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와 책임감, 그리고 자유에 대하여
봄꽃이 한창 아름다운 요즘이다. 매년 보는 꽃이지만 해가 갈수록 봄꽃이 더 깊게 다가오는 것 같다. 언젠가부터 공원이나 등산을 하러 가면 계절마다 바뀌는 산과 나무가 아름다워서 나도 모르게 연신 사진을 찍어댄다. 특히 풀잎에 동그랗게 맺혀서 앙증맞게 반짝거리는 이슬을 보면 보석보다 훨씬 예쁜 것 같다.
나는 옷 욕심이 많았다. 학생 때는 원하는 만큼 옷을 사지 못해서 옷이 많은 친구를 마냥 부러워했다. 돈을 벌면서 옷을 내키는 대로 사서 옷장을 채웠다. 나중에는 들어갈 곳도 없는 옷장에 옷을 있는 대로 구겨 넣었다. 옷을 살 때는 기분이 좋았지만 사놓고 나서는 내가 무슨 옷이 있는지 기억하기도 어려웠다. 집에 있는 옷과 거의 비슷한 옷을 여러 벌 샀다. 사고 나서 입지 못하는 옷들도 많았다. 옷 디자인이 체형과 어울리지 않거나 색깔이 피부색과 맞지 않으면, 예쁘지만 내 옷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화려한 옷은 입었을 때 옷만 도드라지고 얼굴이 못나 보였다. 혹은 한두 번 입고 금세 질렸다. 옷을 줄이기로 마음먹은 후에는 옷을 고르는 눈이 마냥 까다로워져서 한 벌을 사는데 며칠을 고민했다. 쇼핑몰을 보다가 몇 시간을 보낼 때도 많았다. 옷은 오랫동안 인생의 숙제였다.
수중에 돈이 생기면서 불안하거나 두려운 마음이 생기면 움켜쥐고 싶었다. 내 영역 안으로, 눈에 보이는 곳에, 손에 잡히는 곳에 둬야 안심이 생겼다. 옷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그랬다. 나이가 들면서 차로, 집으로 스케일이 커졌지만 같은 마음이었다. ‘미래를 위해서’, ‘혹시나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여분을’, ‘남들이 다 있으니 나도 하나쯤은’, ‘공짜로 주니까’ ‘있으면 쓰일 테니까.’ 물건은 하나, 둘 늘어나고 집은 찼다.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은 책임감을 의미했다. 옷이 늘면 빨랫감도 늘었다. 옷에 곰팡이가 피지 않게 주기적으로 통풍을 해주고 계절이 바뀌면 드라이도 맡겨야 했다. 옷을 관리하려면 집의 공간을 옷과 나누어야 했다. 정성과 관심을 베풀지 않으면 옷은 금방 망가지거나 색이 바래서 오래 입을 수 없었다. 좋아하는 옷은 옷장에서 꺼내 볼 때마다 뿌듯함을 줬지만, 그 많은 옷들을 보살피느라 빨래에 다림질에 드라이에 주말을 보내면 허무했다. 다른 물건들도 마찬가지였다. 인간관계도, 일도 마찬가지였다. 소유할수록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서 정성스럽게 보살펴야 할 대상이 늘어났다.
지식도 마찬가지였다. 한때는 무작정 훌륭한 사람들의 강연이나 책을 쫓아다녔다. 지식을 쌓고 트렌드를 파악하면 내가 똑똑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새로운 책은 계속 나오고, 트렌드는 매번 바뀌는데 나는 따라갈 여력이 없었다. 책장에 읽지 않은 책들을 보면 숙제 안 한 학생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게다가 아는 것과 하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었다. 머리로 말과 글을 이해했지만, 다른 이의 경험은 결정적인 순간에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운동하고 몸을 공부하면서 옷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누구 말처럼 패션의 완성은 몸이었다. 내 체형을 공부하면서 어떤 디자인이 잘 어울리는지 알고 몸의 선들이 예뻐지면서 옷에 신경을 덜 쓰게 되었다. 올해 유행이라는 이유로 어울리지 않는 옷을 사는 일이 줄었다. 무엇보다 내가 못나 보일 때, 혹은 예쁘게 꾸미고 싶을 때 운동을 하고 몸매를 가꾸면서 옷에 대한 갈증이 줄었다.
취미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무조건 믿는 일이 줄었다. 책이나 강연 같은 간접경험도 경험의 대체수단일 때가 많았다. 바쁘다는 핑계로 일상을 관찰할 시간이 없거나 귀찮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의 해석을 소비했다. 내 삶을 충실하게 경험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외부의 트렌드나 정보에 덜 집착했다. 몸으로 경험하고 필요할 때 쓸 수 있는 것이 온전한 내 것이었다. 내 것이 생기면 남기고 버릴 것이 명확해졌다.
마음의 갈증을 경험으로 바꾸면서 소유하려는 마음이 줄었다. 시간을 들여서 충분히 경험하면 갖고 싶은 충동이 잠잠해졌다. 소유욕과 함께 책임감으로부터도 자유로웠다. 집에 걸어놓고 싶은 그림을 사는 것보다, 그려서 걸어놓을 때 더 큰 보람을 느꼈다. 소비자에서 벗어나서 경험자, 생산자가 되면서 결과물에 크게 개의치 않게 되었다. 해야 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것이 늘어나면서 일상이 가벼워졌다.
시각적인 자극을 좋아하는 걸 보면 사람에게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본능이 있나 보다. 액세서리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연을 가까이서 자주 감상할 수 있는 여유만 있다면 굳이 소유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 같다. 순간을 경험하면서 살면 생각보다 많은 게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두 손, 두 발로 인생을 지탱하며 살아가는 것, 온몸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축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