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inome Nov 07. 2023

집착과 파멸, 사랑과 낭만의 이중주

폭풍의 언덕: 열정적 사랑과 파괴적인 복수

K-pop과 같은 팝음악을 들을 때 나는 가사를 꼭 확인하는 편이다. 멜로디나 퍼포먼스보다 노래의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그 의미를 공감하기도 쉽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직관적인 감각능력이 부족해서 일 것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가사의 주된 주제가 사랑에 국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물론 사랑이 아닌 노래도 많지만 대체로 그러했다. 


예를 들어 행복한 순간들, 아픈 이별, 설레는 시작, 분노와 배신, 그리고 때때로 나타나는 집착까지, 사랑에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이다. 아마도 노래 가사에서 사랑이 많이 다뤄지는 이유는 대중의 다양한 경험과 상황에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복잡한 감정선을 따르지만 다른 주제보다 공감을 얻기 쉬워 대중의 지지를 얻는데도 유리할 수 있다. 


물론 K-pop의 성공은 단순히 가사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때론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통찰력, 퍼포먼스, 그리고 기술적인 작곡, 편곡, 제작의 품질 등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기초적인 틀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내용의 가사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특히 사랑이라는 주제는 매우 보편적이고,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 중 하나이기 때문에 넓은 대중에게 호소력을 갖는다. 그러한 이유로, 음악가들은 이 주제를 자주 선택해 대중의 정서를 강력하게 자극하려 한다. 사랑이라는 주제는 어떤 부연설명이 없이 그 자체로 개인들이 추구하는 낭만이나 이상적인 상황을 상상하게 한다. 하지만 음악가는 사랑을 정직한 방법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비틀고 왜곡시켜 은연중에 그 의미를 부풀리곤 한다. 사랑을 통해 얻어지는 설렘뿐만 아니라, 분노나 집착과 같은 어두운 면도 진실한 내면의 감정으로 표현한다. 헤어진 후에도 여전히 괴로워하는 자신을 봐달라고 하거나, 헤어진 원인을 상대방에게 돌리며 원망하고, 때로는 헤어졌다는 이유로 복수를 다짐하더라도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는 분명 현실에서 사랑보다는 집착에 가까운 감정이지만 동시에 내면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이 섬세한 경계에서, 가사의 위태로움은 달콤한 멜로디에 의해 무디어지고, 때로는 건강하지 않은 애착조차도 아름다움으로 포장된다. 


결국 이는 듣는 이로 하여금 집착과 의존조차 사랑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온다. 사랑은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하는 감정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고려 없이 오직 자신의 감정의 몰입만을 중시한다. 이는 마치 상대가 없는 로맨스에 빠지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예를 들어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어', '영원히 너만을',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기 전에', '너에게 반드시 돌아갈 거야'와 같은 표현들이 과연 어떤 상황에서 표현될 수 있는 것인지를 상상해보라. 이는 분명 상대방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자기감정의 표출이다. 그렇기에 현실에서 이러한 감정을 우리는 집착으로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그 곡은 독백이나 방백의 형식을 갖기 때문에 사랑의 주체중 하나가 갖는 간절한 마음의 목소리로 들린다. 개인적으로, 이런 가사들이 때때로 건강한 상호 의존성보다는 일방적 의존을 미화하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스토킹과 같은 범죄를 연상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러한 왜곡에 대해서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대중음악은 본질적으로 감성적인 측면을 그 무엇보다 중요시 여기는 매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비록 현실의 정확한 반영이 아닌 이상화된 모습일지라도 이는 전적으로 듣는 사람의 기호와 취향에 그 의미를 맡겨야 한다. 물론 집착을 사랑으로 표현하는 가사로 인해 불건강한 관계나 행동마저 미화할 수 있다는 우려는 타당하다. 하지만 대중들은 굳이 이런 지적이 없어도 일반적으로 음악을 통해 얻는 감정적 경험을 판타지로 인식한다. 특별히 걱정하지 않아도 대중은 이미 현실과 구분할 줄 안다. 그렇기에 이러한 비현실적이고 과장된 표현은 음악뿐만 아니라 영화나 소설에서도 자주 사용된다. 


많은 예술작품에서도 낭만과 사랑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경험 중 하나로 묘사된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때때로 사랑의 감정을 비틀어, 순수한 사랑이 과도한 집착으로 변질되는 현상을 조명한다. 예술가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사랑의 달콤함과 파괴적인 가능성을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감정에서 이해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 한 인간의 내면을 극한으로 몰아붙일 때 그가 어떤 일까지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술가들은 사람들이 종종 사랑하는 이를 자신과 동일시해 자기존재의 일부로 간주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는 상대의 실제 모습과 일치하지 않는 환상을 추구하게 하는데, 이 환상과 현실과의 충돌은 실망감과 좌절, 그리고 관계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실망감이 누적될 때 사랑은 증오로 변하게 되는 법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별이라는 주제는 사람들이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고 불안을 유발하는 좋은 소재가 된다. 예술가들은 이를 놓치지 않고 불완전함과 불안의 감정을 그들의 작품 속에 담아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예술가가 묘사하는 의존적 심리를 통해 자신들의 과도한 집착을 인식하고, 이것이 상대를 통제하려는 강박적 욕구로 바뀔 수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예술가가 추구하는 것은 반드시 교훈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에서는 자주 상대방의 감정을 무시한 왜곡된 자기감정을 정당화하며 결국 파멸의 길을 걷게 한다. 하지만 이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자아가 얼마나 나약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지 그러한 감정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아니다. 이것이 예술가들이 그려내는 사랑의 이상화가 그들의 작품에서 비극적 결말을 초래하는 이유다. 


개인주의가 강조되는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예술가의 시도는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과 욕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인식이 강해질수록 인간의 본성과 관계의 복잡성은 훼손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낭만적인 사랑의 감정이 집착과 파멸로 변모하는 경로가 전혀 뜻밖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연결을 추구하며, 때로는 이러한 연결이 강박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사랑과 집착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기 위해서는 이 두 감정을 반복해서 표현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은 비극적 사랑과 복수가 얽히며 파멸과 희망을 넘나드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소설은 강렬한 상상력과 깊은 심리적 분석으로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탐구한다.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은 이야기의 핵심 축으로, 그들의 관계는 가장 순수한 낭만적 사랑에서 시작해 파멸적인 집착으로 전환된다. 두 인물은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지만, 사회적 계급과 개인적 욕망 사이의 갈등은 그들의 관계를 비극으로 몰고 간다.


캐서린은 사랑보다는 안정성을 선택하고, 히스클리프와의 깊은 정서적 유대를 끊고 에드거 린턴과 결혼한다. 이 결정은 캐서린에게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안겨주지만, 그녀의 진정한 정체성과 열정을 억제한다.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과 사회적 욕망 사이의 균형을 찾지 못하고, 자신의 내면에 있는 진실한 감정을 외면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 선택은 캐서린 자신에게도 파멸을 가져오고, 히스클리프를 복수의 굴레로 몰아세우는 계기가 된다.


히스클리프의 복수는 서사에서 강렬하고 파괴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배신과 멸시로 여기는 이들에게 되돌려주며, 복수의 길을 걷는다. 히스클리프의 복수가 잔혹하고 사납긴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고통을 환경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다. 그의 복수는 결국 자신을 포함한 주변 인물들의 삶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는다.


소설의 후반부는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관계로 인해 파생된 비극적 사랑 이후의 세대에 집중하며, 그들이 부모 세대의 오류를 어떻게 넘어서려고 시도하는지를 보여준다. 캐서린의 딸 캐서린 린턴과 히스클리프의 양자인 린턴은 이전 세대의 사슬을 끊으려는 싸움을 통해 새로운 희망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히스클리프의 영향은 여전히 강력하여, 이들 젊은 인물들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히스클리프는 결국 자신의 행동이 가져온 파괴적인 결과를 깨닫고, 사랑에 대한 그의 갈망은 미완성으로 남는다. "폭풍의 언덕"의 결말은 히스클리프의 죽음으로 비극을 마감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세대에 대한 희망의 여지를 남긴다. 마치 희생없는 미래는 존재하기 어렵다는 식이다. 이것은 사랑과 증오, 복수와 용서, 그리고 계급 간의 장벽을 넘는 인간 정신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샬럿 브론테의 말처럼, 우리는 소설에서 우리 자신의 삶을 보고,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다.


사회적인 조건이나 환경은 종종 인간을 억압한다. 이 억압은 법률, 문화, 그리고 사회 규범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여러 금지 사항을 통해 구체화된다. 하지만 억압은 외부 조건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내부의 잘못된 자기 인식에서 비롯된 집착도 큰 역할을 한다. 집착은 때때로 사랑의 감정에서 극단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관계의 소중함을 잊고 오직 자신의 목적에만 몰입할 때 발생한다.


이러한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상황이 낭만을 방해한다. 사실 낭만의 추구는 일방적인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래야만 낭만의 재발견이 가능하다. 집착은 도취와 망각을 통해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회피의 본능을 발현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도취와 망각은 삶의 역동성을 제공하지만, 이것은 현실의 왜곡된 반영이며 일시적인 착시에 불과하다. 현실과의 완전한 단절은 결국 파멸을 의미할 뿐이다. 이런 위험성으로 망각의 시간은 그리 오래 주어지지 않는다. 사실 망각에 빠진 사람에게 손을 내밀며 소통하기에는 부담과 위험이 크다. 망각은 일반적으로 지속 가능한 상태가 아니다. 인간은 망각이 제공하는 일시적인 안식처에서 벗어나 현실의 삶과 마주하게 된다. 이 과정은 모든 우여곡절을 겪은 뒤의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현실에 다시 발을 들여놓는 건 집착이나 망각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계의 형태를 모색하는 데 필수적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그것이 단순한 감정의 흐름이 아닌, 깊은 자기 이해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이 깊은 자기 이해는 '폭풍의 언덕'에서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관계를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캐서린이 히스클리프를 향한 깊은 감정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위치를 우선시하는 선택은, 사랑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개인의 전체적인 삶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사랑과 성숙 사이의 연결고리는, 캐서린이 자신의 사회적 상황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진정한 자신의 욕구를 이해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보인다. 그러므로 사랑을 재조명하는 것은 단순히 감정의 재발견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완전한 성장과 발전을 모색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과정이다. 


낭만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빛을 바래는 듯하지만, 우리가 깊이 그리워하는 것은 결국 사랑의 가장 순수하고 본연의 형태다. 그 본연의 모습은 언제나 우리 내부에 자리 잡고 있다.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우리는 자주 기술의 홍수나 일상의 무거운 짐에 짓눌려 진정한 감정의 연결고리를 놓치기 쉽다. 하지만 때로는 갑작스러운 비의 소리나, 잊고 있던 노래 한 조각에 갑자기 마음이 움직여 우리를 옛 감정의 흐름으로 이끈다. 그래서 낭만은 감정의 단편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꿈과 희망, 실패와 좌절을 통틀어 우리 삶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폭풍의 언덕'에서 브론테는 낭만적 사랑이 단지 열정적인 순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해 내적 성찰과 성숙으로 이어지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낭만은, 그러므로, 어떠한 형태로든 우리가 진실된 자아를 발견하고 실현하는 데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삶의 폭풍 속에서도 우리의 내면에 자리한 사랑의 불꽃을 잃지 않고 그 열정을 재 점화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낭만의 본질이며, 이는 각자의 삶 속에서 깊이 공명하는 메시지로 다가온다. 그 변하지 않는 마음의 힘이 낭만이다.


작가의 이전글 ​사랑 그 쉽지 않음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