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un Jul 12. 2021

하얀 나비와 꽃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삶을 되찾고 있음을 기념하며

  오늘 병원을 걸어서 다녀오는 길에 사진을 찍었다. 노란 꽃 주위로 하얀 나비 한 마리가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바삐 날아다니는 모양새에 눈길을 빼앗겼다. 꽃에 앉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무얼 하고 있길래 저렇게 혼자 꽃 주위를 현란하게 날고 있지? 하고 의문을 가지던 찰나에 나비가 다른 곳으로 날아올랐고, 이내 나비가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임을 알게 되었다. 두 마리였구나! 깨닫는 순간에 왜인지 엄청 즐거워졌다. 연인일까? 친구일까? 한쪽이 구애의 몸짓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궁금하고 신기한 마음에 가던 길을 멈춰 서서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 다시 걸어오던 길, 푸른 잎 사이에 핀 작고 하얀 꽃이 또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흔하고 소박한 꽃 무리가 좋아서 들여다보다가, 사진에 담았다. 찍고 나니 사진이 마음에 들어서 기뻤다. 그리고 나서야 새로운 무언가를 느꼈다. 나는 원래 이렇게 주변에 정신을 잘 파는 사람이었는데, 길가의 꽃과 저 멀리 자동차 밑으로 숨어 들어간 길고양이와 동네 교회에서 아이들이 이름을 붙여 키우는 화분 따위를 자세히 들여다보고 사진으로, 기억으로 남기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러지 않았다는 걸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주변의 풍경에 무감해졌고, 그저 어디론가 가야 한다는 목적성만으로 건조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길을 걷는 것이 노동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걸 몰랐다.  

나는 원래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을 많이 찍는 사람이었다. 매일 보던 학교에서 자취방 가는 길도, 기분 전환 삼아 종종 놀러 가던 연남동도, 아무것도 달라진 점이 없어도 나는 사진을 찍었다. 매일의 날씨가 달랐고 기분이 달랐고 계절과 시간이 달랐으므로. 그 풍경들을 마주쳤을 때 내가 듣고 있던 음악이 달라서 늘 새로운 풍경처럼 느껴졌으므로.

  그러고 보니 문득, 꽤 오랫동안 음악이 부재한 삶을 살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음악 편식도 심하고 딱 듣는 장르와 가수의 음악만 주로 듣지만, 그래도 나에게 음악은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다. 나갈 준비를 할 때도, 어딘가를 갈 때도 항상 음악을 들었고, 계절이나 날씨에 따라, 기쁘거나 슬플 때, 힘이 필요할 때, 집중해야 할 때, 운동할 때 듣는 음악이 있었다. 귀가 아플 정도로 이어폰을 꽂고 살았었다. 돌아보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에 남아있는 순간들은 음악이 함께했다. 재수학원에서 야간자습을 하고 지친 발걸음을 옮기던 밤, 파리에서 샤를 드골 공항으로 가던 열차 안, 늦은 밤 심야영화를 보고 자취방으로 돌아가던 길, 퀴어퍼레이드에서 에너지를 발산하며 춤을 추던 날. 그래서 그 노래들을 들으면 그 노래에 겹겹이 쌓인 나만의 기억과 감각들이 생생히 살아나곤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음악을 듣지 않게 되었다. 주변의 소음이 싫어서 이어폰을 끼고 노이즈 캔슬링을 켰지만, 그뿐이었다. 수면 아래에서 듣는 바깥의 소리처럼 이어폰에 막혀 먹먹하게 작아진 소리를 무시하며 해야만 하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의미 없는 영상을 틀어두고 제대로 보지도 않은 채 누워만 있었다. 노래가 시작할 때 두둥하고 묵직하게 울리는 드럼소리에 느끼던 전율, 특정 부분에서 허스키하게 갈라지는 가수의 목소리, 세상의 가장 밑바닥까지 너와 함께하겠다는 그런 진부한 가사에 느끼던 감동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런 무채색의 공허한 진공 상태에 있었구나, 하고 오늘 알았다. 푹푹 찌는 날씨에 마스크 안에서 땀이 흘러도 신나는 음악에 흥에 겨운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오다가. 

  꿈에서 깨어나고 있는 기분이다. 삶을 되찾고 있다. 그렇게 믿고 싶다. 처음 병원에 간 날, 주변의 일에 무감각하냐는 질문에 매우 그렇다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온 세상이 두터운 장막 너머에 있는 것처럼 흐릿하고 잿빛이었던 때가 있었다. 나는 원래 사랑하는 것이 너무 많아 탈이었는데, 하고 싶고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이 너무 많고 다양해서 정작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시간을 쪼개야 하는 사람이었는데. 한동안은 사랑하던 음악에도, 책에도, 글에도, 게임에도, 그 무엇에도 열정이 없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의 일이다. 그래서 오늘 길가의 나비와 꽃에 눈이 갔을 때,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여름에 어울리는 노래를 찾아 들으며 걸어올 때 나를 다시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이 행복하지는 않고, 행복할 수도 없겠지만, 그래도 매일 즐거운 일이 하나 정도는 있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 같다. 흥얼거림과 사소한 호기심, 가벼운 글을 쓰고 좋아하는 책을 읽는 에너지는 돌아왔다. 나도 모르는 새에 잃어버렸던 내 다른 조각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오늘의 작은 기쁨들을 기념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종이책을 읽고 연필로 글을 씁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