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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음 May 24. 2022

나는 심이다

정지음,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 중에서

몇 년 전 과금을 불사르며 몰두했던 게임 중 ‘심시티 빌드 잇(SIMCITY BUILDIT)’이라는 게 있다. 내가 시장이 되어 가상의 시민 ‘심’들과 함께 도시를 개발해 나가는 게임이다. 대충 집 짓고 길 내고 공원이나 지어주면 될 것 같았는데 도시가 커질수록 심들의 아우성이 거세졌다. 어찌나 불만이 많은지 인앱구매를 남발해도 감당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있는 돈 없는 돈 쏟아부어 경찰서를 지으면 하수 처리 시설이 없다며 드러누웠다. 땡전을 박박 긁어 하수 처리 시 설을 완성하면, 또 거기서 악취가 나 못 살겠다며 코를 쥐었다. 

그래도 나는 노력했다. 엄마 아빠가 잠들면 그들의 스마트폰까지 가져다 본 계정을 위한 부계정도 두 개나 돌렸다(이 짓거리로 욕을 많이 먹었다. 부계정의 심들이 엄마 아빠가 직장에 있을 때도 하염없이 알림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필사의 정열을 퍼부어도 심들의 만족도는 낮아지기만 했다. 

‘이 심 새끼들이⋯⋯⋯’ 


쩔쩔매다 보니 점차 열이 받기 시작했다. 돈 되는 건물만 짓기도 바쁜데 복지니 뭐니 딴지를 거는 심들이 뻔뻔하게 느껴졌다. 심들은 세금을 냈지만, 지불하는 푼돈에 비해 너무 큰 권리를 주장하곤 했다. 나는 급기야 새벽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미친놈들아, 나 정도면 착한 시장이거든? 싫으면 다른 도시로 가라고!”라고 외치기에 이르렀는데, 막상 이 말을 뱉고 나서는 소름이 돋았다. ‘와우, 이것이 바로 그동안 내가 만났던 사장들의 마인드로구나!’라는 깨달음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후에는 내가 경험했던 악덕 대표들의 얼굴이 차례로 스쳐갔다. 어릴 때부터 알바를 쉬지 않았고 성인이 된 후 이직도 잦았기에 상기할 인물들이 많았다. 성추행과 임금 체불, 가스라이팅, 직장 내 따돌림, 폭언, 보복성 업무 지시, 인격 모독 등등 별별 악몽이 가능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단순했다. 그들에겐 회사가 ‘심시티’고 나를 비롯한 직원들이 익명의 ‘심’이었던 것이다. 노동력을 심들의 세금 개념으로 치환해보면 인식 차이가 더욱 명확해졌다. 나의 업무는 나에게만 크고 사장들에게는 한없이 작았을 거였다. 내가 회사에서 보내는 8시간도 그들에겐 8분처럼 짧아 보였을 테고, 그런 식이니까 우리는 영원히 존중 없는 수직 관계 속에서 서로를 멸시하게 되는 것이었다. 


나는 고유한 이름과 서사를 가진 개인이지만 그조차 나만의 정의였다. 그 때문에 서로를 인간으로 여겼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상적으로 자행될 수 있었다. 죽을 때까지 사장들의 썩은 심리를 알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시장이 됨으로써 맛보기에는 성공한 듯했다. 기분 나쁜 앎이었다. 순진한 나는 지금까지도 지나간 사장들을 나쁜 ‘인간’이라 칭하고 있었다. 그들이 나를 인간으로 보지 않을 때도, 나는 인간으로는 보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당시엔 나도 모르게 악인들을 선의로 해석했다는 사실에 약이 올랐다. 이 사회는 너무 나빠서 자기가 착했다는 걸 깨달은 인간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해지고 만다. 


그래도 후에 다시 한심한 회사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심으로서의 정체화로 심신을 무장할 순 있었다. 이전의 나는 회사가 어떻게 대우하든 양심을 불태우는 사람이었다. 사장이 비정상이라고 함께 인성을 베리거나 무능해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유형의 재산과 권력이 없는 대신 아무것도 없는 자 특유의 자존심이 있었다. 그것은 고결함에 대한 선망이었다. ‘열심히, 꿋꿋이, 충실히’ 살면 언젠가 빛을 보리란 판타지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그저 ‘심’이라면? 가닿을 수 없는 존엄과 함께 지고 있는 의무도 ‘0’으로 돌아가는 셈이었다. 

심으로서의 자아는 사장들과의 적절한 거리감을 잴 때도 훌륭한 기준이 되었다. 가끔 진짜 나쁜 사람들 중에, 온탕은 혼자 누리면서 냉탕에만 같이 가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잘 벌 때는 한없이 개인주의자면서 못 벌 때는 가족애나 의리를 강조하는 타입이었다. 하지만 심은 경영에 휘둘리는 객체일 뿐 경영에 참여하는 주체가 아니었다. 나는 자본주의 네트워크를 둥둥 떠다니는 데이터에 불과하니까, 회사의 영광에서든 부진에서든 자유로웠고 언젠가부터는 그런 가벼움을 즐기게 되었다. 시장님 같은 사장님에게 기대하지 않으니 속이 썩도록 실망할 일도 없어졌다. 퇴근하는 즉시 남의 심시티를 잊을 수 있고, 일에 대한 예속을 버리면서 딱 그만큼 행복해졌다. 

물론 가장 큰 행복은 누구의 심시티에도 속하지 않는 상태였다. 시장님이 하사하는 혜택은 없지만, 시장님 본인도 없다는 사실이 인생을 충만하게 만들어주었다. 진정한 복지란 사라져주는 것, 진정한 복수도 사라지게 해주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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