내면 너무 무서워서 얼굴도 못 보겠어요. 어떡하죠. 우린 이제 어떡하죠.





땡볕보다 그늘진 쪽을 찾아 아이들을 데려왔다. 좀 진정시키고 경찰이 올 때까지 다른 가족들과 함께 기다려주기로 했다. 물과 휴지를 챙겨서 눈물을 닦아주는데 연신 고맙다고 말하는 아이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경찰이 오면 아빠가 혹시 잘못되거나 잡혀갈까 봐 아이들은 아빠 걱정을 하고 있었다. 캠핑카를 타고 어제 이곳으로 여행 왔다고 하는데 눈앞에 보이는 멋진 캠핑카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물어볼 수도 없고 상상하기도 싫었다. 차 안에는 엄마도 있는데 엄마는 더 어린 남동생과 함께 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이면서

-엄마는 좋아요, 좋은데 아빠가 있으면. 아빠가 있으면, 아... 아빠 앞에선 아무 이야기도 할 수가 없어요.

-엄마도 같이 있는데 우리 보고 나가라고 했어요.


경찰이 곧 도착해서 대강의 상황을 듣더니, 옆에 있는 아이들을 챙겨 아이들을 경찰차에 태웠다. 물도 안 마시겠다고 한 아이들인데, 지금쯤이면 폭염에 목도 마를 텐데, 시원한 음료 하나 손에 못 쥐어준 게 마음이 쓰였다. 이제 아이들은 또 끔찍하고 힘들었다고 하는, 저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아이들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궁금해서 상황을 좀 더 지켜보기로 했다. 옆에서 우리와 함께 해준 가족도 걱정이 되는지 자리를 못 떠나고 있었다. 그 집의 어린 딸도 많이 더울 텐데 들어가라고 해도 아이들이 많이 놀라고 안쓰러운데 어떻게 될지 하면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좋은 분들이구나.

또 하나의 생각은 경찰에 신고하길 잘했다는 생각. 내가 뭐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그래도 또 언젠가 아이들에게 이런 공포의 상황이 된다면 주변의 눈이 CCTV가 돼주고 경찰에서도 지역 사회에서도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한 번씩이라도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곧이어 아이의 엄마가 작은 남자아이 손을 잡고 경찰차 앞으로 걸어왔고 아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경찰차는 아이들만 태우고 다시 서로 가는 것 같았고 엄마는 아들을 챙겨 캠핑카로 돌아갔다.


무섭겠다. 돌아갈 곳은 집 밖에 없는데. 11살이면 우리 선재보다 한 살씩 더 많은 누나들일뿐인데.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요즘 크고 작은 민감한 사건들로 경찰들도 안일하게 대처할 수만은 없을 거란 생각도 들고 내내 복잡한 표정을 짓던 한 명의 경찰관과 안쓰러운 눈빛으로 아이들을 챙겨주던 젊은 경찰관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냥 몇 시간을 더 두었더라면 '이제 좀 화가 풀렸으니 들어와라'했을 건가. 지나가던 사람들의 괜한 오지랖이었나, 아니야. 역시 신고하긴 잘했어. 아이들을 걱정하고 살뜰하게 챙겨준 다른 가족의 말처럼 이렇게 서로 잘 모르는 상태에서 감정싸움을 소모하지도 않고 좀 더 해결책을 찾을 방법은 신고가 최선이었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평소에도 놀이터나 길거리에서 크고 작은 아이들의 다툼, 사고, 왕따 같은 상황을 마주치면 지나치지 못하고 꼭 끼어들어 이야기도 하고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는 건 도와주고 싶어 하는 성격인지라 지나가는 다른 엄마들 무리에 우리 아이들 좀 챙겨달라고 한 후에 다투는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많았다. 저마다 이유가 있고 각자의 이야기, 사연이 있지만 '그럼 경찰에 신고해! 신고해 주세요'하는 상황도 있었지만 신고까진 가진 않았다. 붙잡고 30분만 이야기해도 화해까진 아니더라도 상황을 종결시킬 수가 있었으니까. 멱살을 잡고 거칠게 놀고 욕을 해서 모래를 뿌리고 한 명의 아이를 때리는 상황들이 보이면 후다닥 뛰어갔다. 어쩌면 내가 상대한 초등학교, 중학교 아이들이 그래도 어른 말을, 오지랖 부리는 것 같은 동네 아줌마 말에 조금은 관심을 가져주는 착한 아이들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어른들을 상대하는 것과 학생들을 상대하는 건 또 다른 문제겠지. 신랑은 늘 나서지 말라고 하면서도 정작 자기도 같은 상황에선 울고 있는 아이들을 지나치지 못했다.




너희들, 무슨 일이야? 왜 그렇게 울고 있어?




이 더운 날씨에 자기 아이들을 위해 즐거운 체험을 위해 먼 길 달려오고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발을 닦아주는 부모들 사이에서 부모가 없이 울고 있는 아이들은 분명, 낯설고 이상했을 것이다.

낯설고 이상한 상황을 지나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눈이 더 과감하게 움직이는 CCTV라는 것도 깨달았다.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에 나오는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어른들로부터 숱하게 실망하면서도 꼬마들을 위해  절벽 앞에서 재빨리 붙잡아 주는 파수꾼이 되고 싶어 한다. 나는 그 말이 자기를 붙잡아주는 어른들은 못 만났지만 자기라도 어린아이들의 순수하고 순진한 꿈과 마음을 지켜주고 싶다는 것처럼 들렸다. 나도 그 대목을 읽으면서 그 말이 멋있다고 느껴졌고 나중에 어른이 된다면 나도 호밀밭의 파수꾼 역할을 자처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제는 CCTV, 블랙박스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고 해도 그런 곳이 없는 장소에선 또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울고 있을까. 마음이 점점 무거워진다. 주변에 그냥 다 지나친다면 내가 마지막 지나가는 어른일 수도 있으니 기꺼이 도와야겠다는 마음을 다잡는데 세상의 악과 공포와 험한 일은 뭐 말해 뭐 하나, 끝도 없고 선보다 약삭빠르게 진화하는 것 같다. 신고를 해서라도 호밀밭의 파수꾼이 돼줘야지.







영국에서 아이 넷을 낳은 언니가 셋째 예아를 낳고 경찰서에 간 일이 있었다. 예아의 팔과 허벅지 주변에 있는 몽고반점을 보고 이웃에서 학대를 의심하고 신고한 것이다. 아이 몸 곳곳에 멍자국 같은 게 보이니 부모를 경찰에서 조사해 달라고 요구했다. 세상에!



몽고반점: 몽고반점은 배아 발생 초기에 표피로 이동하던 멜라닌 색소세포가 진피에 머무르면서 생기는 푸른색 반점이다. 진피에 있는 멜린색소세포는 출생과 동시에 서서히 없어지므로 몽고반점도 4~5세부터 없어지기 시작해 13세 경에는 완전히 없어진다. "몽골계"아시아인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한국인 신생아에겐 97% 관찰된다.


경찰서라니, 언니와 형부는 경찰서에서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몽고반점의 특징을 설명했고 의사까지 대동했다. 그러고 나서 경찰과 의사가 취한 행동은?



예아의 몽고반점 곳곳을 전부 볼펜으로 테두리를 따라 그린 뒤 사진으로 찍었다. 우리 예아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등까지 올라오는 몽고반점 부위도 넓고 팔과 다리까지 진짜 멍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가끔 아이들이 아플 때 이 몽고반점에 손을 대면 다른 피부보다 열이 펄펄 나서 몽고반점은 열을 배출시키는 통로 같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여하튼, 그들은 꼼꼼하게 분주히 사진을 찍더니 명쾌하게 말했다. 물론 영어로 했겠지. ㅎㅎㅎ



오해를 해서 죄송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이제 이 반점 외에 다른 곳에
멍이 들거나 아이가 지속적으로 다치면
그때는 학대를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언니, 정말 놀랐겠다. 원, 세상에 이런 일도! 뭐야, 진짜? 결론은 또 왜 그래?

어이없고 놀란 내 반응과 달리 언니는 웃으면서 이런 말을 해줬다.


아니야, 난 오히려 신고해 준 게 좋았는데. 우리 아이들이 곳곳에서 보호받고 지켜보는 사람들과 살고 있구나, 하는 안심도 들고. 스스로 화가 날 때도 아이들에게 소리 지르고 손이 나가기보다 한 번 더 생각하고 반복하는 훈육을 할 수 있어서 더 좋아.

예나가 자폐인 줄 몰랐을 때(언니의 둘째 딸 예나가 자폐 판정을 받기 전 언니도 가족들도 많이 울고 걱정한 시기가 있었다.) 예나가 말은 안 하지, 그러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사고 치는 행동을 많이 해서 애를 먹었어. 혼나면 좀 정신 차릴까 나도 때리기도 했지. 그런데 나경아, 아이한테 훈육한다고 때린 건데도 그 마음이 이상하게 우울한 게 두 달 동안이나 가더라고. 미안하고 안쓰럽고 아이에게 사과하고. 그 뒤로 다짐했어 나는. 아이들을 절대 때리지 않겠다고.



내가 좋아하는 김혜자가 책에서 말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프렌시스코 페레가 말했다.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


하지만 아이들을 키워보면 알게 될 것이다. 나도 저런 엄마가, 아빠가 부모가 되겠다고 다짐해도 한 번도 때리지 않은 부모가 되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이 얼마나 어려운 다짐인지도.

말 안 듣는 우리 둘째가 가장 많이 듣는 말도 "때려서라도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해!" "두드려 맞으면 이제 고집도 꺾이고 정신 차리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누군가 널 때려서, 엄청나게 두드려서 패서라도 바꾸겠다고 한다면 그걸 참아낼 수 있냐고.

무서워서 그대로 얼어붙어서 자동으로 안 하게(혹은 그렇게 하게) 하는 행동이 과연 올바른 훈육일까. 좀 더디더라도 내 속이 답답해도 반복해서 말해주고 침묵으로, 때론 강경한 표정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일관되게 말해주는 게 훈육일까.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다. 말이 안 통하는 것 같은 아이에게 지속적으로 꾸준히 한다는 것은 인내심을 넘어, 분노로 극에 당한 내 머릿속까지 잠재워하는 일이기에. 하지만 어른이 아니라 아이가 더 정확히 안다. 내가 걱정돼서 이러는지, 자기 화에 못 이겨서 이러는지. 아이에게 매를 들고 때론 단호하게 할 필요도 물론 있다. 하지만 그게 폭력적 이어선 안된다. 절대로.





사랑스런 예니(넷째)/ 예니와 예아(오른쪽 웃고 있는 아이가 몽고반점의 주인공 예아) 지금은 둘 다 꼬마 숙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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