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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ome Nov 26. 2023

새로운 시대를 향하여 PART-2

신고전주의 부터 포스트모드니즘까지 그리고 그 이후

바로크문화의 연장선상에서 발전한 로코코 문화는 웅장함보다는 가벼움, 우아함, 그리고 섬세함을 추구했다.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진 작품들이 많았으며, 이는 주로 귀족과 상류층을 위한 문화로 여겨졌다. 하지만 극심한 사회적 불평등을 경험하고 있었던 일반 대중들에게는 점차 사치와 향락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상황 속에서, 새로운 예술적 운동으로 신고전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신고전주의는 로코코 문화의 화려한 장식을 배제하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 예술의 간결함, 균형, 도덕적 진지함을 재해석하려는 시도였다. 때문에 엄격한 기하학적 구성과 도덕적 교훈이 될 수 있는 역사적 혹은 신화적 주제를 선호했다. 지식계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탄생한 계몽주의 역시 이러한 문화적, 사회적 변화의 연장선상에서 등장했다. 계몽주의는 이성과 과학적 방법론을 중심으로 사회적 불평등과 불합리성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추구했다. 볼테르, 장 자크 루소, 임마누엘 칸트와 같은 사상가들은 개인의 자유, 평등, 사회 계약론 등을 제안하며, 종교적 미신과 교회의 권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시했다. 이들은 기존의 권력 구조와 전통적 가치에 대한 도전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사고방식과 사회적 변화를 모색했다.


결국 이러한 지적, 문화적 변화의 흐름은 프랑스 혁명(1789-1799) 과 같은 사회적, 정치적 변혁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혁명은 단순히 자유, 평등, 박애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기존 사회 구조와 전통적 가치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렇기에 어떤 면에서는 사회적, 도덕적 가치의 변화를 촉구한 프랑스 혁명은 로코코 예술이 표현하는 표면적인 아름다움과 향락적 생활 방식에 대한 불만과 반발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사치와 향락을 비판하기 위해 선택한 과학적 방법론과 논리적 사고는 탁월한 효과를 거두었다. 지식의 확산, 이성적 사고, 그리고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 큰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었고, 정치적 자유, 민주주의, 그리고 과학적 진보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따라서 당시의 사람들이 무지를 깨닫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세계관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은 종종 무시되거나 억제되었다. 이성을 강조할수록, 개인의 감정과 예술적 표현에 대한 중요성은 간과되었다. 더불어 당시 발생한 산업혁명은 개인들에게 무기력한 자신을 느끼게 했다. 물론 산업혁명은 기계와 공장이 생산의 중심이 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긍정성이 있다. 또한 대규모 공장 생산, 기계화, 그리고 도시화는 놀라운 경제적 성장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로 인해 노동자 계급은 긴 근로시간, 열악한 작업 환경, 그리고 낮은 임금으로 고통 받아야 했다. 인간은 종종 기계의 한 부품처럼 여겨졌으며, 이는 개인의 창의력과 자유의 억압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대다수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에 맞서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어려웠다. 변화가 그만큼 강력하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이는 마치 중세시대 강력한 종교적 가치로 인간을 지배했듯 이성과 합리의 추구와 그로인한 사회적 결과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한 것과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모든 억압은 반드시 반발을 불러오는 법이다. 이성과 합리를 추구했던 문화 역시 이를 피해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합리적 이성이 제공하는 억압 대신 인간의 감정, 자연과의 깊은 연결, 개인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중시하는 자유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결과로 낭만주의가 탄생했다. 


낭만주의는 자연의 원시적인 아름다움, 인간 감정의 복잡성, 그리고 개인적인 경험과 상상의 세계를 중시하는 특성이 있었다. 예를 들어, 당시 윌리엄 워즈워스와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드 같은 시인들은 자연과의 깊은 유대를 강조하는 작품을 통해 인간 정신의 평온과 영감의 원천으로 묘사했다. 또한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와 같은 화가들도 자연의 장엄한 풍경을 통해 인간과 자연과의 심오한 관계를 그려냈다. 이러한 작품들은 대체로 산업화가 진행되는 사회에서 자연에 대한 동경과 인간의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처럼 낭만주의는 현실의 복잡함과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낭만주의 역시 현실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인간의 내면의 욕구에 집중하다보니, 실제 대다수 사람들이 겪는 사회적 문제와 불평등에 대해서는 소홀히 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낭만주의가 추구하는 이상이나 주관적 감성추구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의 문제들, 노동과 빈곤, 사회적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한다. 때문에 사람들에게 낭만주의는 현실도피와도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점차 사람들은 이상의 추구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를 원했다. 현실을 외면한 이상이 의미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개인의 감성적 표현보다는 현실과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 자신의 실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로 인해 리얼리즘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등장했다. 


19세기 등장한 리얼리즘은 낭만주의가 해결하지 못한 사회적 문제들을 끌어들임으로써 사회의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사람들은 현실의 부정성과 모순을 드러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예를 들어 구스타브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과 같은 작품은 노동자 계급의 고단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직설적인 방법으로 사회적 현실을 비판하고, 현실의 문제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자 했던 것이었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같은 소설은 19세기 중반 러시아 사회의 복잡한 사회적, 경제적 현실을 깊이 있게 다루며, 리얼리즘의 핵심적인 특징을 보여줬다. 작가는 주인공 로독 라스콜니코프의 삶을 통해, 당시 러시아의 사회적 불평등, 빈곤, 도덕적 혼란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가난한 지역의 삶, 군중 속의 다양한 인물들, 그리고 사회 계층 간의 긴장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이러한 사실적 배경의 묘사는 소설의 주인공의 심리적 갈등과 행동의 동기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따라서 "죄와 벌"은 단순한 사회적 묘사를 넘어서 사회적 상황 간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드러내며, 리얼리즘의 핵심적인 요소들을 탁월하게 구현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리얼리즘의 접근 방식도 그 한계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현실에 대한 사실적 반영에 충실했기에 형식주의가 강화되었던 것이다. 이는 리얼리즘의 초점이 외부 현실의 표면적인 묘사와 정확한 재현에 맞춰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나친 형식적 치중은 현실을 재해석하거나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기는 것을 방해했다. 때문에 리얼리즘은 개인의 내면세계와 주관적 경험, 의식의 복잡성은 반영하지 못했다. 더 정확하게는 개인들의 다양한 인식은 오히려 사실의 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었기에 의도적으로 배격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리얼리즘의 추구는 곧잘 염세주의와 같은 회의와 절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3자적 시각으로 객관화된 세계를 재현했으니 자신이라는 주체는 관찰자의 지위를 얻게 되고 자연스럽게 현실에는 개입하지 못한다. 개입하는 순간 현실은 왜곡되는 것은 분명했다. 때문에 이러한 인식은 결국 현실을 바라보는 자신을 지워버리고 이는 곧 자신이 겪는 삶의 고통과 즐거움조차 덧없고 무의미하게 되어버린다. 


그럼 당시 현실은 어떠했을까.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쳐 인류는 1차 세계대전을 비롯한 역사적 사건들, 기술의 급속한 발전, 사회적 변화 등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적 상황에 직면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개인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리얼리즘은 객관화된 시선이라는 형식을 고집했다. 이는 전쟁 같은 극단적인 혼란에서 단순히 고통이라는 상황만을 나열할 뿐 어떤 대안도 제시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누구나 겪고 있는 고통을 다시 확인한다고 해서 고통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살아야하는 이유를 찾는 사람에게 현실만을 보여준다? 이런 잔인한 충고가 어디 있을까. 결국 삶의 동기를 찾지 못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삶에 대한 회의나 절망뿐이다.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어쩌면 사실을 초월하는 현실의 재해석과 다양한 변화의 가능성일 것이다. 그렇기에 리얼리즘이 추구했던 형식주의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그래야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었다. 그것은 리얼리즘이 금기시했던 개인의 주관성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비롯한 인간이 갖는 내면세계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리얼리즘이 쌓아올린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해체의 시도였다. 


이러한 시도가 모더니즘의 시작이었다. 이후 인간은 형식이라는 벽을 뛰어넘어 자신의 의식과 현실 인식사이에서 새로운 차원의 문을 만들어갔다. 물론 모더니즘도 리얼리즘과 마찬가지로 사실의 추구에 기반을 두고 있었지만 동시에 사실주의적 표현 방식을 넘어서려 했다. 그것은 기존의 전통적, 직관적인 접근법을 거부한 새로운 방식을 추구였다. 현실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그치지 않고, 인간의 감정과 인식의 내면적 측면에 중점을 두고, 새롭고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고 재구성했다. 때문에 모더니즘은 인간의 마음이 갖는 복잡한 크기만큼 그 표현내용역시 점차 복잡성, 추상성, 주관성이 뚜렷해졌다. 이는 곧 자신의 분석결과나 신념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고 때론 엘리트주의를 강화하기도 했다. 


모더니즘이 이러한 특성을 갖게 된 배경은 근대 사회에서 나타난 다양한 혼란과 불확실성에 대한 해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소 복잡해 보일지라도 가장 이상적인 미래를 구현하기 위해 보편적 진리는 중요한 주제였다. 그렇기에 모더니즘이 제시하는 다양한 표현과 해석은 현실의 복잡성만큼이나 어려운 내용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어려운 내용은 사람들에게 시원스럽지 않았고 때론 모순적으로 느끼게 했다. 간단하게 이런 현상을 정리하자면 사람들은 “네가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모더니즘이 갖는 한계는 진리에 대한 해석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실제로 현실세계는 다양한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가진 개인들의 경험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것에 대해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혹은 우리가 추구해야하는 것인지는 쉽게 말하기 어렵다. 사정이 그러한데도 모더니즘적 관점에서 자신의 신념적 범위 내에서 진리를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예를 들어 두 점을 연결하려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누구나 가장 합리적 연결방법을 직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두 점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선들은 존재하겠지만, 모든 선은 직선에 비해 효율성이 떨어진다. 따라서 이는 상대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말하기 쉽다. 그렇기에 만일 누군가가 가장 이상적인 결과를 추구하려한다면 반드시 직선을 선택해야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그 누구도 두 점을 연결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또한 더 복잡하고 늘어진 채로 연결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두 점의 연결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만 고민하다보니 다른 요소를 쉽게 잊게 된 것이다.


때문에 모더니즘적 사고체계에서는 이러한 다원성과 상대성, 그리고 차이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게 되었다. 굳이 모더니즘이 아니더라도 진리추구는 종종 이러한 상황을 유발한다. 가장 이상적이고 변하지 않는 상황을 설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사람들은 이러난 반복적 상황이 그리 달가울 수많은 없다. 때론 차라리 좀 더 유연하게 인간의 경험이나 가치를 존중할 수 있는 방법들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이러한 고민에서 등장한 사조가 포스트모더니즘이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일원성보다 다는 좀 더 유연하게 다원성과 상대성의 존중을 기반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이 역시 리얼리즘의 근본적 가치인 사실에 기반을 두는 것이었다. 단지 리얼리즘은 사실을 재현하는데 중점을 두었고, 모더니즘은 이에 덧붙여 사실에 대한 인간의 내면과 극복의 욕구를 반영한 진리추구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한 연장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개인들이 사실에 부여한 수많은 의미를 모두 존중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다양한 관점과 해석을 중시하며, 진리가 단일하고 보편적이라는 관념을 거부한다. 


하지만 리얼리즘이나 모더니즘이 그러했듯이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현실의 객관적 상황에 대한 사람들의 입장을 보여줄 뿐 그것은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했다. 어쩌면 현실이라는 실체를 무시할 수 없었던 탓일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세계에는 대립과 갈등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관점에서 이 대립과 갈등의 주체는 모두 가치가 부여되어있어 어느 한쪽의 입장에 설 수 없다. 그렇기에 단지 관찰자가 되어 두 주체가 자신을 성찰하고 균형과 조화를 찾을 때까지 지켜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는 또다시 새로운 요구를 갖게 한다. 그것은 안정, 반발, 새로움이라는 순환적 형식의 특성을 반영한다. 이러한 순환은 현실을 해결하기 위한 고민과 실행은 지금까지 인류가 존재했던 전 과정에서 나타타난 자연스러운 형식이다. 물론 각 시대에서 나타난 강조된 현상은 단지 그 시대의 주된 의식과 생각의 반영에 불과하다. 따라서 더욱 구체적이고 다채로운 상황들은 종종 쉽게 무시되거나 단순화된다. 그러한 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시대에는 어떤 것이 강조될것일지는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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