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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음 May 24. 2022

서른 판타지

정지음,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 중에서

“너도 이제 00살인데 정신 차려야지.”


나는 또래보다 철딱서니가 없어 이 말을 매년 들으면서 자랐다. 20, 25, 27, 28⋯⋯ 사실 29세까지도 큰 타격은 없었다. 정신 차리는 것보단 정신 차리란 말이 주는 스트레스를 감내하는 게 쉬운 탓이었다. 그러나 30은 달랐다. “너도 이제 서른인데 정신 차려야지”는, “너도 이제

스물아홉인데 정신 차려야지”보다 훨씬 타격감이 컸다.


나는 겸손한 척하면서 겸손 아닌 이유들로 자주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털어놓자면 대책 없는 나 자신이 비렁뱅이 같고 창피했다. 그동안 어린 나이로 얼버무려온 여러 가지 격차가 점차 분명해지고 있었다.

서른이지만 아무것도 아닌 나.

서른밖에 안 됐는데 이미 무언가가 되어 있는 저 사람들.

우린 종이비행기와 우주 로켓처럼 생애 추진력이 달랐다. 끝도 없이 비교하다 보면 내가 자산, 커리어, (정신)건강, 인맥 등의 장르에서 골고루 비루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패배였고, 내 처지의 범인이 바로 나임을 깨달아가는 굴욕스러운 과정이기도 했다.


공자가 말하길 30세란 곧 ‘이립(而立)’이었다. 마음이 확고하여 도덕 위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나이. 나는 그 사람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데도 스물여덟쯤부터 이립이란 단어를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난들 조금도 확고해지지 않을 내 모습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층 더 부도덕하고 부산스러운 서른이 됨으로써 마침내 자기 예언을 이루었다. 부모님이 나를 종종 떠보면서도 안심하지 못하는 걸 보면 밖으로도 어설픈 티가 다 나는 것 같았다.

“너 혹시라도 뭐 사고 친 거 있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해. 안 혼낼 테니까.”

“무슨 소리야, 나는 일단 결백해! 앞날은 새카맣지만.”

“진짜 문제없는 거지? 정말이지?”

“우웅.”

“너 돈은 얼마나 갖고 있어?”

“몰라. 한 10에서⋯⋯ 15만 원.”

“그게 어떻게 문제가 없는 거니? 아우, 내가 정말 너 때문에 (이하 생략)⋯⋯.”

나는 입이 작고 볼살이 통통해 뭘 말해도 웅얼거리는 것 같고, 이 점이 다시 부모님께 불신을 드린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말버릇도 통장 잔고도 시정되지 않는다.


그러던 내가 《젊은 ADHD의 슬픔》 출간 후엔 갑자기 여기저기서 정중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책을 내긴 했어도 작가라는 호칭은 아직 어리둥절한 가운데, 1992년생 독자님들의 고민 상담 메시지가 이어졌다. 그분들 중 상당수가 작가님에 비해 자신이 너무 초라하다며 슬퍼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동된 SNS 계정을 눌러보면 이미 나보다 훌륭히 살고 계시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어떤 분들께는 오히려 내가 인생 알차게 사는 꿀팁을 여쭙고 싶어질 정도였다. 확실히 서른에는 요상한 마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저 30세를 달성했을 뿐인데, 각자 대단하고 고유한 우리 중 충만해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서른에 공격받는 선량한 이들을 떠올리다 보면, 결국 그들의 가치보다는 서른의 가치를 의심하게 되었다. 서른이 정말 그렇게나 대단한 것인지. 애초에 나이 자체가 사회적 합의의 탈을 쓴 사회적 판타지 아닌지. 곰곰이 따져볼수록 역시 모든 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내가 설계한 환상이 아니기에 매력도 없는 거였다. 

작은 고난에도 쉽게 꼬마가 되는 나는 서른이 어른이라는 데 동의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 생각에 서른이란 그저 3과 0이 갑작스레 한편을 먹고 내게 민망을 세뇌하는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서른에 당당하긴 어렵고 수치심에 사로잡히긴 쉬운 것이었다. 때로는 서른에 부과된 의무가 오히려 서른의 묘미를 망치는구나 싶기도 했다. 서른이 보장하는 것은 겨우 서른하나뿐일진대 어차피 올 순간들이 두려워 손톱만 씹게 되니 말이다.


서른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내가 겁이 많아 오히려 무리수를 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게는 불안할 때마다 인생을 다 아는 척하는 습관이 있었다. 어떤 나쁜 일이 닥쳐올지 전부 안다고 소리쳐두면, 스포일러에 김이 샌 불행이 나를 포기하리란 계산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아는 바가 없었다. 나는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만고불변의 진리에 따라 그저 신명 나게 덜그럭거릴 뿐이었다. 이런 방법은 파이팅이 넘쳐 보여도 나약하고 조악한 처세라 오히려 불행의 먹잇감이 되곤 한다. 따지고 보면 나의 얼룩진 1년이 그 증명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제부터는 서른을 평가하지 않으려 한다. 후회한다거나 후회하지 않는다거나, 좋았다거나 나빴다는 식의 감상도 덧붙이지 않고 넘어간다. 혹여 칭찬만을 허용하더라도 그것 또한 어떤 의미의 다그침이 될 것이기에 차라리 전부 멈추는 것이다. 2021년을 미리 종료한 채 2022년으로 넘어가는 중이란 생각이 든다. 조금 더 가뿐한 심정이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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