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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 Jan 01. 2022

다정한 이웃에게 행운을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2021)



"철이 없었죠, 친구들 대학 보내겠다고 전 세계 사람들 기억을 지우려고 했던 게."

올해 유행했던 '철이 없었죠'라는 밈으로 글을 시작해봤다. 극 중 닥터 스트레인지의 말처럼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세상을 구했던 스파이더맨의 모습을 기억하는 우리에게,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2021)>의 피터(톰 홀랜드)는 좀 철이 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이제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이에 아버지 같던 토니를 잃고 전 세계 사람들의 미움까지 받게 되었다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무턱대고 닥터 스트레인지를 찾아가서 엄청난 주문을 부탁하고, 그래 놓곤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지켜보다가 결국 주문을 망쳐버리고, 죽을 운명인 빌런들을 도와주겠다고 수습하기 어려울 일을 벌이는 피터의 모습이 조금 답답하게 느껴질 법도 하다.

과거를 돌아보며 농담조로 말하는 첫 문장의 밈처럼, 피터의 이런 행동들도 그저 어릴 적 흑역사로 웃어넘길 수 있다면 좋았을 테다. 하지만 아마 피터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노 웨이 홈에서 자신이 했던 실수들을 웃으며 돌아보지는 못할 것이다. 피터의 선택으로 인해 유일한 가족이었던 메이 숙모는 죽고, 사랑하는 친구들인 엠제이와 네드뿐만 아니라 그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완전한 타인이 됐기 때문이다. 노 웨이 홈에서는 팬들에게 주는 선물처럼 1세대 스파이더맨과 2세대 스파이더맨의 이야기까지 조명하며, '스파이더맨'이 '친절한 이웃'이 되기 위해 잃어버린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갈등을 보복적으로 해소하며 쾌락을 주는 '사이다' 서사가 유행을 넘어 기본값으로 요구되는 시대에, 답답할 만큼 우직하게 '옳은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그에 따른 책임까지 짊어지는 스파이더맨의 이야기는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 반갑고 다행스럽다.

그러나 영화에서 느껴지는 답답함이 비단 스파이더맨이 '우직하게 선을 좇아서'만은 아니다. 사람들이 스파이더맨을 사랑하는 이유는 답답함과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한결같이 '옳은 일', '선한 일'을 추구하는 다정한 이웃이기 때문이다. 노 웨이 홈에서 피터는 큰 희생을 치렀고 옳은 일을 하고자 스스로를 내던졌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의구심이 든다. 저게 진정 '선한 일'일까? 죽을 운명인 사람들을 억지로 살리는 게, 무고한 사람들을 공격할 가능성도 전적도 있는 사람들을 안전장치 하나 없이 우르르 풀어주는 게 '옳은 일'인가? 피터의 행동이 '옳은 일'이라는 믿음이 흔들리면 '스파이더맨'의 아주 핵심적인 정체성이 힘을 잃어버린다. 때문에 메이가 피터에게 '옳은 일'을 강조하는 장면 또한 마냥 감동적으로 보이지 않고, 어쩌면 그린 고블린의 말처럼 보호자가 피보호자에게 '본인의 신념을 강요하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노 웨이 홈이 끝난 시점에서, MCU의 스파이더맨은 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모든 면에서 든든한 백그라운드였던 아이언맨을 잃었다. 옳은 일을 하고자 했으나 서툴렀던 탓에 커다란 희생을 치렀고, 이를 통해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스파이더맨의 슬로건을 마음 깊이 새겼다. 노 웨이 홈 극 중에서 1대와 2대 스파이더맨을 통해 언급되기도 한 '슈퍼히어로의 익명성'을 잔인한 방식이었지만 되찾았다. 아이언맨의 후광과 함께 등장해 히어로가 되고 싶어 하던, 조금은 철없던 피터 파커는 세 편의 솔로 무비와 인피니티 워-엔드게임을 거쳐 '익명성을 가진 서민 히어로, 우리들의 다정한 이웃'이라는 스파이더맨의 정체성으로 회귀했다. 낡은 방에 짐을 풀고, 재봉틀로 만든 수트를 입은 채 눈밭을 뛰노는 스파이더맨의 모습은, 지난한 과정을 통해 비로소 제자리에 돌아온 듯한 느낌이다. 그 자리가 결코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피터가 생각했던 것처럼 빛나고 재밌는 자리는 아닌 듯하지만, 혼란했던 이전 솔로 무비의 엔딩과 달리, 노 웨이 홈의 엔딩 장면에서 이미 많은 것을 잃은 피터는 그럼에도 조금은 후련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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