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6의 연애이야기
2021. 3. 21
요즘 전성기를 맞이한 불면증은 동이 트도록 나를 재우지 않았다. 무력하게 괴로이 뒹굴거리며 날밤을 새웠다. 넷플릭스에서 브리저튼을 보며 주인공이 공작과 이어질 걸 알면서도 왕자와 결혼하길 내심 바라보고, 유튜브에 있는 비긴어게인 버스킹 클립들을 듣기도 하고,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피드를 번갈아가면서 새로고침하다가 sns 끊어야 하는데-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 밀리의 서재를 뒤적여 일간 이슬아 수필집을 읽기 시작했다. 작가의 열 살 무렵 연애담을 읽다가 어, 나도 뭐 있었는데, 싶어서 쓰러 왔다. 세 시간 뒤면 출근해야 하는데, 출근해서 빙빙 졸거나 혹은 자다가 아예 출근하지 못하는 미래가 그려진다.
집에서 혼자 TV를 보다가 당시 쓰던 매직홀 폴더폰을 열어서 문자를 확인하던 장면이 기억난다. '비온다.' 모르는 번호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이전 버튼을 누르니 그 전에 문자가 하나 더 와 있었다. '나 너 좋아해.'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나 너 좋아해'를 전송했을 어떤 아이가, 내가 TV를 보느라 확인을 하지 않자 답장을 기다리다가 '비온다'라고 문자 하나를 더 보낸 것이었다. 비를 보고 좋아하는 아이를 떠올리다니 낭만적인 6학년이었다.
누구냐고 물어보니 말해주지 않았다. 5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의심과 불안이 많고 철저했던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물었고, 장난치는거면 하지 말라고 보냈다. 그 아이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고, 장난이 아니라고 진지하게 답장을 보냈다. 왜 누구인지는 안 말해주냐고 했더니 그냥 혼자 좋아하는 거니까, 라고 했고 아니 그럼 문자는 왜 보내냐고 따졌는데 뭐라고 답장이 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문자는 몇 달 간 이어졌다. 매직홀 폴더폰을 잃어버려서 그 때의 문자 내용은 내 기억속에만 일부 남아있는데, '주말에 가족여행 가는데 열쇠고리 사다줄까, 너 닮은 걸로.' 같은 문자를 받았었다. 맞춤법도 잘 지키고 플러팅도 적당히 잘 치는 정중한 열세살이었다. 맞춤법을 수시로 틀리는 상대였다면 열세살 신희의 관심은 짜게 식어버렸을 거다.
나는 흥미롭고 재미있었지만 궁금증과 답답함이 조금 더 컸다.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친구 전화로 그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아이는 070으로 시작하는 집 전화번호를 사용했고, 우리가 전화를 걸었을 때는 엄마로 추정되는 분이 전화를 받았다. 바꿔달라고 해야 하는데 이름을 몰랐던 우리는 "아들 있어요?"라고 말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살짝 의아해하는 것 같더니 누군가를 불렀다. OO아-라고 부르는데 잘 안 들려서 이름을 듣지 못했다. 이내 "여보세요"하는 남자애 목소리가 들렸는데, 헉 뭐라고 말하지 하다가 전화를 끊어버렸다.
억지로 정체를 알아내려 했던 게 괜히 미안해져서 사과를 했다. 그애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뒤로도 계속 문자를 주고받았다. 연락이 끊긴 건 내가 휴대폰을 잃어버리면서였던 것 같다. 겁이 많은 그 아이는 끝까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해주지 않았고, 당시에 5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애들을 생각하며 곰곰이 추려보기도 했지만 결국 아직도 나는 그애가 누군지 모른다.
내가 번호까지 바꾸었으니 이제 결코 서로 찾을 수 없겠지만, 오랜만에 떠올리니 새삼 다시 궁금해진다. 기억이 별로 없고 즐거운 기억은 더 없는 초등학생 시절에, 다정한 추억을 남겨줘서 고맙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