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nome Nov 08. 2023

나는 해피엔딩을 꿈꾼다

모순에 기댄 행복이지만 충분히 낭만적이다

나는 영화나 드라마의 결말이 언제나 해피엔딩이기를 기대한다. 가끔 비극이나 열린 결말로 끝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면 복장이 터질 것 같은 답답함을 느끼곤 했다. 더욱이 그 진한 여운은 기어이 하루를 우울하게 만들기도 했다. 나는 이러한 기분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허구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꽤나 진지하게 몰입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이유때문인지 한번 감정이입이 되는 순간 종종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가끔은 결과를 미리 알고 난후에야 영화나 드라마를 보곤 했다. 그것이 나에게 안정감을 줬다. 내 기대와는 다른 결과로 인해 얻어지는 감정적인 여파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방편이었다. 그렇다고 몰입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사람들이 대체로 스포일러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었고 결말을 아는 상태에서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이 매우 이상하고 독특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결말을 미리 알려고 하는 이유는 불안정과 불확실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전개는 자주 긴장과 스트레스를 불러왔고 그럴 때마다 마치 영혼이 먹히는 기분이 든 적도 많았다. 그것은 아마 현실의 내 삶이  때때로 공정하지 않았고 나의 선한생각은 곧잘 무시되곤 했기 때문일 수 있다. 실제 선한 행동이 보상받기를 바랐지만 그러한 기대는 곧잘 오해로 돌아오거나 혹은 어리석은 일로 치부된 적도 많았다. 그렇기에 이런 습관은 어쩌면 내 삶에 대한 정서적 보상의 욕구일수 있다. 최소한 영화나 드라마의 해피엔딩이라는 결말은 현실의 삶보다는 훨씬 인지적 부조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의 길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헤쳐 나갈 때, 그 끝에 성공, 사랑, 용서와 같은 가치들이 승리해야 살아온 삶이 허무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어렸을 때 배운 이야기들은 대부분 시작, 중간, 끝이라는 명확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구조적인 예측성은 일상생활에서 불확실성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곤 했다. 뿐만 아니라, 불안을 줄이고 안정감을 제공한다. 그러한 모든 면을 고려할 때 내가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것은 세계에 대한 나의 인식을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결말이 좋다는 것은 어떤 예기치 못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미래에 대해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며, 그것을 향해 계속 나아갈 동기를 부여한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며, 불안한 마음도 쉽게 해결된다. 이 명확성은 폐쇄적인 공간에서 발생하는 감정임에도 충분한 만족감을 제공한다.


한번 생각해 보라.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구성원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공동의 희망과 꿈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그 전제는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확실한 믿음과 그에 따른 공동체 의식이 확보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시작과 끝의 관계에서 반드시 선이 악을 이기고, 정직과 선한 행위가 결국 보상받는다는 이야기가 전계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 전제위에서만 우리는 공동의 목표와 이상을 추구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할 것이다. 그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아는 인간의 본능일 수 있다.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은 곧잘 삶의 의미로 이어지며 그에 따른 이상적인 결말을 기대하게 한다. 그런 면에서 해피엔딩은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에 있어 중요한 문화의 중심적인 구성 요소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해피엔딩은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행복과 목표의 실현, 그리고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실망과 실패를 극복하려는 본능적인 욕구와도 연결된다. 그래서 우리는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이야기를 만들고, 듣고, 공유한다. 이야기는 단순히 문화와 지식을 전달하는 매개체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규범, 윤리적 가치, 그리고 인간의 이상에 대한 우리의 신념을 형성하고 개인의 경험을 넘어 사회적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다. 예를 들어, 도덕적 해피엔딩은 정의로운 행동이 결국 보상을 받는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이는 개인이 더 정의로운 선택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이 경우 해피엔딩은 단순한 개인적 경험의 종결이 아니라, 우리의 도덕적 지향점과 문화적 이상까지 반영한 기대가 된다.


그렇기에 해피엔딩의 추구는 인간이 겪는 '실재와 이상의 긴장'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현실 세계에서의 불완전함과 이상 세계의 완벽함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은 결국 우리가 삶에서 고민해야하는 중심 주제 중 하나다. 그런 면에서 이 간극을 해피엔딩으로 메우려는 시도는 현실의 불안정과 불확실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깊은 뿌리 깊은 욕구다. 해피엔딩이란 궁극적으로 현실 세계에서의 완성을 향한 추구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개념이 상대적이며 주관적인 것임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행복의 정의는 문화적, 개인적 배경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어떤 이에게 행복은 가족과의 화목일 수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경제적 성공이나 개인적 성취일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행복의 개념은 인간 삶의 다채로움을 반영하는 동시에,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와 이상이 결코 획일적일 수만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행복에 대한 집착은 결국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는 존재론적 측면에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과도 연결된다. 그러나 생각해봐야할 문제가 있다. 해피엔딩이라는 말에서 '해피'는 행복이나 만족을 의미하며, '엔딩'은 끝이나 결론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두 단어의 조합은 모순적일 수 있다. 행복은 지속적인 과정으로 이해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끝이라는 개념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지 않는다. 행복은 고정된 상태가 아닌, 삶의 지속적인 활동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또한 그 행복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은 사람마다 기대하는 결말이 다양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는 해피엔딩은 반드시 모든 사람에게 발생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관점에서 해피엔딩은 현실과는 크게 동떨어진 것이다. 실제 인생에서 그리 깔끔한 마무리는 드물다. 그것은 또한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실패와 고난이 함께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해피엔딩은 오직 주인공에 한정된 결말이다. 돌이켜 내 인생은 내가 주인공일 수 있겠지만 그것은 누구라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현실에서는 영화나 드라마처럼 정해진 주인공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현실에서 나만의 해피엔딩은 매우 주관적이고 이기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누군가의 행복은 누군가의 불행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이 인생이 끝을 뜻하지도 않는다. 여전히 우리는 실패와 고난의 삶을 살아가고 있고, 그것은 삶의 난관과 고통이 마침표를 쉽게 찍지 않음을 가리킨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인생은 결코 완결성을 갖지 못한다. 우리가 행복을 기대할 수 있고 때론 행복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일 수는 없다. 내 삶과 유비해볼 때 해피엔딩은 결국 현실의 삶을 반영하지 못하는 모순이 되고 만다.


현실은 대체로 타인의 인생에 무관심하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할 수 있다. 사람들은 함께 살아가지만 독립적인 존재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아주 작은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부분에 불과하다. 나에게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그저 수많은 일중 하나일 뿐이다. 세계라는 그 거대함에 비해 아주작고 가치조차 확인하기 어려운 존재는 세상을 움직일 수는 있는 능력도 힘도 없다.


그렇다면 내가 기대하는 해피엔딩의 이상은 온실 속의 화초와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온실 속 화초는 조심스럽게 보호받으며 외부 세계의 엄격함으로부터 격리된 채 성장한다. 이러한 환경은 화초에게 안정적인 성장 조건을 제공하고, 영양분과 온도 조절을 통해 꽃을 피울 최적의 기회를 제공한다. 마찬가지로, 나는 온실 속 화초와 유사한 보살핌과 안정을 갈망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온실 속 화초와 같이, 혹독한 현실에서 벗어나 보호받고 이해받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나는 해피엔딩을 좋아하는 것이다. 도전과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온실 같은 환경에서 꿈을 키우고 싶어 한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역시 그러한 기대는 환상에 불과하다. 온실 속의 화초가 바람과 비, 자연의 선택과 같은 외부 조건에 의해 시험받지 않는 것처럼, 해피엔딩 역시 현실의 복잡성을 간과한 채 단순화된 성공과 기쁨만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세계에서는, 모든 사건이 기분 좋은 결과로 끝나지는 않는다. 온실에서 길러진 화초가 외부 환경으로 옮겨졌을 때 생존하려면 적응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현실적인 조건과 타협하며 적응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해피엔딩은 잔혹한 동화처럼 느끼게도 한다.


이처럼 해피엔딩은 때때로 비현실적인 기대를 조장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이 불완전하고 어려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감안할 때, 모든 이야기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면 현실 도피적 태도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결국에는 행복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현실과의 괴리를 초래할 것이다. 그렇기에 문제의 해결이 너무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것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고 삶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해피엔딩이 영화나 드라마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것은, 인생의 역경과 투쟁을 가볍게 여기거나 현실과 이상 사이의 긴장을 무시하기 위함이 아니다. 때론 현실의 한계를 초월해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의 이상과 욕구가 실현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잔혹한 상황에서 나약하고 힘없는 우리가 희망을 갖고 꿈을 키워나가고 자신의 삶에 긍정적인 전망을 갖게 하는 것은 해피엔딩을 기대하는 것뿐이다. 그 고통스러운 상황이 반드시 끝나리라는 기대, 그 끝에는 행복이 기다릴 것이라는 희망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허무하고 공허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허무와 공허가 좋은 것들을 상상하게 하고 그 상상이 각자의 삶에서 완성되기를 바라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끝까지 지지하고 싶다. 또한 그것으로 실제 현실이 개선될 수도 있고 우리의 해결하기 어려운 고뇌마저 해방시킬 수도 있다. 그래서 때론 모든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만드는 힘이 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낭만이다. 삶을 지속하는 것은 결국 더 큰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작가의 이전글 집착과 파멸, 사랑과 낭만의 이중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